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신자가 보수 신자에게
보수 신자가 보수 신자에게
  • 박총
  • 승인 2017.02.07 0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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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반대하는 이들을 위해서 살 때 - 1

나는 보수 신앙에서 자랐고 평생을 그 안과 언저리에서 살았다. 복음주의 교회는 내게 고향 교회요 어머니 교회와 같다. 전도사 노릇도 일요일 아침 꽃밭에 물을 줘도 되냐고 묻고 동성애를 강하게 정죄하는 지독히 보수적인 교회에서 해왔다. 물론 ‘동성애’란 말만 나와도 눈알에 지옥불이 타오르는 사람들과는 분명 선을 긋고 있지만 나도 그들 중 하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아마 이 책에 원고로 목소리를 보탠 분들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일 거다. 교회와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성적소수자이듯 이 책에서는 내가 소수자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보수 교단에서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땅에서 동성애자들이 겪는 아픔과 어찌 감히 비교할 수 있겠냐마는 나 같은 부류도 ‘소속되지 못함’(unbelongingness)의 경험을 당한다. 보수 교단에서는 졸고 『욕쟁이 예수』가 동성애자들의 하나님 체험이 진실하다고 했다는 이유로 배척을 받고, 이곳 캐나다 시절 퀴어 신학 수업 시간에선 “Accepting but not welcoming," 즉 동성애적 현실을 이해하고 수용하지만 권장하지 않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왕따를 당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주변인(the marginalized)으로서의 처지가 동성애에 대한 내 위치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  

이 글은 나와 같은 보수 신앙을 가진 이들을 향한 ‘말 걸기’이다. 이 글은 동성애에 대한 그들의 뿌리 깊은 반대를 바꾸려 드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시절 로마황제 경배를 거부하다 사자밥이 되는 것보다 더 결연한 각오로 동성애를 거부하는―그런 마음으로 신사참배, 군부독재, 물신숭배를 거부하지 그랬어요―그들에게 동성애를 패배시키려는 대신 동성애자의 패배가 자신들의 패배가 되고 동성애자의 승리가 자신들의 승리가 되게 하라고 설득한다. 또한 호모포비아(homophobia)를 ‘성경적’이라고 철떡 같이 믿는 그들에게 동성애보다 수백 배 더 강조되는 가난과 정의는 나 몰라라 하면서 유독 동성애에만 지옥행 티켓을 발행하는 태도가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밝힌다. 더불어 동성애에 대한 재빠른 정죄가 사회관계에 대한 즉각적 지식(immediate knowledge)을 얻으려는 폭력적인 욕망에 기초했음을 살펴보면서,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야말로 가장 성경적이고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임을 말한다.

폴 니터(Paul Knitter)는 모든 신학은 전기에 뿌리를 둔다고 했다. 나는 모든 신학은 자서전적(all theologies are autobiographical)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 글은 나의 경험담에서 시작한다.  

 

동성애와의 해후

말로만 듣던 동성애자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건 90년대 초반이던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집에서 누나랑 대판 싸우고 홧김에 집을 나와 버린 나는 살갑게 대하던 같은 학과 후배의 얼굴을 떠올렸다. 학교 후문 쪽에서 자취를 하는 후배는 흔쾌히 나를 묵게 해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얘기꽃이 시들어가자 나는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내가 이미 깊은 잠에 든 줄로 안 후배는 같은 과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괜찮았지! 걔네 부모님이 다 여행가셨잖아. 그래서 남자애들 셋이랑 여자애들 셋이랑 모여서 놀았지. 나는 그 계집애랑 잤는데 처음엔 흥분이 안 되는 거야. 근데 걔가 빨아줘서 겨우 세웠지. 난 여자애들하고 하는 것보다 남자애들이 더 나아.” 

만으로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녀석들이, 그것도 매일 학교에서 부딪히는 후배 녀석들이, 게다가 그중엔 교회를 다니는 애도 있는데 그렇게 성적으로 추접하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말로만 듣던 동성애자가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놀란 가슴을 수습하며 밤새 그 후배를 위해 기도하던 나는, 다음날 아침에 기회를 보다가 어렵게 용기를 내었다. 내가 부러 엿들으려 한 것이 아니라 겉잠이 든 상태에서 어젯밤 통화내용을 듣게 되었다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나는 보수 교단에 속한 후배가 당연히 동성애를 죄로 알 거라고 믿었지만 정작 후배는 동성애가 왜 죄냐고 반문했고 성경에서 동성애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선천적 동성애자의 경우 함부로 정죄하기 어렵지만 몇몇 성경구절이 보여주듯 동성애는 분명한 죄라고 강변했다. 선천적 동성애자라는 출구를 발견한 후배는, 자신은 어릴 적부터 도무지 이성에 대해 관심을 느끼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내가 보기엔 새로운 성적 자극과 모험을 찾아 남녀 가리지 않고 상대하는 쾌락적 양성애자(bisexual)로만 보였다.   

다음날 나는 복음주의권에서 동성애를 가장 애정 어리게 다룬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의 『돈, 섹스, 권력』과 존 스토트(John Stott)의 『현대 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을 건네주었다. 복음에 대한 열정만 후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박하던, 그래서 동성연애에 대해 ‘묻지 마 정죄’를 고수하던 시절이었다면 나는 아마도 후배 보기를 바리새인이 죄인 보기와 같이 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성서 본문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충실하면서도 동성애자들에 대한 깊은 공감을 보여준 포스터와 스토트 덕분에 호모포비아(homophobia)에 담근 발을 상당 부분 뺄 수 있었다. 물론 동성애가 죄라는 점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기에 후배를 향한 안타까움을 담아 조심스럽게 죄에서 벗어나라고 권했다. 그 뒤로 후배를 위해 계속 기도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서로에게 어색해져버린 뒤라 여의치가 않았다. 후배는 나를 피하는 눈치였고 나도 동성애 얘기를 다시 꺼낼 용기가 없었다.

 

5년 후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한 여름날이었다. 대학원에 다니다가 건강이 나빠져서 집에서 요양을 하며 군 입대를 기다리던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지금의 안해(집‘안’의 ‘해’란 뜻을 가진 ‘아내’의 옛말)를 만나 밤늦도록 도란도란 정엣말을 나누다보니 집 앞 버스정류장에 닿은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나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짐을 부리던 한 남자를 발견하곤 그의 집까지 옮기는 것을 거들어주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가 너무 고마워서 그러니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한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손사래를 치다가 하도 간청을 하기에 잠시 앉았다가 가기로 했다. 

그가 차를 내오고 대화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 많던 그는 한 교회의 지휘자이기도 했다.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무척이나 동안(童顔)인 나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그는 “선생님이 참 좋은 분인 것 같아 제 고민을 하나 털어놓으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하더니 대뜸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그리고는 같은 교회 제자이자 성가대원인 예쁘장한 청년과 정기적으로 성관계를 갖고 있다며 자신이 얼마나 오럴 섹스를 잘 해주는지, 그 젊은 애인이 얼마나 황홀해하는지, 한 번은 한 시간을 넘게 계속 빨아준 적도 있다는 둥 나로선 당황을 금치 못할 이야기를 묻지도 않았는데 자랑스럽게 꺼내놓았다. 5년 전 후배의 통화 내용에 경악했던 그 기분이 쭈뼛 일어서서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섹스 실력을 뽐내던 그는, 근데 동성애가 죄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며칠 후 그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그때에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도 높아졌고, 게이지식인 서동진의 글을 비롯해 계간지 『리뷰』나 현실문화연구에서 나온 단행본을 통해 다양한 동성애 담론을 접하면서 주님께서 내 포용력의 울타리를 넓혀준 까닭에선지 5년 전에 비해서는 동성애를 품는 여유가 조금은 더 생겼고, 그래서 집으로 불러 교제를 나눌 생각까지 했던 것 같다. 게다가 동성애라면 질겁하고 남을 순복음교회 신자인 우리 어머니에게 그 사람에 대한 여하한 정황과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을 소상히 설명한 결과 정죄 대신 이해를 얻어내었고, 그 결과 어머니도 그를 초대하도록 허락했으니 말이다.

다과를 나누며 복음주의권의 이른바 ‘공감적 비판’ 입장에 대해 소개한 다음, 5년 전 그 후배에게 주고 나서 재구입한 그 책들을 그에게도 건네주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경청하기는 했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할 수 있다면 그와 계속 만나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군대를 가면서 그와의 만남은 더 이상 이어지질 못했다. 결혼 후에는 부모님 아파트를 찾아뵐 때마다 건너편 동에 사는 그를 찾아가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감히 실행에 옮기진 못하고 그 집 창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와 그의 가정과 교회를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다시 5년 후

희한하게도 다시 5년이 지나서 토론토에 공부하러 온 첫 해에, 나는 다시 동성애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학교 친구 엠마와 나르샤가 바로 그들이었다. 친절하고 상냥했던 엠마는 오리엔테이션 첫날부터 나랑 얘기가 통하더니 이후로 우리 식구들과 내가 토론토 생활과 학교 공부에 연착륙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우리 집에 제일 먼저 초대해서 저녁을 먹었던 것도 엠마와 나르샤였다. 두 사람 역시 자기들 아파트에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그러나 난 그 때까지 두 사람이 동성애자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엠마의 생일이던 초겨울 어느 날, 두 사람이 연인사이이고 동거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두 사람이 학부 시절 미국 미시간 칼빈대학교에서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던 친구 사이라 여기에서도 룸메이트로 지내는 줄로 알았다. 근데 나르샤랑 결혼할 거라는 엠마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밝혀두지만 나는 좀체 감정을 얼굴 뒤로 빼내지 못한다. 엠마는 나의 당황하고 놀란 표정에서 상처를 받았는지, 아니면 그것은 옳지 않다는 내 말에서 아픔을 느꼈는지, 내가 나르샤랑 얘기하는 사이 밖에서 울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왈칵 들어 엠마를 안아주며 눈물을 닦아줬다. 그리곤 여전히 너희를 사랑한다고, 생일날을 망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그날 저녁, 내가 자전거를 도둑맞은 것을 알게 된 밥(Bob) 교수님이 자기 집에 들러 안 쓰는 자전거를 가져가라고 해서 서쪽 멀리 있는 교수님 댁을 찾아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한 시간이 넘게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페달을 밟았다. 집에 오는 내내 마음은 죽을 듯이 아팠고 머리는 미칠 듯이 혼돈스러웠다. 왜 하필 내가 가장 아끼는 두 친구가 동성애자란 말인가! 이 세상에 동성애란 걸 허락하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이후 두 친구와는 얼마간 어색한 시간을 통과했지만 두 사람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립 서비스가 아니었고 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두 사람을 참으로 사랑한다. 그것은 자연스레 이뤄졌다기보다는 성적지향성과 상관없이 친구를 사랑하려는 의지의 열매였다. 두 사람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우리 사이는 각별했다. 엠마는 안해가 유산했을 때 나의 멘토인 실비아 교수님께 알려서 날 도우려고 했고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엠마를 위해 영어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주는 등 서로를 챙겨주었다. 엠마가 학교를 마치고 만남이 뜸해진 이후론 나르샤와 전에 없는 우정을 나누었다. 특히 내가 취업비자를 얻고 우리 식구가 의료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준 고마움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내가 첫 책 『밀월일기』를 내면서 ‘고마움의 글’에 외국사람 중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단연 엠마와 나르샤였다. 그렇게 나는 동성애자와의 세 번째 만남에서야 그들을 벗으로 삼게 되었다. 

예전과 비교해 볼 때 나는 동성애에 대해 한결 열린 입장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죄로 보는 입장을 조심스럽게 고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처음 엠마와 나르샤를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동성애에 대한 내 입장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향한 내 사랑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서로 다르지만 그 다름을 넉넉히 받아주는 친구, 그것도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 2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박총(朴寵) / 도심 속 수도원 신비와저항 원장 수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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