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가난의 복을 자자손손 받으시길...(?)
평생 가난의 복을 자자손손 받으시길...(?)
  • 최태선
  • 승인 2017.02.04 06:01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가 쓴 다른 글에는 여간해서는 댓글이 달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쓴 글에 가난이 언급되면 늘 어디선가 반대의 댓글을 다는 분이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더 도발적인 댓글이 달렸습니다. 

평생 가난의 복을 자자손손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댓글 단 이의 빈정거림이 거슬렸지만 숙고해볼만한 여지가 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을 예찬하는 나는 과연 내 자식이 가난하기를 원하는가, 이 댓글과 같이 정말 자자손손 가난의 복을 받기를 원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저는 저희 후손들이 자자손손 가난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당연히 이유 없이 저의 후손들이 가난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과 관련하여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대답입니다. 저는 제 자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참된 예수의 제자, 진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소금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며 소금을 얻거나  생산할 수 없는 지역이 많았기 때문에 소금은 언제나 귀한 것으로 인류에게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소금이 고혈압과 같은 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소금은 기피대상 1호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소금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완전히 무시되거나 망각되고 있다는 생각 듭니다.

소금의 핵심은 그 맛에 있습니다. 소금은 그 맛이 짜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짠맛은 다른 것들과 달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소금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소금은 오직 다른 것을 위해 필요합니다. 음식의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은 모두 다른 것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소금은 다른 것의 가치를 높이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의 가치를 높이는데 공헌합니다. 소금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것들 나아가 전체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소금이라는 의미는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함으로써 다른 사람은 물론 그들이 속한 사회 전체를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며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결정적인 수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망각하거나 알지 못한 채 오직 자신을 위해 존재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을 자랑하고 업적을 내세우며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으스대지만 그것은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금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 맛이 아무리 짜진들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세상을 끈적끈적하게 만들어 오염시키고, 건강치 못하게 만들 뿐입니다. 물론 그 맛을 잃으면 존재 자체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오늘날 그런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소금이고 다른 사람과 세상 전체를 위해 필요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시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너무도 기본적인 내용이지만 실상은 전혀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타락한 교회의 왜곡된 역사는 반복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많음에도 우리 사회는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해 무감각하고 냉랭한 것입니다.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따라 소금의 특성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부패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죽음과 생명이 없는 무기력하고 약한 모든 것에 저항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하나님 나라의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상의 불의는 그 자체로서 죄임과 동사에 죽음으로 이끄는 병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그래서 세상의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의에 저항하고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세상의 죽음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지니고 있는 한 악의 활동을 억제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소금의 맛을 잃거나 다른 이들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교회는 죽게 될 것이며 세상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죽게 될 것이며 그런 교회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건강함을 따지고 싶어 하지만 소금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더 이상 성서가 말하는 교회일 수가 없으며 그런 교회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성서의 말씀대로 내버려질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곳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소금으로서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가난은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현저한 특징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소금의 특성상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놓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 그리고 자신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관문은 가난입니다. 하나님 나라 문 앞에서 기꺼이 가난해지기로 결단하지 않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와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가난해지기로 결심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모든 풍성함을 받아 누리며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누룩처럼 부풀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축복의 역설

따라서 저는 제 후손들이 가난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제 자손들이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부패에 물들지 않는 담대하고 소박한 용기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단순하고 간결한 말과 꾸밈없는 정직함으로 이 세상을 이기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은 죽일지라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사랑에 이끌리는 사람으로 평화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주님에 대한 결코 변하지 않는 충성과 성실함으로 일상이 예배가 되는 치열한 현재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외면적이고 비본질적인 모든 것에서 자유한 사람으로 모든 소유와 시간을 기꺼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의 삶이며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소금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가난의 복을 받고, 자자손손 그 복을 이어가기를 바란다는 댓글을 단 사람은 빈정거리는 태도와 저주의 마음으로 그런 기원을 했지만 가난의 복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해야할 복이며, 세상적인 보물에 욕심내지 않는 자유이며, 염려에서 벗어난 자유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참된 행복입니다.

평생 가난의 복을 자자손손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생각해보니 축복의 역설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atom 2017-02-07 06:57:13
역시 조금 두렵지만 아멘 아멘입니다.

마라나타 2017-02-06 14:37:27
목사님의 글에 찬성합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의 삶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이 주인이 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빛과소금으로
간결하고 단순하고 청렴하게 사는 것이 진짜 복이지요.
목사님의 가정과 후손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귀하게 쓰시는
참된 백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정민영 2017-02-04 12:27:04
동의합니다. 복음적 가치관이 심각히 굴절된, 중세 암흑기를 방불케하는 현대교회가 쉽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십자가 역설을 담대하게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터나 깡뱅의 개혁운동을 가능케 했던, 그들보다 수백년 앞서 유럽 전역에 지속적으로 개혁의 불씨를 확산한 페트루스 왈도와 추종자들(왈도파)이 붙들었던 세 가지 원리(만인제사장직, 자발적 빈곤을 통한 나눔, 하나님 말씀의 중심성)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 개혁운동은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개신교회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 주제에 대해 다 다루긴 어렵고, 이 글과 직결된 주제(자발적 빈곤을 통한 나눔)를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왈도와 추종자들은, 자발적 빈곤을 통한 나눔의 실천이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당연히 구현해야 할 삶의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왈도는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며 비지니스로 축적한 거대한 부(그는 원래 남 프랑스 리용의 성공적 상인이었습니다)를 가난한 자들에게 흩어 나눴고, 배금주의로 사치의 극을 달리던 당시 로마교황청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음녀라며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예수 믿어 팔자 고치고 대박 터지는 맘몬의 종교로 전락한 현대교회는 당시 자신들을 '리용의 가난한 자들'로 칭하며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던 왈도파의 실천적 개혁으로부터 한 수 배워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