다문화 사회, 미국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의미
다문화 사회, 미국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의미
  • 정영민
  • 승인 2016.12.2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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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살지만, 한국어를 주로 쓰는 한인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얼마간 살다가 여러 연유로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이곳 미국 땅에 와 사는 재미동포일 것이다. 낯선 땅 미국에 건너오면 누구든지 처음엔 갑자기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묘한 기분을 느끼며 지낸다.  한국에서 했던 대로 '먹고, 자고, 입고' 살아가려니 무엇하나 제 힘으로 처리할 수 없어, 결국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에 익숙해 있던 한국 사람이 미국 문화 속에 던져졌으니 걸음마를 하며 하나하나 겪고 배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문화'라는 말은 현대인이 많이 쓰는 단어이다. '군사 문화', '일제 문화', '대중 문화', '문화인', '신세대 문화' 등 지역, 시대, 영역 별로 구분해, ‘문화’를 붙여 그 무엇을 일컬을 때가 참 많다.  하지만 정작 ‘문화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한 마디로 쉽게 정의하기 어렵기도 하다.

문화란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교육, 대대로 전승되는 모든 것’이 아닐까.  이러한 문화 전승의 과정을 '사회화'라고 하는데, 이는 그 사회의 일원인 개인의 습관, 기호, 성격, 사상까지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문화’라는 말은 본래 우리 선조들이 만든 말은 아니고, 서구 단어를 번역한 말이라고 한다. 영어로 ‘culture’, 독어로 ‘kultur’라고 하는 말은 불과 100여 년 전에 비로소 학술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까지 전문 용어로는 쓰지 않았다.  ‘문화’보다는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단어가 좀 더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문명’이라는 말에는 '예의범절을 안다'는 뜻이 있다.  즉, 문명인(the civilized)은 식사 예법이나 인사 법 등을 잘 아는 세련된 사람을 지칭했다. 전쟁으로 발생한 노예를 제외한 고대 사회의 시민 층을 일컫는 말이었다.

힘없이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 하는 이들에게 도덕이나 윤리, 법도, 예절 등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노예는 거칠고 예의도 모른다’라는 판단은 노예를 부리는 사람들의 일방적인 판단이다. 노예 입장에서 생각하면 사람을 강제로 잡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부리는 저들이야말로 천하에 '거친 사람'이 아니었을까.  문화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힘을 가진 자들의 특정한 문화만을 절대적, 완전한 것이라고 강요할 수 없다. 어떤 문화이든 상호 존중 되어야함이 이치이다.

미국에 살다보면 흔히 남의 문화를 자신이 가진 문화의 근거로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무수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어느 날, 한인 유학생이 조그만 학교 기숙사의 공용 부엌에서 김치와 밥을 먹고 있었는데, 한 미국 학생이 짜증난 얼굴로 오더니 뒤에서 방향제를 뿌렸다는 것이다. 그 한인 유학생은 당혹스럽고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서 더는 밥을 먹고 싶지 않아졌다고 한다.  

이런 일을 우리는 '문화 충돌'이라 부른다.  그 미국 학생은 불쾌한 냄새가 나면 냄새의 원인인 김치 냄새를 제거하려 한 것이고, 한인 유학생은 낯설고 기름진 미국 음식 대신 김치와 밥을 화끈하게 먹어보려 했을 뿐이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문화 충돌은 항상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오히려 각각의 문화들이 서로 만나 부딪혀 섞이면서 새로운 문화로 발전해온 것이 인류문화사가 아니던가.

기독교인과 문화

기독교인에게 문화는 어떤 의미일까. 성서는 문화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가끔 몇몇 교인에게 ‘기독교인이 노래방에 가도 되느냐’는 질문을 들을 때가 있다. 이러한 질문의 배후에는 ‘어떤 교인이 노래방에 자주 다니는데, 기독교인으로서 응당 잘못된 게 아니냐’라는 자신의 신념에 동의를 구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 또는 ‘친구들과 노래방이라 곳에 한 번 가봤더니 생각보다 그리  몹쓸 곳이 아니더라. 자기 신앙만 확실하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대해 동의를 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질문들은 ‘노래방’이 유행했을 때 받은 것이지만, 이전에도 비슷한 질문이 많았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기독교인이 주일 날 짜장면 사 먹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약 한 세대 전 한국의 기독교가 불붙듯 번져갈 즈음, 한 교회의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한 교회 전도사가 온종일 수고하는 봉사자, 주일학교 교사와 함께 식사 및 회의를 하러 중국집에 모였다.

그런데 그 교회 주일학교 부장인 한 장로가 대단히 신실했는데, 이 분이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중국집에 갑자기 나타나, 교사들과 철없는 전도사를 향해 "절대로 주일날 짜장면 사 먹어서는 안 돼요"라고 마구 나무라셨다는 것이다. 짜장면을 맛있게 먹던 교사 중 한 사람이 동료 교사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거봐, 내가 뭐랬어. 짬뽕으로 하자고 했잖아!' 짜장면이 기독교와 대체 무슨 원수를 졌길래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기독교’ 문화와 ‘노래방, 짜장면’의 모습을 한 한국의 문화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먹느냐 마느냐', '가느냐 마느냐' 식의 결단을 요구하는 입장은 기독교와 문화를 대립적으로 보는 배타적인(exclusivism) 시각이다. ‘기독교와 짜장면이 서로 원수이냐. 기독교인도 세상 문화 속에 살고, 세상 속에 기독교인도 있는 것’이라며, 유별난 구분보다는 서로를 동일선상에 두려는 혼합주의(syncretism) 입장도 있을 수 있다.

배타주의는 기독교와 문화 사이에서 기독교의 초월적 권위를 존중하면서, 그 사회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문화유산은 배격하려던 입장이다. 선교지에서 기독교인이 된 현지인은 자신의 문화에서 단절, 고립되고 만다.  이는 서구 선교사가 조선에 와 선교할 때 취한 입장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의 훌륭한 점까지 홀대하고 무시하는 과오를 범했다는 평가를 쉽게 듣는다. 

특히 '이것이냐 저것이냐' 식의 배타주의는 흑백론적이며 이원론적인 사고로 고착되어, 잘못된 현실을 변화, 개혁하고자 할 때 상당한 역기능으로 작용한다.  혼합주의도 배타주의만큼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혼합의 과정에서 기독교의 독자성을 약화시키거나 상실하게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전반적인 한국 교회 교인들의 기복적 신앙 양태를 들 수 있다. 이는 무속 신앙과 성서의 축복관이 부정적으로 혼합되어 나타나는 경향이다.        

그렇다면 성서는 우리의 신앙과 문화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구약에는 신앙과 문화 사이에서 이러한 혼합주의적 유혹과 체험, 그리고 배타주의적 경고와 각성의 양면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성서에 나타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소위 성조(聖祖)들의 생활은 천막에 치고 살다가, 다시 가축 떼를 이끌고 풀과 물을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반유목민의 삶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르단 계곡과 산악지역에서 유랑하던 아브라함과 그의 부족 식구들은 주전 1200년경 즈음, 비옥한 반월형 곡창지대의 남쪽 끝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국제 권력의 정치적 공백기를 틈타 일어난 반 유목민족 (에돔, 모압, 암몬족)의 이동의 물결에 휩쓸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고 학자들은 본다.  

하지만 가나안은 이미 그곳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정착하여 농경문화를 일구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풍성한 농산물의 수확을 위해 신격화된 자연의 힘을 숭배했다.  이들이 섬긴 신의 이름은 우리의 귀에도 익숙한 '바알'(Baal) 이다. 바알은 '주인'(lord) 또는 '소유주'(owner)를 의미한다. 천둥과 비를 내리며 땅의 풍요로운 수확을 관장하는 남성 신이었다.  고대 가나안인은 신비스럽고 놀라운 토양의 생산력을 경외했다. 그들이 누린 풍요로움이 바알과 그의 배우자인 아스다롯(Ashtarts)의 성교(性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이들은 농사의 풍성한 소출에 자신들의 생존과 행복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풍산 신 바알을 잘 섬겨서 번성을 보장받으려 했다.  당시 가나안 신전에서는 바알제가 빈번히 행해졌다. 이는 바알의 성관계를 종교의식을 통해 재연하려는 제사로서, 이때 남자는 바알과, 여자는 아스다롯과 동일시되어 실제로 신전에서 성창과 성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제의적 성행위를 단순히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 매음 문화의 관점에서만 매도할 수 없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풍산의 신들을 섬기지 않으면 농사를 지어도 수확을 거둘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계절마다 반복되는 고사(枯事)와 소생(蘇生)이라는 신비를 자연법칙에 의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남신과 여신의 성관계의 결과라고 믿었다. 자신의 생존이 걸려있는 땅의 풍성한 소출을 종교를 통해 지속시키고 강화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인의 신앙은 이들의 자연관과는 정 반대였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공존이 불가능했다.  히브리인에게 자연은 야훼 하나님의 창조 은총의 결과이지, 경외해야 할 신성한 대상이 아니었다.  야훼 하나님은 배우자를 필요로 하는 신도, 자연계의 변화에 따라 소진되고 소생하는 나약한 신도 아니었다.  야훼는 그들에게 어떠한 경쟁자도 용납치 않는 천상하지의 대 주재가 되는 유일신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배타주의적 선택을 그들의 백성들에게 촉구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파를 세겜에 소집하여, 일구지 않은 땅을 주시며 가꾸지 않은 포도와 무화과를 따먹도록 허락한 야훼를 경외하고 일편단심으로 그를 섬길 것을 명령한다. 

"...다른 신들을 버리고 야훼를 섬기시오.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택하시오.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소" (여호수아 24:14-15 공동번역).  

바알 숭배가 횡행하던 아합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야훼가 참 하나님임을 밝히기 전에 백성을 향해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열왕기상 18:21)라고 외치며 결단을 내리도록 종용하였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알을 따르는 것을 '영적인 간음행위'이며 신의 진노를 초래하는 치명적인 우상숭배행위라고 비판한다.

"나 야훼를 버리고 음란을 조장하는 것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아무리 음란을 피워도 자손이 불어나지 않으리라" (호세아 4:10-11)

호세아는 바알이 풍요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는 헛된 망상에 불과하며, 진정한 풍요를 줄 수 있는 실권자는 야훼임을 천명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섬기기를 그쳤기에 그들이 바라는 행복과 번영도 끝났다는 것이다.  가나안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역사서나 예언서 외에도 인류의 기원과 성조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창세기에서 조차 묻어있다.

농경문화의 기우제를 위해 건축된 바벨론의 신전탑인 지구라트(ziggrat)를 바라보며 '혼돈'의 땅이라고 비판한 기록(창세기 11:1-9), 유목민의 표상인 아벨이 짐승제사를 드리자 흠향하신 야훼께서는 농경민의 제물인 곡물제사는 거절하였다는 이야기(창세기 4:1-17), 당대의 의인이라 불리던 노아가 가나안 농산물인 포도로 담근 술에 취해 자식들 앞에 벌거벗고 드러누운 추태를 보였다는 이야기, 그가 함의 후손인 가나안인을 저주했다는 이야기(창세기 9:18-27)는 모두 유목 문화와 농경 문화 갈등과 반발을 투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스라엘 역사는 이러한 가나안 문화의 유혹 앞에 끊임없이 걸려 넘어진 생생한 체험들로 점철되어 있다. 유랑민에서 정착민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인도 이제는 가나안인과 똑같이 ‘어떻게 하면 가축들로 하여금 더 많은 새끼를 낳게 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소출을 수확할 수 있을까’ 하는 일로 골몰하게 된 것이다.  전쟁의 위기와 재난에 직면하여 승리를 주는 야훼에 의지했던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문제를 풀기 위해 이 분야의 이름난 전문가인 바알을 향해 손짓하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이 양쪽으로 부터 동시에 보호를 받으려는 '꿩 먹고 알 먹고' 또는 '양다리 걸치기'식의 절충주의적 시도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고대 이스라엘을 분열, 파괴시키려던 가장 큰 위협인 찬란했던 가나안 농경문화의 바알 숭배는 이제 먼 옛날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얼굴의 바알은 누구인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막강하고 거대한 21세기의 '바알'은 분명 노래방도 짜장면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술, 담배 인가. 물론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폐해와 손실은 개인과 가정을 파괴하여 불행의 구렁텅이로 얼마든지 빠지게 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하다.  과학적으로 담배가 얼마나 호흡기와 폐와 간에 직접, 간접으로 악영향을 준다. 심한 경우 폐암, 간암으로 발병되어 천하보다 귀한 목숨까지 우습게 앗아가 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가도 되느냐', '먹어도 되느냐' 'Yes or No'의 답변을 너무 궁금해 한다.  ‘Yes’ 하면 자유주의자 이며 ‘No’ 하면 보수주의자인가.  우리에겐 왜 ‘Yes’ 인지 ‘No’ 인지가 더 중요하다.  

성서 어디에 ‘담배 피우지 말라’는 말이 있는가. 예수도 가나 혼인 잔치 때 물로 백포도주를 만들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잔'만 하면 될 거 아닌가. 나실인(Nazarite)은 독주를 분명히 마시지 말라고 했으니 예수를 믿는 우리(Nazoreans)도 술을 입에 대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조항은 왜 안 지키는 건가. 우리 조상처럼 머리 땋고 다니던지, 상투하던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노래방에 가서 유행가 안 부르고 복음송이나 찬송가 부르면 되지 않겠는가.  

서로를 분노하게 하고 섭섭하게 하는 이 모든 질문 너머에 막강 배후 조종 세력인 21세기 트럼프 시대의 바알이 여전히 버티고 있는데, 우리는 '몸통'은 가만히 놔두고 '깃털'만 가지고 왈가왈부 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나 이민 사회의 가치 순위 1위에는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가 아니라 건강이 꼽혔다. 여기에 누구하나 이의가 없다.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내 주먹교인이든, 남녀호랑나비 교인이든, 신나라 꿈나라 아기 아기 잘도 잔다 교인이든, 만성 피로에는 ‘구세주구연산’이 최고라면 그것 사다먹는다. 신경통에 바이오 지남철 팔찌가 '왔다'라면 그거 사다 차고 다닌다. 산 강아지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데, 육척거구에 십육문 운동화 신어도 아파서 골골하면 다 헛일이다. 건강을 어디에 쓰고 있는 건지 끝까지 살펴야 한다.  

건강한 손과 발로 남에게 해를 입히고, 도둑질은 안하더라도 그 건강한 육신을 가지고 자기 일신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만 쓴다면 기독교인으로선 명백히 건강의 오용이다. 예수처럼 모든 사람들을 부요케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살고, 천국의 비밀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자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고 순순히 고난의 잔을 마신 것처럼 살지는 못할 망정, 제 몸 하나 제 식구들만을 위해 남이 치이던, 밟히던 상관않고 자신의 재력과 학력, 권력을 사용한다면 젯밥에 눈이 어두은 이스라엘 남정네들이나 한국의 정치 비선 실세들, 국정농단의 주역, 그리고 거기에 부역한 정치인, 대기업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공중의 새들고 먹이고 이름 없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그분을 섬기는 기독교인 이라면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웃이 사흘에 죽 한 그릇 구경을 하던지 말던지 제 곡간 허물어 더 크게 지어놓고 곡식을 높게 쌓아만 두는 자들이 어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구원받은 백성이라 말인가.  땅에서도 제 한 몸 잘 먹고 잘산 자들과 함께 천국에서 사이좋게 살라고 한다면 나는 차라리 그딴 천국을 가출해 버리고 말 것 같다. 혼자 세상의 온갖 부요함을 누리면서 내 돈으로 자유롭게 살면 그만이라는 세상, 우리 시대 예언자는 일용할 배고픔을 위해 기도하라고 외치고 있다. 

정영민 목사 / 예수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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