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양성 평등주의자인가?
바울은 양성 평등주의자인가?
  • 최재석
  • 승인 2017.02.09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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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주변에는 여인들이 많았지만, 바울의 주변에는 여인들이 별로 없었다. 예수님이 여인들을 인정하시고 가까이 하셨기 때문에, 어떤 여인은 값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많은 여인이 그 현장까지 따라갔다. 그리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은 모두 여인들이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 주변에 있던 여인들의 활동을 상세하게 기록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 주변의 여인들을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과 달리, 당시의 사회적 관례에 따라서 여성을 차별해서 멀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울 서신에는 남녀를 차별하는 언급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구절도 나온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여성을 홀대하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바울을 남녀 차별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남녀평등에 관한 바울의 언급에 주목해서 바울은 양성 평등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울은 왜 그렇게 상반되는 말을 했을까?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한 바울이 양성 평등주의자일 수 있는가?

남녀 차별적 발언

고린도전서 11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여성들이 머리를 가려야 할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여자가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3절에서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7절에서 9절까지에서 남자의 우월함을 언급한다. 특히 9절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한다.

이 발언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돕는 배필 하와를 지었다는 창세기 2장의 기록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바울이 남성위주에 관한 자신의 말의 권위를 창세기의 전통에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들의 머리에 두건을 쓰는 문제가 기록된 고린도전서 11장 서두에서 바울은 “전통”을 지키는 고린도교인들을 칭찬한다.

그리고 머리에 관한 말을 마치는 16절에서는 머리를 가리지 않으려는 여자들에게 “관례”를 강조하는 그의 어조가 단호하다.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 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요약하면, 남자를 위해서 지음을 받은 여자는 전통과 관례에 따라서 머리를 가려야 한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34-35) 이 언급은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전형적인 여성 차별적인 발언이다.

이 말을 하기 직전에 33절 말미에서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라는 단서를 붙여놓았다.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는 말이다. 그리고 40절에서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관례에 따르는 것이 품위를 지키는 일이며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이기 때문이다. 이 품위와 질서는 33절에 언급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와 통한다. 관례를 따라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전통이나 관례에 호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서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강조한 것은 고린도교회에 분쟁이 심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로 나뉘어서 다투고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서두에서 이 교회의 분쟁을 언급하면서 하나가 되라고 권면했다. 그런데 이러한 파당 간의 분쟁 외에도 목소리 큰 여자들로 인해서 교회가 시끄러웠던 것 같다.

바울은 교회의 품위, 질서, 그리고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성 중심의 전통과 관례,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까지 내세워서 여자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교회를 위해서 여자들이 나서는 것을 금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외에 디모데전서 2장 11-2절, 에베소서 5장 22-23절에도 남녀 차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성경학자들은 디모데전서나 에베소서를 후기 바울서신으로 분류하면서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바울의 후배들이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후기 바울 서신에는 보수적인 전통이 많이 가미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기 바울서신에 언급된 남녀관계는 고린도전서의 전통적인 남녀 관계에 대한 언급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바울은 정말 남녀는 차별해야 한다고 믿었는가?


양성 평등주의적 발언

바울은 고린도전서 11:11-12에서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고 남녀가 모두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그가 여기서 남녀가 동등하다고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살펴야 한다.

11절을 시작하면서 “그러나”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11절에서 말하려는 내용이 그 앞에서 언급된 여성 차별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나” 바로 다음에 “주 안에서”라고 단서를 붙임으로써 앞에서 언급한 교회에서의 상황과 달리 “주 안에서”는 남녀가 모두 귀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교회의 상황과 주 안에서의 상황을 구별해서 남녀의 문제를 달리 말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기록했다. 바울은 여기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주 안에서는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두 가지 상황을 구별했다는 점이다.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위해서는 관례에 따라서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주 안에서의 영적 세계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두 가지 다른 상황에서 엇갈리는 말을 한 것은 그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지식, 권리, 확신까지도 내려놓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도로서 사례비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고전 9:12) 하려고 천막을 만드는 고된 일을 했다. 그는 제사음식을 먹는 것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서 그런 음식을 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도 그것을 먹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산 사람, 복음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각을 접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바울이 자신의 지식이나 신념을 접고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행동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가 남녀 문제에 있어서도 남녀가 평등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위해서 여자들이 나서면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 3-4절은 그가  양성 평등주의자라는 데에 힘을 실어준다. 바울은 “남편은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 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니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3절에 앞서서 2절에서 바울은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하라는 언급은 부부의 성관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5절에서는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렇게 문맥을 살펴보면 2절과 5절 사이에 끼어 있는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부부관계에서 남자가 여자를 성적 도구로 삼지 말고 서로를 배려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부부의 성관계는 교회의 질서나 “주 안에서”와 관계없는 사적인 일이다. 이런 사적인 영역에서 남녀평등을 언급한 것을 보면,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말한 남녀평등은 “주 안에서”라는 신앙적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그의 평소 소신으로 보인다. 여자를 사람 수에 넣지 않았던 가부장적인 시대에 이렇게 신앙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성관계에서도 남녀가 동등하다고 말한 바울은 당시의 사회적 고정관념을 뛰어 넘는 선각자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마치면서

바울이 지금 살아 있다면 양성 평등주의자인 그가 교회를 위해서 여성을 차별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울의 시대와 달리 지금은 누구나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21세기의 바울은 전통이나 관례를 언급하면서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위해서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바울이 지금 한국 교회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남녀는 평등하니 교회에서 여자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복음이 인간의 언어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성경에는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인간관계의 표현은, 지금과는 아주 다른,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삶의 정황을 따르고 있다. 바울이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여성을 차별하는 말을 한 것은 사회적  관례를 따른 것이어서 그 당시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관례가 지금 남녀평등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여성 차별을 지금의 교회에는 적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성경을 읽는 우리는 현대인의 남녀에 관한 의식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스 큉의 말대로, 신학이란 성경의 메시지를 과거의 경험세계로부터 현대의 경험세계로 옮겨놓는 일이다.

지금 일부 교단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한 바울 서신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성안수를 거부하는 것은 그렇게 말한 바울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성 평등주의자 바울이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여성 차별을 내세웠다는 사실과 현대인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바울 시대의 것과 달라졌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 해석자는 기록될 당시 성서가 무엇을 말했으며 오늘날 그 성서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해석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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