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의 나는 새'는 '까마귀'이다
'공중의 나는 새'는 '까마귀'이다
  • 김동문
  • 승인 2017.03.12 0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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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익숙한 설교 사실 확인하기

'까마귀와 비둘기?' 

"까마귀 같은 인생보다는 비둘기 같은 인생을 살라."
“까마귀는 불결하고 비둘기는 순결하다”

과연 그럴까? 성경 배경은 창세기 8:6-12절. 이 본문을 바탕으로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의 방주 운동은 이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운동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물결이 성난 파도처럼 엄습해도 여기에 구원이 있음을 알려야 할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이 교회운동에 있어서 우리는 까마귀 같은 신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기의 영광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믿음도 헌신짝 버리듯이 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세상일에만 빠져 육신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비둘기 같은 신자가 되어 나에게 사명을 맡겨 주신 주님의 목적에 우리의 일생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과연 어떤 신자입니까? ”

또 이런 설교도 있다.

“까마귀 같은 인생이 아니라 비둘기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처럼 까마귀는 뭐했습니까? 조금 거시기 했습니다. 노아가 땅이 어떤 상황인지 알라서 보내놓았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왜 까마귀를 보냈습니까? 땅의 형편이 알아보고 돌아오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동물들 시체 섞은 것 뜯어 먹느라 자신의 사명을 망각한 것 아닙니까? 까마귀처럼 자기의 잇속 챙기느라 보냄 받은 자들이 자기 본문과 사명 잊어버리고 살 때도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인생입니까? 그렇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비둘기는 뭐했습니까? 돌아왔습니다. 왜 돌아왔나요? 그것은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다시 보냄을 받았을 때는 감람나무 잎사귀까지 증거물로 가져왔습니다. 비둘기는 자기의 사명에도 충실했고 열매도 맺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비둘기처럼 사명도 다하고 열매도 맺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에서는 성령을 비둘기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까마귀 같이 제 잇속만 챙겨먹느라 사명 망각하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 비둘기처럼 사명도 다하고 열매도 맺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진:구름과 언어>

사실 확인하기

들어보았을 듯한 설교이다. 이 설교를 접하고 신자들은 마음속으로 비둘기 같이 성결한 신자의 삶을 살겠노라고 결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은혜와 가르침이 진실,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본문 어디에도 까마귀나 비둘기의 존재 가치나 행동에 대한 평가가 담겨있지 않다. 이것은 성경의 이미지에 대한 한국식 오해이다. 까마귀는 비둘기보다 더 멀리 날고 오래 견딘다. 본문 7절에 보면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고 적고 있다. 비둘기는 어떤가? 지구력이 그만하지 못하다. 9절에 보면 " 비둘기가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노아에게 돌아왔다. 더 멀리 오랫동안 돌아다니면서 '사명(?)'을 다할 힘이 비둘기에게는 없었다. 성경 본문 어디에도 까마귀와 비둘기 자체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까마귀가 초기 정탐 사역에 더 요긴하게 섬겼다고 볼 수 있지 않는가? 성경 본문에서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물론 없다. 본문의 맥락을 비춰 보면 까마귀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귀선(배로 돌아와)하여 쉬고 있지 않았을까?

까마귀 같은 인생이 되지 말라는 설교, 성경은 그것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또 다른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엘리야 선지자는 까마귀가 물어다 준 떡과 음식을 먹고 버틸 수 있었다. 아무도 이 본문을 두고는 "선지자를 공궤한 까마귀를 본받읍시다" 이런 설교를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본문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면 당혹스러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 본문을 가지고 몇 몇 이단에서 재가공하여 유혹하기도 한다.

성경의 땅인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할 것 없이 그 곳에서는, 까마귀는 한국인들의 까마귀 인식이나 이미지와 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까마귀는 '흉조'가 아니다. 그냥 일상적으로 자주 접하는 조금 덩치가 큰 새의 하나일 뿐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참새 다음으로 까마귀를 많이 볼 수 있다. 구약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공중의 나는 새’로 예수님이 표현하신 새도 사실 까마귀이다. 성경 속에서 사용하는 어떤 표현들은, 우리와 다른 문화와 그림 언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맥락을 무시한 채 한국식으로 성경 이야기를 재가공하고, 깨달음을 안겨주고자 애를 쓰는 것은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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