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성 목사 '영성일기' 톺아보기
유기성 목사 '영성일기' 톺아보기
  • 박총
  • 승인 2017.01.18 09:24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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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형은 마뜩치 않다.

이런 문장을 비교형으로 구사하는 건 옳지도 않지만, 예전의 나처럼 24시간 주님만 바라보려 했던 사람도 드물었으리라.

매순간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거기에 거했던 환희를 어찌 말로 표하랴!

눈치 챈 벗님도 있을 텐데, 이 글은 유기성 목사님의 영성일기를 톺아본다. 흠, 뒷북이다. 심각한 뒷북이다.

하고픈 말이 고였으나 안식월 핑계로 귀차니즘을 정당화했다. 그 사이에 허성식 (Seong S Heo) 교수님이 깊은 통찰을 담은 글을 올려주셔서 이걸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근데 새해를 맞아 유기성 목사님 유의 영성을 복기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한국교회가 제자리걸음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2016년 유기성 목사 영성일기 컨퍼런스(사진:유투브 동영상)

"예수님과 24시간 동행은 불건강"

아이 같은 일념으로 주님만을 바라보려는 유기성 목사님의 뜻은 아름답다. 그런 순수한 열망이 태부족한 현실이라 더 귀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신앙은 역설인데(실제로 대부분의 성서는 모순되는 구절을 찾아 짝지을 수 있다) 그런 신앙의 역설을 헤아림이 부족해 보인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 분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며 친밀히 동행할 수 있습니다.”고 답했다.

예수님과 24시간 동행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이나 우리 인간의 편에서 그분의 임재를 24시간 365일 인식하며 살아가기는 불가능하다.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건강하다.

삶이 치열하지 않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분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한숨을 돌릴 겨를이 있는 분들은 훈련에 따라 점점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 매순간 숨 가쁘게 살아가는 분들은 아침 출근길에 잠시 주님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어서 잠시 하루를 돌아보며 주님께 기도 올리다가 잠들기 일쑤다. 애를 넷이나 키워봐서 잘 아는데 육아에 나가 떨어지는 분들도 그러하다. 아이가 잠이 들면 시체체럼 쓰러지며 “주님 힘들어요. 그냥 잘래요.”하는 것이 전부란 말이다.

앤소니 드 멜로의 책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사람들이 고작 아침저녁에만 기도하고 더는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수행자가 등장한다. 스승은 그에게 우유를 가득 채운 주발을 들게 한 다음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어디를 다녀오라고 한다. 한참 후에 그가 다녀오자 스승은 묻는다.

“그 사이에 주님 생각을 얼마나 했느냐?” 
“온 정신이 우유에 가 있는데 어떻게 주님을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매일 그렇게 산다. 그러면서도 아침과 저녁 두 번이나 주님을 생각하니 얼마나 대단하냐.”

"삶의 횡포에 치인 이들에겐..."

밀레의 ‘만종’이 아름다운 것은 교회 종소리에 손을 모으는 경건한 자태 때문만이 아니라 하루 종일 주님 생각을 못할 정도로 열심히 일한 고된 노동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는 해질녘에 잠시 손을 모으는 것이 전부인 대부분의 생활인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고 있다.

먹고사느라 죽어라 일하는 이들,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들, 그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란 말을 사치스럽게 여기는 이들, ‘아, 나도 이렇게 살긴 싫은데 정말 직업을 바꿔야 하나...’ 하다가도 ‘내가 무슨 수로...’ 하며 출근하는 이들. 그런 식으로 늘 주님을 향한 죄송함을 품게 만들고 다른 성도들에게 비해 열등감을 품게 만드는 것이 옳은가?

마치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교회 봉사와 기도회를 도맡아 하는 이들이 현세의 인정과 천국의 상급을 독점하는 동안 삶의 횡포에 치여 일요일 예배 한 번 참석하는 게 전부인 사람들이 늘 고개를 들지 못하는 맘으로 주님 앞에 나오게 하는 것이 옳으냔 말이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부르주아지에 최적화된 영성이라 한들 과하지 않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 연습’을 통해 삶의 팍팍함과 메마름 속에서도 주님을 관조할 수 있는 내공을 기를 수 있고 또 그리해야 한다. 하지만 그 팍팍함과 메마름을 건조하게 통과하는 그 자체가 이미 주님을 바라보는 것임을 정녕 모르는가? 인생살이가 고달파서 주님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주님을 깊이 경험한 시간이란 말이다.

"신의 부재는 그분의 가장 깊은 임재"

노동과 생계의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여가에도 마찬가지다. 섹스하는 내내 주님을 생각하면 안 된다. 맛나는 식탁 앞에서, 감동 벅찬 영화관에서 주님을 자주 호출하는 건 되레 반칙이다. 주님은 자신이 잊히는 걸 즐거워하신다.

주님은 자신이 2선으로 물러나 배경이 됨을 기뻐하신다.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그분의 성품과도 어울린다. 또 부모는 자식이 놀이나 일, 공부, 연애에 몰두하느라 그 순간에 부모를 잊는 걸 더 흐뭇해한다. 물론 아주 잊으면 섭섭해하겠지만. 그런 어미아비의 심정을 주님도 갖고 계시리라.

여기 중요한 역설이 있다. 순간에 집중하느라 주님을 잊는 것이야말로 실은 주님을 가장 깊이 바라보는 것이다. 순간의 쾌락, 혹은 순간의 고통에 몸을 떠느라 주님을 까맣게 상실하는 그때가 가장 천국에 가까이 가닿아 있는 것이다.

이는 주님 편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도 그분의 반응이 없고, 그 분 자체가 안 계실 때가 늘어날 것이다. 심하면 무신론자처럼 신의 부재에 맞닥트린다.

이를 테면 마더 테레사도 말년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고(이 일로 일부 몰지각한 개신교인들이 “죽어라 봉사만 하면 뭐하나. 가장 중요한 믿음이 없는데. 가톨릭은 행위 구원 때문에 안 된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얕음을 폭로했다. 신의 부재를 맛보지 못한 자에게 화 있을진저), '교회 박사'라 불린 리지외의 테레사는 천국과 영생에 대한 확신 없이 죽었다.

내가 자주 말하지만 이 지점에서 몸으로 새겨야 할 문장이 있다. “ 신의 부재는 그분의 가장 깊은 임재의 표현이다.” 신과 사귐이 깊어지면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유신론적 무신론’이야말로 가장 그윽한 신 체험이다. 본 회퍼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를 말한 것이나 자크 라캉이 "오직 성직자만이 무신론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신론 안에 무신론이 있고 무신론 안에 유신론이 있는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르시시즘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적 열정과 영적 정욕"

역설의 신앙이 결여되다 보니 이 세상을 놓고서도 같은 오류를 저지른다. 유기성 목사님의 글이다.

“부목사님 한 분이 최근 영적인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대통령 탄핵 사태가 일어나면서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인터넷 뉴스를 자주 보게 되었기 때문임을 알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령의 사람을 만나거나 그의 말씀을 듣다가 한 순간에 마음이 뜨거워져 눈물을 쏟기도 하고 마음에 기쁨이 넘치기도 합니다. 설교 전에 잠간 본 뉴스 때문에 영감이 사라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가 충만했다가 말 한마디 들은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뒤집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묵상과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 이제 문제가 명확히 보이는가. 내면의 평화를 흔드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 할 수 있는 한 주님만 바라보자는 것이 대체 건강한 영성일 수 있느냔 말이다.

이런 분들을 두고 14세기의 신비가 루이스브렉의 요한(John of Ruysbroeck)은 자신의 내적 평안과 영적 회복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을 두고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고 믿지만 실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사악하고 해로운 존재들”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이들의 영적인 열정은 ‘영적 정욕’에 불과하다.

자기 삶을 힘겹게 하는 일 없는 무균상태에서야 누가 주님만 보지 못하랴. 치열한 삶 속의 신음 속에서, 세상의 거대한 불의 앞의 분노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쳐야 하지 않나. 아니, 먹고사느라 괴로워하고 나라 돌아가는 꼴에 분통을 터뜨리는 것 자체가 이미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아픔과 분노 속에 충만히 임재하신다. 그렇다. 분노는 우리 시대에 남은 마지막 성소다.

노파심에 밝혀두자면 이 글을 영성 수련에 힘쓰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지 않길 바란다.

이제, 글을 맺을 시간이다.

아쉽게도 유기성 목사님 유의 영성일기는 전제가 그릇된 것으로 보인다. 영성은 마치 우리 일상과 현실 속에서 그 분이 안 계신 것처럼 가정한 다음, 그 분을 바라보고 그 분의 임재를 삶으로 모셔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만물 속에, 일상의 대소사에 '벅차게' 현존한다. 주님만 바라보자는 신앙은 주님과 만물, 주님과 일상을 구분한다. 이런 신앙은 필연적으로 이원론의 저주에 빠진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거룩한 것이요, 그밖의 일은 속되거나 적어도 덜 거룩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면서 주님을 바라봄으로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보여준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주님에게만 시선을 고정하는 그 거룩한 일이 일상영성의 배반이 된다.

다시 말한다.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참된 영성은(영성은 이미 참되므로 동어반복이다) 그분이 일상의 아픔과 기쁨, 현실에 대한 분노와 희망 속에 이미 와 계심을 알고 그 안팎에서 그것을 통해 주님을 뵙고 듣고 맡고 만지고 맛보는 것이다.

24시간 365일 주님을 바라보려 함은 참으로 귀하지만 주님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흙처럼 노동하고, 꽃처럼 쾌락하고, 불처럼 분노하고 참여하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지성소에 들어가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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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일 2017-01-28 03:08:56
"주님만 바라보자는 신앙은 주님과 만물, 주님과 일상을 구분한다. 이런 신앙은 필연적으로 이원론의 저주에 빠진다."
격하게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배반'을 경험해 보지 못했거나 경험하고도 그것을 자신의 죄때문이라고 '인도'당하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하나님(과 자신)을 속이며 살다보니, 세상 끝에서라도 불러 구원하실거라는 말을 믿기에는 '종교심'이 허락하지 않는거죠...

... 2017-01-25 16:24:33
이 글은 본인이 비판하고 있는 유기성 목사님의 영성일기보다 더 까일게 많은 것 같네요.

... 2017-01-24 02:29:50
"아쉽게도 유기성 목사님 유의 영성일기는 전제가 그릇된 것으로 보인다. 영성은 마치 우리 일상과 현실 속에서 그 분이 안 계신 것처럼 가정한 다음, 그 분을 바라보고 그 분의 임재를 삶으로 모셔오는 것이 아니다." ... 글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