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성도를 아시나요?
가나안 성도를 아시나요?
  • 임종석
  • 승인 2017.01.17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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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토에 자갈밭을 일구다니…

내리막은 하향이 아니라 등정의 과정이다

2017년 1월 1일은, 그러니까 금년 새해 첫날은 주일이기도 했다. 해마다 그 첫날이 되면 사람들은 이 한 해가 하는 일도 잘되고 무사했으면 하고 바란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되기를 자기가 믿는 신에게 빌고 무신론자들까지도 하다못해 떠오르는 태양 같은 자연물에 비는 일이 많다.

그런데 그날이 주일과 겹쳤으니 크리스천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한 해를 하나님께서 지켜봐 주시는 가운데 새롭고 산뜻하게 맞고 싶은 생각으로 교회로 행했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마침 출타 중이라서 타지의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 말고는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그게 잘못이었다. 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잘못이 아니라 하필이면 그 교회를 찾은 것이 잘못이었다.

목사가 강대에서 한 말이라는 게 가관도 아니었다. 촛불집회를 가리켜 ‘우르르 몰려가’ 운운하며 폄하하는 것은 양반이고, 데모가 세상을 달라지게 할 수는 없다, 2천년이 되어도 달라지나 봐라, 어쩌고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들은 귀를 씻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필이면 새해의 첫날, 첫 주일에 그 같은 말을 듣다니, 속이 상하고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믿는 사람들이 입에 담기로는 좀 거친 표현이지만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그랬고, 중국이 그랬으며, 최근에도 미얀마가 그랬으니 아니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다른 나라를 말할 것까지도 없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김주열,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 노수석 등의 열사가 흘린 피와, 그와 함께 한 국민들의 투쟁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이만큼이나마 자라게 한 것 아닌가. 얼마 전에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로 고생하다 결국 숨을 거둔 백남기 농민의 죽음도 이 나라의 민주화 진전에 밑거름이 될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데모가 세상을 바꾸게 하는 어떠한 힘도 되지 못한다는 말인가. 데모를 하지 않고도 세상이 민주화되어 자유를 누리며 편하게 살 수가 있다면야 누가 뭐 하러 거리로 뛰쳐나가겠는가. 국가권력에 의해 자유가 억압당하거나, 그것이 남용되어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민생이 곤란해지는 것을 견디다 못해 좀 더 나은 길로 나가려 나선 것이 데모 아닌가.

그런데 촛불집회, 그것은 데모라기보다 멋들어진 문화행사가 되었다. 화염병 대신 든 촛불부터가 그렇다. 버스산성에 자신들이 붙인 스티커를 경찰의 수고를 덜어 주겠다며 떼는가 하면, 추위에 고생한다며 투입된 경찰을 안아주는 시민까지도 있었다. 이 같은 모습을 보고 자라게 하겠다며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도 질서가 흐트러지는 일이 없고, 연행되는 사람도 없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라 한다.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우수성을 가감 없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뭐겠는가.

우리는 1992년에 있었던 미국 LA 폭동을 기억하고 있다. 폭동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다 동원하여 약탈에 열을 올리는 추한 모습을 보였고, 우리 한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그보다 앞에 있었던 1980년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우리는 어땠는가. 그 혼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절도사건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한다. 마음만 먹으면 금은방 같은 보석상을 손쉽게 털 수 있었는데도 누구 한 사람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이처럼 우수한 민족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다. 일제 36년의 영향이 크다. 그들 일제는 ‘센징와 쇼가나이’라 우리 조선인을 능멸했다. ‘센징’은 ‘조선인(쵸센징)’을 얕잡아 약(略)해 한 말로 ‘센징와 쇼가나이’는 ‘조선 놈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의미의 말이다.

그들이 우리의 언어와 성까지도 빼앗아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저희들은 아무리해도 우리말을 잘할 수가 없는데, 우리는 저희 말을 조금만 노력해도 유창하게 할 수 있는 것을 보고 조선인은 식민지 국민으로 살기에 적당한 민족이라며 저희의 열등함을 포장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들의 우리만족말살정책에 쉽게 순응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8.15 해방을 맞고 세월이 많이 흘러서까지 저들이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의 그림자를 우리의 정신체계에서 완전히 지워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까지도 그랬다. 저들의 말을 흉내 내어 ‘엽전은 하는 수 없다’며 자조하는 일이 많았다. 저들의 식민사관과 맥을 같이 한 우리만족말살정책에 의해 습성이 되어 버린 자기비하근성을 지워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다. 지구촌 곳곳을 휩쓸고 있는 한류는 어떻고, 불모지에서 일궈낸 우리 태극낭자들의 골프 행진과 김연아 박태환이 거둔 열매는 또 어떠한가. 경제 또한 6.25의 잿더미 속에서 불과 반백년 여 만에 대국의 반열에 들었다. 모두가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우리는 걱정하지 않는다. 사태를 조속히 해결하여 이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악한 일을 보고 선한 일이었다며, 위기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는 자들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한다.

백만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성미가 급한 이도, 순수치 못한 사람도 낄 수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들의 일탈행동은 시작과 동시에 주위에 의해 저지를 받아 통념상의 ‘집회’ 아닌 아름다운 ‘모임’으로 성숙의 미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항상 그랬듯이 이번의 사태 또한 결코 나라발전의 말목을 잡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높은 산도 오르다 보면 간혹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오르기 위한 과정이지 하향은 아니다. 이번 사태도 그렇다. 우리는 지금 후퇴 아닌 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밖에는 크리스천이 없는가?

그런데 그렇지 못한 데가 한군데 있다. 교회가 그렇다. 교회에서의 ‘세습’이란 말로도 없던 괴물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 탐욕의 극치를 억지스럽게 성경구절까지 들어 가며 합리화하려는 세력도 등장하고 있다. 사기, 횡령, 중상, 모략, 폭력, 성추행 등등 비리와 범죄의 온상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교회와 기독교는 타락하고 말았다.

교회가 지금보다 양적으로 열세였던 옛날에는 그래도 사회의 선도역할을 했다. 목사는 성직자라 하여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도 목사도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필자는 앞에서 새해의 첫날이자 첫 주일의 예배에서 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말을 들었다 했는데, 그 다음 주일, 그러니까 새해의 둘째 주일인 지난 주일에는 본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가나안 성도’가 생긴 게 교회 탓이라는 말을 들었다.

가나안—,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은총이 떠올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땅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땅, 아름답고 광대하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러니 ‘가나안 성도’란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그러나 그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아름다운 건 이름뿐,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들 교회의 부끄러운 민낯까지 엿보여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되는데, 교회에 안 나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가나안 성도’라 한단다.

그런데 그 같은 가나안 성도수가 우리나라에만도 100만을 헤아린단다. 필자도 전부터 교회 출석을 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교회를 나가야만 했던 것일까. 신앙을 포기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그 이유야 많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필자가 소속된 교회의 지난 주 설교도 지적했듯이 교회 탓이라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교인 한 명이라도 더 얻기 위해 전도에 온힘을 기울이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내쫓고 있다는 말이 된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보고 화가 있을 것이라며 “너희는 한 사람의 교인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느니라”(마23:15)라 책망하신 적이 있다. 물론 교회를 나가 밖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지옥 자식이 되는 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교회 안에서 타성에 젖어 신앙의 명맥을 이어 가는 사람들보다, 아니면 신앙 아닌 것을 신앙으로 잘못 알고 그에 열심인 사람들보다 그들이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사실 필자는 이제 더 이상 교회가 아니게 되어 버린 교회를 뒤로 하고 나가 홀로, 아니면 가족끼리 은밀하게 자신의 신앙을 길러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용기를 내심 부러워한 적도 있다. 교회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에게는 그만한 힘도 능력도 없음을 탓만 했지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 같은 용기도, 결단력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야 어쨌든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독자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교인이 떠나야 하는 교회의 현실도, 교회를 떠나는 개인의 현실도 슬픈 일이다.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교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다.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세우신 것이다. 성령께서 각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크리스천이 되게 하시고, 그들을 모아 교회를 이루셨다. 믿지 않는 상태로 교회 안으로 들어와 믿게 된 사례도 있기는 하다.

성도들은 밖에서 받은 상처를 그 같은 교회에서 치유받기도 하고, 상한 마음을 위로 받기도 한다. 소모된 믿음의 체력을 충전(充塡) 받으며 힘을 모아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힘쓰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누가 그들을 아웃사이더가 되게 했는가?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과연 그러한가. 편한 마음으로 가서 상처받고 돌아오기도 하고, 치유 받으려 했던 상처에 소금이 뿌려지기도 한 게 교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의 뜻은 제쳐 두고 몸집 불리기와 건물을 크고 높이 올리기에 여념이 없는 교회, 그게 오늘의 교회가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온갖 비리와 죄악의 온상처럼 인식되어 버린 게 오늘의 교회이다.

오늘의 교회들은 대개가 피라미드 같은 서열구조의 정상에 담임목사가 서서 지휘하고 운영한다. 기업의 구조와 비슷한 면이 있고, 왕조시대의 임금을 연상시키는 면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렇다면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그러니 교회 아닌 교회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며 감싸고도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니 바꾸어야 한다.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목사는 목사대로, 일반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변화를 꾀해야 한다. 자기 자신과 교회 전체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그럼에도 교회들은 자기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한다. 가나안 성도나 교회를 떠나 아예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리된 책임이 당사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개개인의 신앙에 문제가 있거나 사단의 올무에 걸린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더 큰 책임은 교회에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일반 교인들에게보다 목사에게 더 많다.

지금의 교회들을 보라. 한 교회의 신앙은 담임목사의 생각에 따라 일방적으로, 그리고 획일적으로 고착되어 있다. 담임목사의 말은, 특히 선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닌다. 교권주의적 발상에 의한 산물이다.

그러다 보니 일반 교인들은 생각이 있고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다. 신앙과 교회 운영에 관한한 자유롭지가 못하다. 말을 했다가는 교회와 목회자를 찌르는 가시로 취급받게 된다. 목사의 말이 옳으니 그와 다른 말은 다 틀린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 말이 설혹 옳음을 인정받을 수밖에 없을 경우는 현실론을 들고 나와 깔아뭉개기도 한다.

일부 목사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지식의 천박함과 낮은 수준의 신학지식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성경이나 신학에 뛰어난 지식을 가졌다 해서 교권주의가 가져 온 획일성을 벗어버리고 소통의 유연함을 견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성경과 신학에 통달한 사람일수록 그것을 무기로 하여 교인들의 입을 막는 예도 많다.

문제는 얼마나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중심으로 사느냐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얼마나 욕심을 적극적으로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이든 사람과의 관계에서이든 거의 모든 문제는 욕심으로부터 생긴다. 교회 안이나 교회 밖에서 생긴 모든 문제의 대부분도 욕심이 원인이다. 결국 신앙의 성패는 욕심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잃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절처럼 산속이 아니라 세상에 세우지만, 세상과는 구별된 모습이어야 한다. 세상에 매몰되어 세속으로 오염되면 교회는 병을 앓게 되고, 그것이 심해지면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게 된다.

교회를 세속화라는 병으로부터, 그리고 욕심으로부터 지키는 방법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성경운운하면 너무 많이 들어 김이 빠진 느낌도 들지만 사실이 그러니 어쩌겠는가.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인류와 나에게 주시려하신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찾아 실천하겠다는 각오로 성경을 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경은 만인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목사도 사찰집사도 무직분 교인도 다 평등해야 한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고 아니라 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교회는 없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땅에 다 같이 평등한 교회가 하나라도 있을까 싶다.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않으면 죄”(약4:17)가 되는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시류(時流)는 여럿이 어울리기보다 혼자서 무엇인가를 하는 혼밥족, 혼술족, 혼놀족 등을 생산해내고 있다. ‘귀차니스트’라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귀찮다+nist’의 합성어로, 귀찮은 것을 몹시 싫어하며 혼자 있기에 익숙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 더욱 ‘가나안 성도’들의 증가에 힘을 실어 줄 것이다. 교회를 떠날 생각이 다소라도 있다고 하는 사람이 교인의 3분의1이나 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필자는 방법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기독교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정체성을 되찾는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다워지는 길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앞에서 이미 말했다. 교회가 평등해지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 중의 하나라는 것도 말했다.

‘가나안 성도’가 생기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불통이 가장 큰 원인일 수 있다. 사람은 다양한데 획일적인 틀에 갇히고, 진리 아닌 것이 진리도 둔갑하고, 직분이 계급화 되는 일 등이 불통을 가중시켜 교인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목사님들께, 이 하나만 실천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정말로 교인들과 평등해지세요. 목사님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교인을 성경말씀을 들어 반박하지 마세요. 성경을 많이 아니 내가 더 옳다고만 하지 말고 신학공부를 하진 않았지만 교인들의 생각이 더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세요. 이 하나만으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현격히 줄어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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