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입니다"
"저는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입니다"
  • 최태선
  • 승인 2017.03.12 02:0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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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은 복을 비는 행위입니다. 복을 비는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복주의는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기복주의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복을 받는 자신에게로 중심이 옮겨지기 마련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은 병을 낫게 해 달라,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 출세하게 해 달라, 좋은 대학에 입학하게 해 달라는 등의 현실과 관련된 문제 해결에 주안점을 두기에 이기적으로 흐르기 쉽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의 존재 의미를 망각하는 위험한 지경에 빠져들게 하기 쉽습니다.

기복 행위를 세속적인 욕망만으로 한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을 위해 기도하신 적이 없지만 세상의 복을 멀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하늘의 복을 미리 맛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은 현재를 축복하셨고, 그 축복은 영원을 미리 맛보는 맛보기였습니다. 기독교는 축복으로 세상에 영원한 복을 가져다 줍니다. 거기서 하나님 나라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복의 근원으로서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사명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기복이 아니라 기복주의입니다. 기복주의는 그리스도인이 받는 복을 개인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불평등이 조장됩니다. 그것도 단순한 경제적 불평등이 아니라 신앙적 불평등이 생겨나게 만들어 신앙에서조차 서열이 매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복을 받아 호의호식하며 군림하며 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해 가난하게 삽니다. 믿음에서조차 치열한 경쟁의 장이 열리고,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려 위선을 행하게 되고, 업적과 효율로 결과를 재단하여, 하나님을 사람이 요구하는 것들을 무조건 해결해주는 알라딘 램프의 요정으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복주의는 가장 현저한 인본주의를 만들어냅니다.

그러한 기복주의의 대표적인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과 그분을 추종하는 분들의 복은 하도 유명해서 '오중 삼박자 축복'이라는 신학이 되었고, '여의도 복음'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습니다. 한 마디로 복의 전문가입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설교하면서 나사로는 복음을 몰라 가난하게 살았다며,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해져야 한다면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해져야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모두 셋방을 살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말을 할 때의 그분의 표정과 그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열화와 같은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 교회 교인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이 시대 기독교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여의도 복음'이 전세계에 뿌려놓은 기복주의의 폐해는 제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사진:나무위키)

여의도 복음은 기복주의의 대명사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기복주의에서 말하는 복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서가 말하는 복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적인 복의 정의가 정립되어야 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성서가 의미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명징하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너는 복이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관련하여 두 가지 영적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복의 통로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복의 통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12:2)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명령형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너는 복이 되어라" 혹은 "너는 복이 되어야 한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명령 다음에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축복을 받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서에는 복의 통로가 되는 삶의 예가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 30장에는 야곱과 그의 장인 라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라반은 야곱에게 "자네가 나를 좋아하면, 여기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네. 주님께서 자네를 보시고 나에게 복을 주신 것을, 내가 점을 쳐 보고서 알았네."라고 말합니다. 라반은 자신의 복이 야곱을 통해 자신에게 이르렀다는 것을 점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디발과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안 일과 그 모든 재산을 맡겨서 관리하게 한 그 때부터, 주님께서 요셉을 보시고,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이, 주인의 집 안에 있는 것이든지, 밭에 있는 것이든지, 그 주인이 가진 모든 것에 미쳤다."(창39:5)

경호대장 보디발은 자신이 요셉으로 인해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무심코 지나치지만 보디발의 행동에 담겨 있는 의미는 엄청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과연 나는 복이 되어 다른 이들을 위한 복의 통로가 되고 있는가?

이 질문이 날마다의 우리의 삶을 견인하는 화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자신의 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자들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 거룩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는 복이 되어야 한다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복을 주셨듯이, 우리를 통해서도 다른 이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아 행복하다면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 일이 우리의 사명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의 진정한 의미'

우리는 언제나 물질의 풍요를 복과 연결시킵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을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부자가 되었든 상관없이 그를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를 면밀히 읽어보면 물질의 풍요와 부하려는 마음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해가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쉽게 행운을 복과 연결시킵니다. 복권에 당첨 되면 사람들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대부분 삶의 몰락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탄 나고 결국 그 복을 받은 행운아의 인생 전체가 몰락하는 것은 마치 공식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복이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서가 가난이 복이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현저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이외에는 더 이상 희망이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찾고 의뢰하려는 선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가난의 자리에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온전히 의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난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언제나 물질적인 복과 하나님과의 관계, 둘 모두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이냐 돈이냐,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둘 모두를 원하거나 돈을 원합니다. 이 명백한 신앙인들의 실존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영적인 인물들은 처절한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만나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받은 복 가운데 그가 현재형으로 누린 복은 거의 없습니다. 그가 받은 복은 대부분 미래에 받을 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아 누린 복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5장 1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진정한 복이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모든 것이 변합니다. 누구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면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귀한 일이 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일이 다 복이요 귀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이 되어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고 복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복이 되라는 사명

예수님은 복인 사람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은 아버지와 일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의 하시는 말은 그분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었습니다.(요14:24)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 그분 안에 계셔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었습니다.(14:10) 그분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 또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단순하게 자신의 복을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복이 되라는, 다시 말해 복 자체가 되라는 사명을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복의 통로가 되려면 하나님과 일치해 살아가야 합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면 그 평안과 기쁨은 이웃들에게도 흘러들어가 그들의 내면도 기쁘고 평화롭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건강이나 재물과 같은 현세적인 것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평안과 기쁨입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그리스도인들이 복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의 통로가 되는 길은 구체적이고 다양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한 사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주고 어떤 기대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친절과 자비로 환대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일입니다. 친구와 함께 걷고 있는데 노숙자 한 분이 눈에 띠었습니다. 그분에게 다가가 "식사는 하셨습니까?"라고 물으며 만 원을 드렸습니다. 그분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가 곧 바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되뇌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았던 친구가 제게 말했습니다.

"야 저 사람에게 만 원짜리 한 장 준다고 저 사람이 노숙자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노숙자들은 널려 있는데 뭐 하러 그런 일을 하냐?"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너 그 사람 기뻐하는 모습 못 봤냐? 내게 의미 있는 건 그 사람의 기뻐하는 그 순간이야. 위대한 일을 꿈꾸며 아무 일도 안 하는 것보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말에 수긍해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

테레사 수녀님은 그러한 삶을 더 자세히 다음과 같이 설명해줍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 숫자가 채워질 때까지 기다린다면 우리는 숫자 속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며 결코 구체적인 한 사람을 위해 사랑과 존경을 나타낼 수 없게 됩니다. 저는 결코 대중을 구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입니다. 저는 한 번에 다만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다만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을…"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테레사 수녀님의 말처럼 한 번에 한 사람씩 껴안아 줄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저는 가나안 성도들을 통해 바로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보다 근원적으로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복을 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복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고 서두에서 언급한 목사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몰라 가난하고 어렵게 산다며 예수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신이 껴안아주어야 할 바로 그 한 사람을 껴안아주지 않았습니다.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그러한 잘못된 기독교 복에 대한 왜곡이 사라져야 합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테레사 수녀님의 이 말씀에는 복 자체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냉랭하고 삭막한 현실 세계 속에서 한 번에 한 사람씩 껴안아주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화될까요? 그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는 무조건적인 환대가 아닐까요?

가나안 성도들이 바로 그러한 일을 실천하는 복 자체인 그리스도인이 되어 땅에 떨어진 복음과 교회의 평판을 되살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의미 없이 기존의 교회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교회를 새롭게 하시려는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불러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가나안 성도님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통해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너무도 분명하고 현저합니다.

"너는 복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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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2017-03-21 03:56:51
목사님의 생각을 '비참한 현실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 나라'라는 글에서 잘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atom 2017-03-14 05:41:03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번에 한 사람씩 껴안는 것과 동시에,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사람이 없는 사회 구조를 만들기 위해 나 한 사람이라도 헌신하면 어떨까요. 내가 가난한 사람 한 번 돕는다고 해서 그 가난한 사람이 크게 달라지지 않듯, 나 한 사람이 사회구조의 변화를 위해 나선다고 해서 당장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