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비성경적인가?
누가 비성경적인가?
  • 박총
  • 승인 2017.02.15 04: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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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신자가 보수 신자에게'-3
본 글은 도심속 수도원 '신비와 저항' 박총 원장이 성소수자에 대한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한  '보수 신자가 보수 신자에게'라는 제목의 글 중 세번째 파트이다. 

다 같은, 어쩌면 더 큰 죄인이면서

누차 밝히거니와 나는 동성애를 죄로 보는 보수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동성애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며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처럼 간주하는 점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서 동성애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없는 죄로 분류한 음란, 우상숭배, 간음, 색탐, 도둑질, 탐욕, 술 취함, 비방, 약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마음으로 간음했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에 찔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라이프액션』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남성 70% 이상이 성적불순 이슈에 관련되어 있고 그중 유혹에 말려 실제로 혼외정사에 연루된 남성이 90%나 된다고 하는데 미국인 대다수가 간음으로 천국에 못 간다고 외치지 않는가. 심지어『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따르면 미국 목회자 중 절반 이상이 인터넷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어서 목회자 역시 목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개탄이 나오는 실정인데 왜 목사들 자신에게는 지옥행이라는 냉혹한 판결을 내리지 않고 있는가. 인터넷이 훨씬 더 발달해 있고 목회자 자신의 고민과 치부를 상담할 여건이 훨씬 더 열악한 한국의 실제 상황은 이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공과 돈에 대한 집착, 쇼핑과 명품에 대한 중독, 외모에 대한 탐닉은 분명한 우리시대의 우상인데 이에 빠진 대부분의 교인들은 과연 천국행을 장담할 수 있는가. 미국은 힘없는 나라를 착취한 대가로 터무니없이 부유한 생활을 지속해가고 있는 반면, 미국의 텃밭인 페루에서는 태어난 어린이의 반이 5살이 되기 전에 죽고 있다. 동성애자에게 지옥행 티켓을 발부하기 전에 자신들이 그 어린 것들의 피값을 치를 수 있겠는지 따져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나는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의도하든 않든 국내외의 값싼 농산물과 공산품을 구입할 때마다 우리는 힘없는 형제자매를 착취하고 억압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이는 누구에게나 하늘나라 영주권 발급이 거부되기는 마찬가지인데도 동성애자들만 용서받을 수 없는 죄(unforgivable sin)를 지었다고 단정 짓는 무지와 오만은 언제나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사람을 위한 영성>(로드니 클랩/IVP)

메노나이트 출신의 복음주의자 로드니 클랩(Rodney Clapp)이 『사람을 위한 영성』에서 바로 짚었던 것처럼 성적 지향은 중요한 사안이지만 신조에 포함되는 항목은 아니다. 명토 박아 말하건대 동성애가 신실한 자와 배교한 자를 가르는 기준은 아니며,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보다 성경과 전통을 덜 존중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내가 게이 공동체에 하나님이 임하시고 역사하신다고 말하면 누구는 펄쩍 뛴다. 하나님은 이성애자들이 똑같은 죄를 징그럽게 반복해도 단 한 번의 싫증냄도 없이 사랑으로 품어주시는데 동성애가 죄라고 한들 그들을 품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동성애자들이 눈물 흘리며 찬양하는 것은 다 쇼라고 보지 말라. 그들의 하나님 체험도 이성애자 못지않게 진실하다. 그들이 겪는 아픔으로 인해 여느 신자들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간절하게 하나님을 바란다. 통계를 보면 동성애자 중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친구들이 많다. 보수 교회가 맹목적인 동성애 혐오에서 벗어난다면 누구보다도 동성애자들과 신앙적으로 잘 통할 수 있다.

누가 비성경적인가 

대체 성경에서 동성애를 얼마나 많이 다루면 유독 동성애만 갖고 이 난리들일까? 보수 기독인들의 동성애 혐오는 성경의 언급 횟수와 정도를 감안할 때 성난 복어처럼 지나치게 부풀어 올랐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창 19:1-13), 레위기의 금지 본문(18:22, 20:13), 로마서 1장(18-32),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의 목록(고전6:9-10, 딤전1:8-11)이 전부라는 걸 알게 되면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온다(더구나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보수신학에 충실할 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 풍요롭고 태평한 삶을 누리면서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않은 죄악 때문임을 에스겔 16:49는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유황비를 맞을 운명에 처한 것은 동성애자가 아닌 물신주의와 소비문화에 빠져 있는 자들이리라). 

성경 전체에서 고작 대여섯 번 언급된 사안에 대해 이처럼 쌍심지를 켠다면 2천 번 이상 언급된 가난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생각하면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한다. 토니 캄폴로(Tony Campolo)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누구나 우리가 믿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 또는 우리가 틀렸다고 확신하는 것을 비난하기 위해서 너무나 쉽게 성서를 부정확하게 사용한다. 동성애 행위는 그리스도인이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흥미로운 것은 신약성서는 다른 죄들-가령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부족 같은 것들-만큼 그것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짐 월리스(Jim Wallis)

소저너스(Sojourners)의 대표인 짐 월리스(Jim Wallis)가 『하나님의 정치』에 소개한 일화는 우리가 얼마나 입맛에 맞는 말씀만 편식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번에는 한 가지 아주 유명해진 실험을 하기로 했다. 우리 모임의 한 학생이 낡은 성경책과 가위 하나를 들고서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성경 말씀을 모조리 오려 내는 대장정에 돌입했다. 선지서들은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레위기부터 시작해 히브리의 희년 전통을 언급한 모든 구절도 날아갔다. 신약에 이르러서도 가위질할 구절이 꽤 많았다. 낡은 성경책은 들기도 힘들 만큼 너덜너덜해졌다. 그야말로 걸레나 다름없었다. 나는 말씀을 전하는 곳마다 이 상처투성이 성경책을 높이 쳐들고 미국의 청중에게 말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구멍이 가득한 이 책이 우리 미국인의 성경입니다.” 

성경 말씀은 토씨 하나도 허투루 여기면 안 된다며 축자적 영감설에 집착하는 이들이 이러면서도 꼬박꼬박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성경적’이란 말을 입에 발린 듯 구사하는가? 해방신학과 퀴어신학(queer theology)을 두고 성경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읽기이자 동성애적 왜곡이라며 비판하지만 이들은 최소한 하나님의 말씀을 뭉텅이로 잘라내진 않는다. 보수 신자라도 마음을 열고 이들 신학을 대하면 기존의 성서읽기가 얼마나 자본주의와 이성애주의에 젖어 있는지 깨닫게 된다. 내가 볼 땐 제 입맛에 안 맞는 말씀을 모조리 ‘씹는’ 이들이야말로 텍스트 학대(textual harassment)의 죄를 짓는 자들이다. 대체 누가 편향적이고 누가 이데올로기적인가? 말씀에서 하나라도 빼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거라는 준엄한 선포(계 22:19)를 당신들에게 돌려주는 바이다. 

 

불확실성의 고통을 끌어안기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동성애가 죄라는 전제 하에 나누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하필 지금까지 잘 따라온 보수 신자들이 등을 돌리게 할 만한 말을 하려고 한다. 나는 동성애를 죄라고 보는 것은 맞지만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커밍아웃(coming out)이라는 주제로 성경을 다시 읽고(rereading) 이성애적 굴레로부터 성경을 아우팅(outing)하려고 드는 퀴어 신학에는 다른 보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불편함을 갖고 있지만, 성경에서 정죄하는 것으로 보이는 동성애와 오늘날의 동성애가 다른 것이란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성경을 호모포비아의 족쇄에서 건져내려는 베일리(Bailey), 마이클 베이시(Michael Basey) 등의 성서해석은 오랜 세월 성서학 분야에 축적된 견해를 완전히 뒤집기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으며 이후에라도 성경해석에 따라 동성애를 죄가 아닌 것으로 이해할 소지도 남아 있다고 본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보수 신자들이 경계하는 자유주의에 물들거나 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실한 삶의 자세이지만 언제라도 우리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아는 것은 지극히 적은 부분이고 그나마 아는 것조차도 거울을 보듯 희미하게 알고 있을 따름임(고전 13:9, 12)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바리새인이 되고 교권주의가 되고 만다. 당장 보수 신자들로부터 그건 타협이고 변절이라는 아우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하지만 언제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 심지어 하나님을 알고 경험했던 것조차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태도이다.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날마다 개혁되어야 하는 것은 비단 개혁주의의 모토를 지나 개신교 전체의 기본 강령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의 교리 중 하나인 ‘교황의 무오류성’(infallibility)보다 더 심한 ‘자신의 무오류성’을 고수하고 있다(여기에 가톨릭 자매형제들을 폄하하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혀둔다).

욥기에 나오는 엘리후는 자신의 하나님 체험과 신앙이 그릇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전형이다. 욥이 영문 모를 고난을 당하고 친구들조차 인과응보 운운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의롭고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말하자 이에 분개한 엘리후는,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행한 대로 갚으시고 살아온 대로 대하신다”(34:11)는 자신의 ‘교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욥을 “악인과 불의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을 비방하고 다닌다”(34:8-9)며 낙인 찍어버린다. 엘리후는 욥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며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까지 독한 시련을 받아야 한다는 저주성 발언을 한다: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34:36). 욥보다 더 불행해지기도 어려울 텐데 사람이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다. 나는 엘리후에게서 후대의 모든 근본주의자의 원형(prototype of fundamentalist)을 발견한다. 근본주의자들은 평소에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기성 교회에서 요구하는 점잖음의 외피를 벗고 ‘신 앞에 솔직히’ 서려고 하는 이들, 기존 교리에 대해 불편한 의문을 제기하고 관습에 대해 곤란한 지적을 하는 이들이 나타나면 긍휼과 관용 한 점 없는 그들의 실체를 드러낸다.

확신과 평안을 강조하는 보수 기독인은 어떤 상황, 어떤 사안에서든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답을 원한다. 뭐가 죄이고 뭐가 악인지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명확히 해놓지 않는 걸 견딜 수 없어 한다. 하지만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기독교 신앙은 확신과 평안의 원리 이전에 의문과 갈등의 원리”임을 천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본성이 그런 긴장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긴장은 우리를 불확실성으로 몰아넣고 그 안에서 늘 구도하는 자세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발리바르(Etienne Balibar)는 사회관계에 대한 ‘즉각적인 지식’을 폭력적인 욕망으로 보았다. 발리바르를 인용할 것도 없이 우리는 경험을 통해 사람에 대한, 사회 이슈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즉각적인 지식과 단정적인 발언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죄성이 그 폭력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거치적거리는 놈들을 싹쓸이할 때 통쾌함을 느끼듯이 단순명료한 답변이 복잡다단한 고려요소를 날려버릴 때 우리는 희열과 함께 ‘아멘’을 외친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화의 폭력에 기대는 것은 ‘불확실성의 고통’(the pain of uncertainty)―개혁주의 미학의 거봉 캘빈 시어벨트(Calvin Seerveld)의 책에서 언급된―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복잡한 세상에서 신경 쓸 것도 많은데 불확실성이란 놈은 우리의 평안을 갉아먹는다. 그런 와중에 목회자가 성경을 탁 펴서 ‘하나님의 뜻’이라며 어떤 주저함도 없이 속 시원한 결론을 내려주면 성도들은 은혜를 받고 교회는 성장하기 마련이다. 확신과 체험의 욕구가 유독 강한 한국 교회가 이런 욕구를 내려놓아야 하는 관상기도를 어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교회가 영성의 두 가지 길 중에 ‘긍정의 길’(via positiva)에만 익숙하고 ‘부정의 길’(via negativa)에 서툰 것 역시 불확실성과 더불어 사는 어려움을 더해주었다.  

매번 확신 속에만 머무르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심리적 안정감을 더 의뢰하는 일종의 우상숭배다.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 뭔가 기댈만한 것을 구하는 것도 똑같은 정신병리학적 현상이다. 분명히 밝혀두거니와 신앙은 불확실성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작업은 딸기향 해열제로 해결될 간단한 것이 아니다(너무나 쉽게 “그 사람의 문제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 “촛불 시열 언제 마귀의 역사다.” “그 나라는 우상을 섬겨서 쓰나미가 덮친 거다.”라고 단정 짓는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 왜 사랑하는 이를 갑작스런 사고로 데려가셨는지, 왜 지독한 외로움과 실패 속에 나를 두시는지, 왜 세상의 힘없는 자들이 짓밟혀도 가만히 계시는지, 왜 이성애와 동성애자를 동시에 허락하셨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헤아리게 되지만, 어떤 문제에 관한 한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런 가운데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이고, 내가 반대하는 이들에게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이다. 

로드니 클랩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동성애를 둘러싸고 서로 싸우고 논쟁하는 교회가 그것을 지켜보는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증거는 바로 인내가 아닐까 생각된다. 과거 기독교 전통을 보면, 중요한 논쟁점이 수십 년 내에 해결된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 기독교 사상의 알짬 중의 알짬인 삼위일체 교리는 수백 년을 흐르며 정립되었다. 사도들조차 삼위일체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갖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삼위일체설이 공인을 받았다고 알려진 니케아 공의회(325년)의 교회 지도자들조차 아타나시우스가 발표한 신조에 불만을 표했다. 그러다가 이후 계속되어진 공의회와 발표된 신조가 축적되면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교회 전체의 공감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나는 실재하지도 않는 삼위일체를 인간들이 세월의 흐름을 따라 구성해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진리를 오랜 시간을 걸려서, 때론 논쟁과 때론 이단과의 싸움을 통해서 더 깊이 발견할 수 있었단 말을 하고픈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정죄에 빠르며 얼마나 심판에 열심인가! 

 

코다: 반대와 사랑이 입 맞출 때까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든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동성애자를 이 세상에 두신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아무도 백인으로 태어날지 유색인으로 태어날지, 남자가 될지 여자가 될지, 오른손잡이가 될지 왼손잡이가 될지, 이성애자가 될지 동성애자가 될지 선택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냥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성경이 호모포비아를 가르친다고 말하는 이들은 또한 성경이 노예제 찬성(pro-slavery) 쪽이고 반여성적(anti-women)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흥미롭게도 동성애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들은 2세기 전이었다면 노예제 지지자였을 정도로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고 1세기 전이었다면 여성에게 참정권과 교육권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지독한 가부장제 옹호론자들이다. 이러한 점은 보수 교단의 동성애 반대에 대해 회의를 품는 이들을 늘리고 있다. 

물론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혐오는 21세기에도 여전하다. 오래 전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은 “모든 동성애자는 다 거세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가 거센 비난을 받은 것은 그 시대의 한계를 반영한 것이라 치자(그는 뒤에 이 말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근본주의자인 제리 팔웰(Jerry Falwell)이 악에 받친 냥 “동성애자들은 금수와 같다. 그들은 철저히 멸절되어야 할 악마적 시스템의 일부이며 그렇게 될 때 천국에서 축하연이 열릴 것이다.”고까지 말하는 걸 보면 그저 참담한 심정이다.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이런 호전적인 접근 방식은 이제 막대한 도전을 받고 있으며 보수 복음주의권 안에서도 점점 많은 이탈자를 유발해내고 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동성애를 죄로 보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동성애자와 흉허물 없는 친구가 되는 보수 신자, 동성애를 반대하면서도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함께 싸우는 복음주의자, 동성애를 비롯한 뜨거운 감자에 대한 즉각적인 지식의 폭력을 저지르는 대신 불확실성의 고통을 껴안고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이 땅 곳곳에 번성할 때에 우리는 서로를 반대하면서도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참된 인간의 시대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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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 2017-02-17 19:07:46
성경에 의존해서 남을 정죄하고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분들의 의도를 의심해 왔습니다. 이 또한 나를 정당화 하기 위한 방법으로 옳지 못한 자세인 것을 최근에 깨우쳤습니다. 나에게 거부감을 주는 행위나 사람들을 성경에 의존해서 거부하기 보다, 그들을 사랑하게 바뀌는 나 자신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보나 하는 질문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변화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변화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가 요점입니다. 성경을 나자신을 검토하는 거울로 보는것이 우선 이기에, 남을 재는 저울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검토하는 거울의 성서를 추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