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현실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 나라
비참한 현실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 나라
  • 최태선
  • 승인 2017.01.24 01: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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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는 북미 사회 복음의 가장 선도적인 신학적 주창자였습니다. 그는 이 세기적인 운동으로 사회정의의 문제와 개인 신앙의 내용을 서로 관련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회복음은 구원의 오래된 메시지이지만, 널리 알려지거나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개인주의적 복음은 우리에게 죄로 가득 찬 인간의 마음을 깨닫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넘쳐나는 사회구조의 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1861년, 뉴욕주 로체스터의 독실한 독일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라우센부쉬는 성직자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야망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1886년에 그는 첫 번째 담당교구를 배정받아 뉴욕시티의 헬스키친지역에 있는 제2독일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는데, 그곳은 비좁고 비참한 주변 환경으로 악명이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그가 직면한 가난과 질병 그리고 절망스런 광경과 냄새는 그의 마음에 전형적인 기독교 경건주의 메시지에 대한 불만을 남겼습니다.

왈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

이런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개인의 구원, 개종 또는 예수님 안에서의 단순한 믿음 등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는 점점 자신의 목회활동을,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고 세상에 대하여 교회가 가져야 할 책임의식을 일깨우는 것으로 확장해갔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라우센부쉬는 전통적인 형태의 자선조직보다 더 나은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오늘날 복음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만연한 가난과 불의를 책임지는 사회적 시스템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여전히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91년 그는 돌연 신학적 돌파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핵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의 상징적 의미를 재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개인의 신앙과 사회적 변혁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주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통해 교회와 세상을 결부시키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곳으로 변화시키려는 도전에 관한 진실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자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그는 믿게 되었고 그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모든 것의 요지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이것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는 이것을 위해 죽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누구든 복음을 통하여 한번 이것을 알게 되면 다시는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의 신앙의 삶 역시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 역사 속의 모든 진지한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하게 되는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발견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복음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치열한 현재적 삶을 살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급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도화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몰락

그런데도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 역사에서 잊히고 가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천국, 개인의 구원 혹은 교회와 동일시되어왔습니다. 급진적이며 혁명적인 복음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왜곡하는 전형적인 우회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광대하고, 더 미래적이며 동시에 급진적인 궁극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왜곡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세상과 하나님이 계획한 세상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우센부쉬는 이처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진짜 메시지를 알아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몰락은 예수님의 몰락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몰락이 곧 예수님의 몰락이라는 그의 주장은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된 사람의 당연한 주장입니다. 성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십 일 동안 전하신 것도 하나님 나라이고, 사도 바울이 마지막까지 전한 것도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라우센부쉬는 우리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왔지만 바로 그 예수님의 목소리에는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생각은 그가 쓴 몇 권의 책에 담겨 한동안 깊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의식의 변화와 진보적 조직들을 위한 지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가혹한 시련이 되었습니다. 군국주의적 애국심이 복음을 압도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와중에 증오는 기승을 부리는 분위기 자체였고 그가 주장하던 하나님 나라는 현실의 필요라는 요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전쟁의 증오라는 분위기 속에서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가능한 하나님 나라

하지만 그는 자신이 추구하던 하나님 나라가 사실은 불가능성에의 도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규모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 목표의 본질에 대해서 아주 사실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이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완전한 삶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 아무리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그것은 늘 완전한 사회질서로의 접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을 향한 모든 접근은 가치가 있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은 이해가 매우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삶은 단 한 조각도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가오고 있는 미래형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 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은 가장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만시지탄의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책 제목에도 등장하고, 설교에도 등장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알짬인 하나님 나라는 그처럼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합류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강령은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이 의와 선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의와 선은 어떤 도덕이나 신학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역사 이래 사람들이 말하거나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다릅니다. 이 새로운 의는 하나님의 활동이며, 성령의 도우심이며, 다가오는 빛의 핵심이며, 소금의 짠 맛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실체이며 능력이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생명이며 변화와 자유 그 자체입니다.

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의를 발견하려면 먼저 가난해져야 합니다. 심지어 목숨조차 버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정의와 그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고난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라야 하나님 나라를 아는 지식이 시작되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비로소 살 수 있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마지막 남은 것까지 아낌없이 내어주며,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게 됩니다. 그 나라의 모든 동기는 사랑이며 그 사랑에는 순결함과 성실함이 기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의는 더 이상 나을 수 없는 완전한 의이며 완전한 사랑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선배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남은 자들의 역사라는 것을 라우센부쉬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의 말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로 다가가기를 원하면서 그가 드렸던 기도를 따라 해봅니다.

오 하나님,
사업에 골몰하여 근심에 짓눌리고
유혹에 이끌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업 세계는 비정함과 속임수로 가득해져
모두를 유혹에 빠지게 하고 의롭게 살려는 사람까지도
미끄러지고 넘어지게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저희 모두의 잘못입니다.

부를 위해 사람과 사람이 맞서 경쟁할 때
그것이 탁월함을 위한 경쟁이 되게 하시어
패배한 사람조차도 자극받음으로
더 나은 일로 나아가게 하소서.
공정함과 정직성을 망각한 사람과 거래할 때
진실함과 의로운 태도가 더 이롭다는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필요하다면 어그러진 길을 택하기 보다는
손실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오 하나님, 저희 안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성령으로 하여금
저희 삶을 평정하게 하시어 사업 현장이 그리스도의 섬김의 법칙에 의해
다스려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공장과 사업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게 하소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이 되게 하시어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생을 헌신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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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2017-03-21 03:54:19
아멘, 아멘! 평소에 생각해 오던 것을 훌흉한 기독교 인물을 통해 잘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