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밋밋한 설교 회복의 대안일까?
성지순례, 밋밋한 설교 회복의 대안일까?
  • 김동문
  • 승인 2017.01.17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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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하기가 재미있어졌습니다.", "우리 목사님 설교가 변했어요"

이런 고백을 듣는 설교자는 어떤 기분이 들까? 청중들은 어떤 마음일까?

지금 이스라엘은 성지순례 성수기인 듯하다. 예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번 겨울에도 한 해 중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 등 성경의 땅을 찾고 있다.

“성지순례, 은혜로웠습니다.” 이런 고백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성경 속 성경읽기, 성경 밖 성경 느끼기

성경은 성경 밖 ‘그때 그 자리’에서 일어났거나 살았던 이들의 현장이 생생하게 담긴 책이다. 성경을 읽는 다는 것, 성경을 풀이한다는 것은, 바로 성경 책 밖 그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생동감 있게 재연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쉽지만, 우리들은 쓰여진 글자로서의 성경에만 집착할 때가 많다. 이런 타성은 성경 독자로서 넘어서야할 과제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많은 길의 하나가 현장 체험 여행일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정작 성지순례를 다녀온 이들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목사님 설교가 변했어요! 이제는 성경이 느껴져요.”
“설교하기가 재미있어졌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느껴진다는 것이 이상하기만 해요.”

어떤 나이 지긋하신 성경 신학자는 성지순례 가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 “만약 가서 봤는데, 내가 그동안 가르쳐온 성경이 잘못된 것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내게 너무 충격적일 것 같다.”는 일종의 두려움, 망설임 때문이다.

오래전에 이집트를 여행한 한 교회 담임목회자가 주일 설교 시간에 이렇게 고백했다. 이 교회는 주일 예배가 1-4부로 이어지는 작지 않은 교회였다. “성도 여러분, 제가 그동안 거짓말을 많이 했습니다. 성경을 모르고 성경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모처럼의 여행이, 성경의 무대로 떠나는 발걸음이 온 감각을 통해 성경을 읽게 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혜가 가득해지는 시간이면 좋겠다. 그저 땅만 밟고 오는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경 체험 학습’ 여행을 위한 몇 가지 제안

성지순례는 성경의 땅에서 성경을 느끼고 성경에 새롭게 눈 뜨는 체험 학습 여행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을 나누고 싶다.

첫째, 성경은 입체적으로 읽어야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은 지면을 많이 차지하면 중요하고 짧게 언급되면 덜 중요한 걸까? 어떤 면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너무 잘 알려진 것일 경우가 있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 시대 사람들에게 공공연했던 그것이 우리에게는 감추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거기가 거기였어요. 나는 거기가 거기인줄 알았지 뭐예요.” “아니에요. 거기는 거기가 아니에요. 거기는 거기에요.” 이 대화에서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도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곤 한다. 장소 이름도 시간도 나오지만 어디이고 언제인지 모를 경우가 많다. 평면으로 성경을 읽었기 때문이다.

둘째, 현지 음식과 지역 특산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지에서 먹을 수 있는 토속 음식들은 성경 시대 사람들도 즐기던 것들이다. 그 음식에 얽힌 사연이나 맛을 즐기고 확인해보기 바란다. 이를 위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지역 특산물의 목록을 지역별로 작성해보고, 방문 지역에서 확인해보자. 예를 들어 ‘헤브론 포도’ 맛은 정말 좋은지, ‘레바논의 백향목’은 어떤 면에서 최고의 나무인지, ‘싯딤 나무’는 언약궤를 만들 만한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여리고 종려나무’ 열매는 다른 지역 종려나무 열매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밀 전병’과 ‘보리떡’은 어떻게 다른지, ‘말린 무화과 뭉치’는 얼마나 무겁고 영양가가 충분했는지, ‘쥐엄 열매’는 정말 맛도 영양가도 없는지 등 방문하고 싶은 특정 장소 말고도 우리가 직접 맛봐야 할 것들이 의외로 많다.

셋째, 정보의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직간접적으로 성지순례자들을 보면서 드는 아쉬움이 있었다. ‘성경의 땅’[聖地]을 찾아왔음에도 성경을 느끼지 못하고 성경을 보면서도 성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초신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신앙 연륜이 오랜 이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발견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을 그저 눈으로만 읽어왔을 뿐 시공간 속에서 호흡하지 못한 때문이다. 열심히 졸다가 차가 정지하면 일어나 내려서 사진 찍고, 그리고 또다시 졸거나 자면서 이동하고…. 그러다 어떤 현장에 도착하면 그곳에 있는 건물이나 시설에 관한 정보를 열심히 듣고 메모도 하지만, 정작 연관된 성경 본문은 떠올리지 못한다. 성지 답사는 방문 현장에 온 몸의 감각을 모아서 성경의 사건이나 메시지가 왜 그렇게 선포되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한 장소에서 수천 년 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건축 양식의 어떠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과 연관된 성경의 무대에서는 그 시대의 전후 상황과 형편을 이해하면 되는 일이지, 예수님 승천 이후 수백 년 뒤에 무엇이 생겼고, 무엇이 지어졌는데, 그 건축 양식이 이렇고 저렇다는 식의 ‘정보’들에 너무 몰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넷째, 성경의 땅을 ‘두 눈 뜨고’ 돌아다녀야 한다. 바쁘고 피곤한 일정이기에 성지 순례객들은 다음 방문 장소로 이동하는 차안에서는 깊은 잠에 빠져들곤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일지도 모르겠지만, 눈감고 지나치기에는 성경의 땅에서 눈에 담아두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차창 밖에 펼쳐지는 현장들도 성경의 무대이며 저마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저 듣지만 말고 질문을 던지기 바란다. 현지 안내자에게 귀 기울이되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면서 ‘왜?’ 하고 묻기를 주저하지 말고, “이곳이 바로 그곳입니다”라는 식의 설명을 들었을 때 “왜 그 장소가 이곳이어야 했나?” 하는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다섯째, 현지 ‘지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역시 다르다. 성경 시대 지명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니 대단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의 지명은 이스라엘 독립(1948년) 직후에, 그동안 불리던 기존의 지명을 성경 지명으로 대대적으로 바꾼 결과이다.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고 같은 장소는 아니다. 은평구 신사동(새절)도 있고 강남구 신사동도 있다. 성경의 무대에도 ‘같은 이름의 다른 장소’가 적지 않다. ‘벧세메스’ 같은 경우 고유명사로 일컫기도 했지만, 태양신전이 있는 곳이라는 본래 뜻대로 가나안 땅이든 이집트 땅이든 태양신전이 있던 곳은 다 그렇게 불렀다. 또한 시대에 따라 같은 장소인데도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같은 장소를 놓고도 자국민(본토인)이 부르는 이름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르던 지명이 따로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지명이 뒤엉켜져 성경에 나타난다. 성지순례는 이런 차이들을 구별하는 땅 밟기[踏査]이다.

여섯째, 빠른 답사가 아닌 ‘바른’ 답사를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 성지를 찾은 이들 중에는 ‘이왕 온 김에 이것저것 다 보고 가자’는 바람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모처럼의 기회를 선용하고자 하는 열의를 나무랄 뜻은 없지만 욕심은 욕심이다. 주마간산(走馬看山)도 정도가 있다. 체험이 없는 성지순례는 거품일 뿐이다. 바른 답사를 위해서는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입장 바꿔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짧은 일정 중에 남들 가는 곳 다 가보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꼭 가야 할 곳을 가기 위해 남들 다 가는 곳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남들 가는 곳도 다 가고 꼭 가야 할 곳도 다 간다는 욕심은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목표를 성취하려다가 여러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곱째, 성지의 시공간 속에서 성경을 느끼도록 애써야 한다.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벌어지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입체적으로 읽고 느끼려면 몇 가지 작은 수고가 필요하다. 그 수고 중에는 성경의 계절 이해하기, 성경 속 등장인물의 나이 고려하기, 성경 속 장소의 거리감 이해하기, 이동수단 고려하기 등이 있다. 그때 그 자리에 서서 성경의 배경과 무대를 찾으려면 성경의 특정 본문에 연관된 시대와 사건에 먼저 주목하여야 한다. 직접 관련이 없는 시대나 배경에 얽힌 이야기는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접근하도록 한다. 성지 방문은 성경의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만나는 경험이기에, 그 특정한 사건과 공간에 집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지순례는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특정 인종, 민족, 지역 주민, 종교인에 대해 쌓아온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 갈릴리 그리고 그 너머까지 나아가는 삶이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

여덟째, 현지에서만 할 수 있는 여러 경험에 집중하자. 현재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체험하는 것도 유익하다. 차도 마셔보고, 현지 음식도 현지인들의 일상 속에서 접해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현지의 치안 상황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안전이 확보된 공간에서라도 현지인들과의 만남과 어우러짐은 필요하다. 이슬람 지역에서는 무슬림도 만나고 이슬람 사원도 접하면 좋을 것이다. 유대인 지역에서는 유대인 회당과 유대인의 일상 또는 종교 생활을 접해보는 것도 좋다. 이는 교과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현장 답사 여행의 특권이다.

그래도 큰 기대를 접어야 할지 모른다.

여행 다녀온다고 이런 고백이 보장되는 것 전혀 아니다. 머리로만 성경 읽고 교훈과 교리를 가르치는 설교만 해온 목회자들, 일상을 사는 이들의 가슴앓이를 모르는 이들, 공감 능력이 없는 이들은 성경의 땅 체험여행 효과가 전혀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더 머리만 쓰는 설교자로 굳어질 수도 있다. '성경 읽고 설교하기'에 자신과 참여자의 합리적 의심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마음 씀씀이가 없는 직업 종교인들은 건강한 변화가 '기대난망'일 수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성지순례? 성지답사?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이 여행, 가지 말라고 말려도 갈 것이라면, 가서 조금이라도 좋은 깨달음과 체험을 얻고 오기를 바랄 뿐이다. 가지 않겠다고 버텨도 보내야할 것이라면, 가서 설교학교 여러 번 수강하는 것과는 격이 다른 설교 클리닉을 체험하고 오기를 바랄 뿐이다.

* 이글은, 필자의 다음 두 글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다듬은 것이다. (김동문, 현장에서 다시 성지순례를 생각하다, 복음과 상황, 272호(2013년 7월) [커버스토리 대안성지순례를 고민한다], 김동문, “가고픈 성서의 땅 요르단”[홍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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