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땅은 지금도 확보해야 하는가?
가나안 땅은 지금도 확보해야 하는가?
  • 이중수
  • 승인 2017.02.21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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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여호수아 1:2, 11
아래는 지난 2월 5일 플로리다 올랜도새길교회 주일예배에서 이중수 목사가 행한 설교의 요약본입니다. 

미디어에서 중동 뉴스는 항상 나옵니다. 중동의 산유국들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 문제로 중동의 정치적 안정이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 분쟁과 관련된 정치적 이슈들이 아니고 구약에서 약속된 가나안 땅이 지금도 유효하냐는 것입니다.

일부 기독교 보수 단체나 신자 중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차지했던 팔레스타인 땅을 모두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보다 먼저 가나안에 정착한 원주민이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당연히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스라엘 측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땅을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자기들의 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주셨던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지리적이고 영토적으로 적용해야 할까요?

예루사렘 전경

그럼 성경이 말하는 가나안 땅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약속의 성취와 적용의 측면입니다.

첫째,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침공이 마음대로 타국의 땅을 강탈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가나안 침공은 하나님의 공의를  집행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창 15:16).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총칭입니다. 그들은 극도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백 년 동안 그들의 죄악을 참으셨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가나안 족속에게 공의를 집행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막대기가 되게 하셨습니다(신 7:16; 9:4-5).

둘째, 가나안 정복은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자기 백성에게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안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 33:14; 신 12:10). 그래서 가나안 땅의 공격은 가나안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맞물린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가나안 땅은 다른 여러 가지 실제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우선 이스라엘은 국가로서 정착하기 위해서 영토가 필요하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신정국가로서 열국에 축복의 통로가 되는 여호와 종교의 이상을 실현할 땅을 소유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에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성전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취되도록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가나안 땅에서 태어나도록 작정하셨습니다(마 1:1; 2:1).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가나안 복지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낙원의 회복을 암시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타락한 인류는 이제 가나안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사 의식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장소는 필수적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성전 제도는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상징이었고 구원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사 2:2-3; 11:9)할 메시아 시대는 예수님이 가나안 땅에 오심으로 출범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신 것은 국가로서의 실제적인 필요성을 넘어 온 인류의 구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로서 확보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준 땅의 약속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의가 드러난 심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그의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온 세상으로 파송될 때까지 약속의 땅은 비록 이방의 지배와 통치 속에서도 언약 백성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곳이었습니다.

제3차 중동전쟁 사진

그럼 가나안 땅은 현대에도 확보되어야 할까요?

첫째, 가나안 땅을 여호수아가 정복한 지역으로 보고 문자적이고 지리적인 회복을 주장하는 것은 신약의 해석과 맞지 않습니다. 특히 미국의 보수파 개신교도 중에는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면서 구약 예언을 시온주의에 대입시키고 예루살렘의 역할을 세대주의 관점에서 적용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장소와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곳은 예루살렘이며 복 천 년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스라엘이 구약에서 약속된 가나안 지역을 모두 회복해야 한다는 논리로 비약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이런 식으로 보면 ‘약속과 성취’의 패턴을 문자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에 그림자와 실체에 혼란이 생깁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된 ‘땅’의 영역을 생각해 보십시오. 팔레스타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나안 땅이었지만(창 12:7) 다음 단계의 말씀에서는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창 15:18) 확대되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주신 영역은 이 지역을 더 구체적으로 확장한 것인데(민 34:1-12; 수 1:4) 다윗과 솔로몬 때 가서 대충 이스라엘의 통제 영역에 들어갔습니다(왕상 4:21). 그나마 오래 가지 못하였고 유브라데까지는 국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구약에 나오는 약속된 영역의 땅이 이스라엘이 차지할 땅이라고 본다면, 가나안 땅 전체는 물론이고 광야와 애굽 강과 유브라데 강까지 다 차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자적이라면 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고대 가나안 영역에만 적용되어야 합니까?

둘째, 우리는 가나안 땅이 구속사적인 계시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원래 의도했던 목표를 드러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오래 살지도 못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그들은 곧 원주민들의 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거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왕권제가 도입된 이후로 북 왕국은 앗수르에 멸망당하였고 남 왕국도 바벨론에게 패망하여 백성의 절대다수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다시 귀국 길에 오르지만 70년이 지난 후였고 소수 그룹만이 유대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가나안 땅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을 받았고 톨레미 왕조, 셀루커스 왕조를 거쳐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랍 동맹(Arab Confederation), 십자군, 살라딘 등의 외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터키는 영국이 1917년 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낼 때까지 이 땅을 무려 4백 년 동안 통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유대인들은 세계 각처로 흩어졌고 자기들이 살 터전을 잃었다가 1948년에 주권국가로서 인정을 받고 현재의 이스라엘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원래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역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과연 한 국가의 영토에 국한된 것이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해 나가시는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큰 틀 안에서 그 역할과 목적과 성취를 신약 저자들의 관점에서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그럼 신약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해석해 줍니까? 우선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언약은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된다는 뜻이었다고 밝힙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국한된 영토적 지역이 아니고 ‘온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국경도 민족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새 언약에 와서는 더 이상 국가적인 개념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특정 국가의 영토로서의 땅의 개념이 이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 특정 민족으로서의 출생이나 모세 언약에 의한 것이 아니고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성립되기 때문입니다(갈 3:7, 29).

새 언약 백성은 모세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율법이 아닌, 단순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유업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이스라엘의 지리적인 영토 회복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땅에 대한 유업의 약속이 바라본 ‘세상의 상속자’가 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세상’(롬 4:13)을 받는 상속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직접적으로는 우리가 사는 현 세상입니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여러 가지 유업의 약속들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에는 “세상의 상속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바울은 아브라함의 언약 내용과 문맥을 통찰하고 이를 새 언약 백성에게 적용하여 이 세상을 상속받는 것이라고 총칭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준 유업의 약속들은 그의 후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유업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복음과 사랑의 삶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가야 합니다. 악과 불의의 세상이 복음과 사랑의 삶에 의해 정복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상속합니다. 

현세적인 이 땅은 우리가 받는 유업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기다립니다 (사 65:17; 66:22; 벧후 3:13; 계 21:1).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셨던 약속의 땅은 이 세상 전체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유업은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에 대한 시식입니다. 이 ‘세상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메시아의 통치로 완전히 새로워질 갱신된 세상에서 받게 될 유업의 상을 목표로 삼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땅의 개념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옛 약속은 새 땅에 대한 하나의 그림이었고 게시판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그 자체로서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유업으로 자기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가나안 땅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될 우주의 일신과 새 땅에서의 유업을 최종 목적지고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팔레스타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땅으로 국한하여 대입시키거나 연장해서 적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현재의 팔레스타인이 아닙니다. 현재의 팔레스타인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이 아니고 분쟁과 불의와 불화가 흐르고 있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문맥에서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곳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피어나는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 능력으로 죄인들의 삶이 변화되는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젖과 꿀이 흐르는 본체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대속주로 믿고 그분과 연합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께서 자신의 보혈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실을 믿을 때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예수님이 가나안 복지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근원입니다.

가나안 땅의 확보가 지닌 구속사적 이유

구주가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는 속죄의 장소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수아가 정복한 가나안 땅에서 태어나고 가나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갈보리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땅에서 부활하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부음을 받고 온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나안 땅은 구속사적인 의의를 지닙니다. 그러나 땅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특별히 신성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주 예수께서 구주로서 오셨던 이 세상은 구속의 역사적 현장으로서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속사적 의의를 지니는 과거의 특정 지역 자체에 집착하기보다 앞으로 변화될 새로운 세상의 관점에서 가나안 땅을 회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지(聖地, the holy land)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특정 지역을 성역화하고 신성시하는 중세기적 개념이 묻어 나옵니다. 새 언약 백성에게는 그런 종류의 성역은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지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새롭게 갱신시킬 이 세상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도(聖徒)로서 죄와 죽음이 없는 일신된 새 땅에서 주를 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예루살렘을 특별히 거룩한 성역으로 간주하거나, 예수님의 재림 장소로 기대하거나, 혹은 복 천 년 기간에 성전이 지어질 장소로 전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땅에 대한 유업의 약속을 팔레스타인이라는 장소에 국한하고 이를 신성시하거나 아직도 유효한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적인 성취를 무시하는 일입니다.

 신약에서는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별도의 신학적 의의를 부여하지도 않습니다. 신약에는 지리적이고 영토적인 의미의 팔레스타인 땅을 회복해야 한다거나 그곳을 성역화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행 13:32-33).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땅의 주권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심판 아래 있는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온 땅이 주님을 아는 지식과 영광으로 가득 채워지게 하실 것입니다(사 11:9; 합 2:14).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마 5:5). 약속의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구속 사역으로 영토적이고 국가적인 특정 지역을 벗어나 온 세상으로 퍼졌습니다. 또한, 그 획득 방법에도 전격적인 변화가 왔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와 성령의 인도와 사랑의 법으로 온 세상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쟁취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유업을 받아 누리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필자 이중수 목사는 성경강해자로, <선지자의 침묵>(요나서 강해), <여백의 하나님>(엘리야 강해), 하나님의 무지개(창세기 3~11장 강해), <슬픔이 변하여 춤으로>(룻기 강해) 등을 포함한 11권의 저서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구원의 핵심>, <성경해석의 원리> 등 30여 권의 번역서를 낸 저술 사역자이다. 현재 플로리다 올랜도새길교회 전임 목회자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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