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폭탄을 던지고 싶으면 던져라"
"우리에게 폭탄을 던지고 싶으면 던져라"
  • 박총
  • 승인 2017.02.11 01:4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수 신자가 보수 신자에게'-2
본 글은 도심속 수도원 '신비와 저항' 박총 원장이 성소수자에 대한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한  '보수 신자가 보수 신자에게'라는 제목의 글을 이은 것이다. 

내가 반대하는 이들을 위해 살 때

내 경험담을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은 나와 같은 보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동성애자와 벗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뜻에서이다. 나는 이 글에서 보수기독인들에게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강변할 의도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가 동성애가 죄가 아님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고 해도 수천 년간 이어진 동성애에 대한 그들의 정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 보수 신자들이 동성애를 죄로 보는 것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동성애가 죄라면 죄인을 사랑하고 그들의 친구가 된 예수님은 어디에 있는가? 게이-레즈비언들이 그들의 인권 옹호를 외치며 행진할 때에 보수기독교인들이 뿜어낸 섬뜩한 증오심과 “Go right into hell"과 같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과연 한국 보수 복음주의 교회는 동성애가 죄라고 단언할 때 바울이 그랬듯 죄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빌 1:8)으로 그 말을 하고 있는가? 

나의 이런 입장에 대해 어떤 이들은 ‘성향은 인정하되 성향에 따른 행동은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가 언뜻 사려 깊어 보이지만 달라질 건 없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정죄하면서 칼로 찌르는 것보다 이해하면서 찌르는 것이 더 아프다고 한다.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현재 보수 신자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카드는 ‘사랑 안에서의 반대’이고 이는 실제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그 많은 사례 중에서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서 한 대목을 골라 본다.  

놀랍게도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에드워드 돕슨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밥 존스 대학교 출신으로 한때 제리 폴웰의 심복이었고 『근본주의자 저널』창간자이다.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에서 목회를 시작한 돕슨은 그 도시의 에이즈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도시 내 게이 인사들을 찾아가 만난 뒤 자기 교회 성도들이 봉사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성애가 잘못된 것이라는 믿음은 확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돕슨은 게이 집단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베풀어야 할 부담을 느꼈다. 게이 운동가들은 (좋게 말해서)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로서 돕슨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다른 게이들이 그런 것처럼 그들에게 ‘근본주의자’란 내가 워싱턴 시에서 봤던 데모단 같은 이들(동성애자를 향해 저주를 퍼부은 이들 - 필자 주)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었다. 결국 돕슨은 게이 집단의 신뢰를 얻었다. 그는 교인들을 독려해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돌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이들에게 다른 실제적 도움의 방편을 제공하게 했다. 아직까지 동성애자라고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성도들도 많았다. 동참을 거부한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러나 양측은 서서히 상대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어느 게이는 돕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목사님 입장을 압니다. 목사님이 저희에게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여전히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셔서 거기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혹시나 내가 동성애자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동성애에 대한 내 입장이 정통 보수 신앙과 궤를 같이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돕슨을 보라. 돕슨은 나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이고, 반기독교 정서를 가진 이들에게 ‘꼴통’ 내지 ‘개독’으로 불리는 부류에 속한다. 그는 내가 지독히 혐오하는 근본주의자이지만 동성애자에게 예수의 사랑을 보여준 점에선 나보다 더 나았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성애와 함께 가정을 파괴하는 가장 큰 죄로 여겨지는 이혼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내게는 깊은 영성과 사랑을 가진 한 여자 선배가 있다. 평소 교회 권사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그녀는 당사자가 아니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런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마감한 후 싸늘하게 돌변한 그들의 시선에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났다. 하나님의 정죄는 사람을 돌이키고 살리는 것이지만 그들의 정죄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이혼 소속을 밟고 있는 친구의 결정에 반대하면서도 언제까지나 조건 없이 그를 사랑할 친구로 남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행동 노선에 찬성할 수 없다. 그에게 이것을 숨기려면 내 믿음을 저버려야 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진심으로 찾을 마음만 있다면 결혼 생활의 갈등에는 언제나 이혼보다 나은 해법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이 불순종이 내가 매일 짓고 사는 교만의 몸짓, 험담, 거짓말 등의 죄보다 더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삶의 상황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심령의 본질은 같다. 내가 그 입장에 있다면 과연 그와 다르게 행동할까? 알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은, 내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조건 없이 사랑해 줄 친구, 나를 판단하지 않고 믿어 줄 친구가 필요하리라는 것이다. 만일 그가 이혼한다면 분명 현재보다 더 어려운 일들이 많이 닥칠 것이다. 내 사랑을 더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에게 주어야 할 확신이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와 이혼녀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어떤 목사들은 동성애자가 시민으로서 자기와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이 가당치 않다고 말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기가 찬다. 동성애자들도 세금을 내고 시민의 모든 의무를 다하는데 지금이 교회의 가르침을 거스르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중세시대인가? 연쇄살인범이나 아동강간범에게도 인권을 말하는데 대체 동성애자들이 누구를 해치기나 했나? 자신들의 성적 지향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그들이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 홀로코스트에 동참할 잠재적 지지자들이다.  

여기, 동성애를 반대하면서도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 보수 그리스도인이 있다. 과거 미국 공중 위생국 장관이었던 에버렛 쿠프(C. Everett Koop)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전형적인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보수 종교 단체를 돌며 연설을 할 때 성욕의 절제와 일부일처제 결혼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청중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나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젊은이와 노인, 도덕적인 쪽과 부도덕한 쪽, 모두의 공중 위생국 장관입니다.”라고 강조했고 또 그 말대로 행동했다. 한 번은 쿠프 박사가 보스턴에서 12,000명의 게이들 앞에서 연설했을 때 청중이 “쿠프! 쿠프! 쿠프!”하고 외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 스스로도 감격하여 “자기들의 행동에 대한 내 반대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전국민의 공중 위생국 장관으로서 국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한 말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매번 동성애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남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보수 기독인으로서 동성애자들에게 그처럼 열렬한 환영을 받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단언하건대 동성애에 대한 모든 반대가 교리 수호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두 동성애자들을 위한 것―비록 그들은 억압이라고 생각할지라도―이어야 하고, 따라서 동성애 반대 교리가 동성애자들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비치치 않도록 해야 한다. 예전에 한기총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동성애자들이 “아, 저 사람들이 우리를 반대하지만 속내는 우리를 위해서 그러는구나.”라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면 한 동성애 그리스도인이 한기총을 원망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동성애에 자살까지 했으니 지옥행은 따논 당상이란 말을 하는 작자들에게는 싸다구를 한 대씩 올려붙이고 싶다). 

문제는 항상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잊을 때 발생하는 법이다. 켄 가이어(Ken Gier)는 『영혼의 창』에서 이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을 보였다.

준비하는 식사가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보다 더 중요해질 때, 나는 바퀴가 떨어져 나가려 한다는 것을 안다. 내 일이 그 일의 수혜자인 가족들보다 더 중요해질 때. 내가 주장하는 말이 그 말을 듣는 사람보다 더 중요해질 때. 이런 것들이 내가 고정 축을 잃었다는 증거가 된다.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할 때. 다른 사람, 특히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내 가족의 성스러움을 느끼지 못할 때.

 

제로섬 게임에서 윈-윈 게임으로

나는 보수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따습게 보듬기보다 경계심을 뿜어내게 된 정황을 십분 이해한다. AIDS란 말이 한국에 첨으로 회자되던 80년대만 해도 “동성연애가 뭐지?” 하며 낯설어 했는데 이제는 호모필리아(homophilia)가 쿨하게 보이고 호모포비아가 구닥다리로 취급받는 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동성애뿐이던가. 많은 나라에서 낙태가 여성의 권리로 보장되고, 포르노와 마약이 허용되고, 고등학교에서조차 성관계 경험이 없으면 인기와 매력이 없는 애로 취급된다. 이처럼 교회에 대한 세상의 위협이 급격히 커가면서 교회 역시 세상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지나 호전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위협을 느낄 때에 공격적이 되는 것이야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대감이 자신을 갖고 놀지 않게 해야 한다. 교회가 두려움에 덜미를 잡히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는 권면과는 달리 극도로 편협하고 악에 받힌 모습으로 바뀐다. 교회가 동성애를 두려워하면 게이 퍼레이드를 향해 “지옥에나 떨어져라!”고 외치게 되고, 교회가 세상 문화를 두려워하면 『사탄은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라는 책에서처럼 대중문화는 모조리 마귀의 유혹이 되고, 교회가 노동운동을 두려워하면 노조는 ‘하나님의 기업’을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활동이 되고, 교회가 공산주의를 두려워하면 소련은 사탄의 정치적 현현(epiphany)이요 북한은 적그리스도가 되고 만다.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적실하게 지적했듯이 옹졸한 신앙은 유난히 경직된 정통설을 앞세우는 교회가 두려움 속에 머물 때에 자라나는 법이다. 그러한 공포를 이기는 첫 번째 길은 증오심을 불태우는 것이었고(증오는 두려움의 대상을 작게 보이게 하는 착시 현상을 일으키지 않던가!), 둘째는 미친 듯이 자신의 몸을 불려 적에게 맞서는 것이었다. 공히 공산주의에 대한 미움을 먹고 자란 독재정부와 보수교회의 경제성장과 교세확장이 저 암울한 7, 80년대에 동시에 이뤄진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고 한다면 참람한 해석일까?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쫒나니”(요일 4.18)라고 말한다. 하지만 교회는 항상 대결 구도를 고집하는 습관이 있기에 두려움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칼빈주의자인 월터스토프(Nicholas Walterstorff)가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까지』에서 뼈아프게 고백한 대로 한국교회의 주된 신학 전통 중 하나인 칼빈주의는 ‘승리주의’(triumphalism)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입만 열면 사랑을 말하면서도 정작 ‘나의 승리는 너의 패배’라는 대결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는 동성애자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패배시켜야 한다는 발상 대신 그들의 패배가 우리의 패배가 되고 우리의 승리가 곧 그들의 승리―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제로섬 게임에서 윈-윈 게임으로 ‘게임의 법칙’이 바뀌어야 한다. 보수 그리스도인들이 승리를 독점하려 드는 대신 함께 이기는 길로 나갈 때 이 땅에 놀랄만한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마틴루터 킹 가족(사진: 내셔널지오그래픽 키즈)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는 이미 오래 전에 그러한 윈-윈 게임을 온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킹의 위대함은 상대에게 패배를 가함으로 승리를 쟁취하려는 대신 나의 승리가 곧 적의 승리도 된다는 점을 상대에게 확신시켰다는 데에 있다. 킹의 사상과 실천의 고갱이인 비폭력저항도 윈-윈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연설 중 한 부분을 옮겨본다.  

우리들의 집에 폭탄을 던지고 싶으면 던져라. 우리들의 어린 아기들을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우리들은 그대들을 계속하여 사랑할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우리의 사랑의 투쟁은 반드시 이기고 말리라는 것을 확신해 달라. 어느 날엔가 우리는 자유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의 자유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날, 그것은 곧 당신들의 승리가 되는 이중의 승리가 될 것이다(필자 강조). 그 날까지 우리는 계속하여 당신들의 양심에 호소할 뿐이다. 

킹에게 백인은 단순한 타파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흑인을 억압하는 백인 역시 인종차별이란 죄악의 희생자였다. 흑인에게도 해방이 필요했지만 백인에게도 해방이 필요했고, 흑인에게도 승리가 필요했지만 백인에게도 승리가 필요했음을 그는 간파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윈-윈 게임의 정수를 보여준다. 원수 된 우리들을 억지로 무릎 꿇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스스로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 그 분을 내 삶의 승자로 인정하게 하신 것이다. 내남이 다 알다시피 이것은 수치스런 패배가 아닌 영광스러운 승리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는 예수의 선포는 일개 사단(師團)의 천사를 소집하여 자신을 못 박으려는 자들을 응징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붙여주신 그 사랑으로 이뤄진 것이다. 예수는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세상을 사랑으로 무릎 꿇렸다. 

통일에 있어서도 윈-윈 전략은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어야 한다. 공산당의 처형을 피해 월남한 교인들의 상처와 증오심을 왜 모르겠냐마는 어떻게든 북한을 무릎 꿇려서 앙갚음을 하겠다는 마음씀씀이가 문제다. 남쪽의 승리가 북쪽의 승리가 되고, 북쪽의 패배가 곧 남쪽의 패배가 되는 윈-윈 전략으로의 발상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 통일은 지난한 과제일뿐더러 통일이 되더라도 그 후유증으로 인해 안함만 못하다는 말이 두고두고 나올 것이다(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북한으로부터 가장 큰 신뢰를 얻은 집단은 ‘남북나눔운동’을 통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꾸준히 북한을 섬긴 복음주의권 교회들이다. 이는 우리가 반대하는 이들을 위해 살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만큼 윈-윈 게임으로의 전환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곳은 없다. 아무리 땅이 엉겅퀴와 가시를 내어 인간에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하더라도 서구인들처럼 자연을 이기고야 말겠다는 태도, 자연을 이용해먹고 버릴 수 있는 재화로 보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작금의 생태적 위기는 해결될 수 없다. 산업혁명 이후의 모든 환경파괴로부터 오늘날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공사’에 이르기까지 피조물은 탄식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롬 8:19-22). 만약 우리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창 1:28)는 문화명령을 동료 피조물과 벗하는 것이요, 우리의 섬김으로 그들을 가멸게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자연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가 됨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것이다.  

문화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대중문화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일반은총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이뤄질 때 문화도 살고 교회도 사는 윈-윈 게임이 가능하다. 남아공의 프란시스 나이젤 리(Francis Nigel Lee)나 화란의 한스 로크마커(Hans Rookmaaker) 같은 보수적인 개혁주의 학자들조차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의 예술적·문화적 소산을 불로 소멸하는 대신 죄악의 찌꺼기를 태워 정결케 한 다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져가신다고 할 정도로 문화를 긍정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문화사역은 미국 남부 근본주의자들의 적대적 문화관을 가슴에 품고, 악하고 더러운 대중문화를 박살내는 주의 군사가 되는 것과 동일시된다. 물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친구, 제자, 종, 양, 동역자 등이 됨을 의미하고 거기엔 그분의 군사가 되는 것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주의 군사가 되는 것이 홍위병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문화사역이 문화혁명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보수 교단의 이러한 공격적인 태도는 사회 변혁을 투쟁으로만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니 변혁의 대상으로 ‘찍힘’을 당한 이들은 죽고살기로 교회에 덤벼들고 사탄의 반격을 받았다고 믿는 교회는 훨씬 더 호전적인 통성기도를 부르짖게 된다. 이런 악순환을 거치며 교회는 해방자가 아닌 억압자의 얼굴로 굳어진다. 동성애자와 공산주의자와 생태운동가와 대중문화가 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날로 드러내는 것은 괜한 것이 아니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St. Aquinas)가 공포에 거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격정에만 몰두되어 있어서 다른 이들의 고통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보수 기독교가 공산주의, 노동운동, 동성애를 두려워하며 이에 대한 결연한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비전향장기수, 노동자, 동성애자의 낮은 신음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보수 교단은 만화, 드라마, 영화에서 동성애자들을 우호적으로 다룬다며 당장 세상이 끝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여전히 동성애자들은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죽어버리든지 집을 떠나든지 옷장에 숨어서 살라고 내몰리고 있다. 근본주의 '나와바리'인 미국 남부에서는 지금도 동성애자들이 혐오범죄로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으며 보수 가톨릭이 강세인 브라질에서는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동성애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등 호모포비아 제단의 불꽃은 더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5분의 1의 게이 남성이, 3분의 1이 넘는 백인 레즈비언이, 2분의 1이 넘는 흑인 레즈비언이 이성애적 성향을 시험하고 동성애적 성향을 죽이기 위해 결혼한다. 그리고 이 결혼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그들은 보수 교단에서 강력히 정죄하는 또 다른 죄인 이혼 내지 다른 동성애자와의 간음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도 교회는 동성애 혐오에 세례를 주고 있으니 대체 누가 죄를 짓게 하고 있는가? 이러니 신앙을 가진 동성애자들조차 “게이로서는 교회에 가서 따뜻한 대접을 받기보다는 길거리에서 섹스 파트너 찾기가 더 쉽다는 걸 알았습니다.”고 울먹일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보수 교회의 동성애 반대가 정말 동성애자들을 위하는 것임을 보이려면 동성애자란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을 받고 사회에서 짐승 취급을 받는 이 처참한 현실에 맞서 싸워야 하고 이를 위해 동성애자들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 견해를 말할 권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한 볼테르(Voltaire)처럼 교회가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때에 가장 잘 주님을 드러낼 수 있다. 

내 말은 시민으로서의 합당한 대우를 받기 위한 권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면서도 동성애자들이 동성애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 죄 지을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란 말인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할 것을 아시면서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버리고 죄를 선택할 자유를 주신 것을 생각해보라. 진정한 사랑은 사랑을 배신할 자유를 주기 위한 아픔을 감수하고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닐까? 

한편 동성애자와 그 지지자들은 보수 그리스도인들의 동성애 반대 그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문제를 악화시킬 따름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옳지도 않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견해를 가질 수 있고 보수 신자들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에 충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동성애 찬성은 믿음을 저버리거나 세상의 시류에 타협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스스로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그들의 입장 표명을 저지할 수 없다. 바로 앞에서 인용한 볼테르를 기억한다면 동성애자들도 보수 교회가 동성애 반대의 목소리를 외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물론 동성애에 대한 반대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 및 인격적 폭력과 엄히 구별되어야 한다.  

- 3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박총(朴寵) / 도심 속 수도원 신비와저항 원장 수사(목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정말로 2017-02-13 09:53:40
우연히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꼭 한마디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성애반대와 지지를 교묘히 넘나들며 양비론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럼 동성애자가 교회에서 공직을 맡고, 동성애법이 합법화되어 누구나 동성이 부부가 되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잘 아시겠으나 남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이며 천륜과 인륜을 어긴 것이지요 물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인간으로 대하며 거짓말하는 죄인과 똑 같이 여기는 것은 당연 합니다. 그 죄에서 돌이키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지요 제발 동성애자들은 은근히 지지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