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의 ‘갑질’을 막을 수는 없을까?
"교회 안의 ‘갑질’을 막을 수는 없을까?
  • 김동문
  • 승인 2017.03.17 08: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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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목사와 교회의 목사, 전도사들의 관계는 건강한 동역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서로 간에 배려와 존중이 있으며, 건강한 비판과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 가는 관계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이루고 있는 담임목사와 이른바 부교역자들은 얼마나 될까?

“내가 페이스 북에 교회 비판적인 글을 올렸다고, 교회에 비판적인 누구누구의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고 담임목사에게 불려갔다. 교회의 D가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사, 전도사들에 대해 수시로 담임목사에게 보고하고 있다. 교회의 비선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A의 사례) 

얼마 전에 LA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후배 목사들을 만났다. 목회 현장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나누었다. A 교회의 담임 목사,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목사, 전도사들에게 온갖 갑질을 다했다. 그는 주중에 교회에 출근하는 것을 보기 힘든 사람이다. 교회의 목사, 전도사들과 정기적인 회의도 갖지 않는다. 아주 드물게 교인 심방을 한다. 그런데도 그는 훌륭한 담임목사로 알려져 있다. 이미지를 잘 포장하며 자신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덕분인지 훌륭한 목사로 신문에도 알려졌다.

“내가 전도사 시절 있었던 교회의 담임목사는 헌병대 출신 목사였다. 그런데 그는 부교역자들을 뒤돌려 차기를 하고, 예배 도중 모든 사람들이 있는 상태에서 강대상에 서서 공개적으로 화내고, 야단치고, 막말을 하고...” (B의 사례) 

적지 않은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아닌 목사, 전도사들은 신분상으로 자주 하도급(하청 : '수급인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완성을 제3자로 하여금 하게 하기 위하여 다시 체결하는 수급인과 제3자와의 계약') 비정규직 취급을 받는 것 같다. 대부분 계약서도 없이, 근무 기간도 정해지지 않은 채, 구체적인 지위와 역할도 정해지지 않은 채 않은 채 고용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고 하여도 담임 목사의 대리인 역할에 충실할 책임은 가득 주워진다.

담임 목사들 가운데는 목사, 전도사의 사례비를 자기가 주는 것도 아닌데 이들을 막 대하고 자기 하수인으로 부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른바 '갑질'하는 담임목사들도 적지 않다.

“교육목사와 그 아내도 신학교를 다녀서 전도사였어요. 그런데 일이란 일은 다 시키고도 월급 한 푼 따로 주지 않더군요. 뭐라도 잘못할라치면 담임목사며 사모, 장로들, 집사들 할 것 없이 다 몰려가서 혼내고.. 교육목사와 아내 두 분 다 30대 초반으로 나이도 많지 않아서 교회 무슨 일만 생기면 다들 희생양으로 삼기에 바빴죠. 더군다나 그 전도사는 외모도 예쁘장했기에 이런저런 소문에도 시달리고..” (C의 사례) 

이들의 재능 기부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목사 전도사의 아내는 무급 봉사자로 간주하고 1+1 취급을 한다. 고용으로만 따진다면 담임목사도 피고용인 인데, 다른 피고용 상태의 목회자를 자기의 하수인 취급하는 '하수'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남동생도 목회자인데, 반말에 따귀에 장로에게는 줬다하고 퇴직금도 주지 않았던 담임목사가 있죠.” (D의 사례) 

이런 하수들이 교회와 노회, 속회, 교단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이런 수준 낮은 하수들을 처리하는 하수 처리 시스템이 바로 잡혀야, 교회에서 말없이 사명감으로 감정노동 당하면서도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들과 그 아내와 가족들의 한 숨이 줄어들 것 같다.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일혈(千人血)이요’(금 술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민중의 피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화려한 쟁반에 담긴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낙시(燭淚落時)에 민루낙(民淚落)하니,(호사한 촛대에서 흐르는 촛물은 민중의 눈물이니).
‘가성고처(歌聲高處)에 원성고(怨聲高)라.’(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하는 소리 높구나)
- 춘향전 중에서

적지 않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와 전도사들 그리고 그들의 아내가 교회 안팎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항변하지 못한다. 그 이유로는 교회, 노회나 속회, 총회가 인맥으로 이뤄진 측면이 강해, 현재의 담임목사가 지속적으로 악평을 할 것에 대한 두려움도 한 몫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이 종교개혁 500주년 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적잖은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것을 기념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지나간 ‘종교개혁’ 자체를 읊조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교회는 교회 공동체 안의 불평등과 불합리한 것을 바꾸는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을 하여야 한다.

“담임목사에게 과도하게 부여된 특권이 담긴 교회법은 고쳐”지고, 담임 목사와 다른 교회 목회자들 사이의 이런 잘못된 “만남이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으로 이런 개혁도 시작” 되었으면 좋겠다고 ㄱ 목사는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또한 이 글에서 주목하지 않았지만, "담임목사가 최소한의 목회적 소신도 펼치지 못할 만큼, 위압적인 제도와 문화"도 바로 잡혀야 한다. “보통 목사들은 상징적 의미에서 주보의 틀 하나 맘대로 바꾸기 어려운” 현실도 바뀌어야 한다. 2017년, 교회 안의 개혁을 이루는 수고를 하는 것이 종교개혁을 기억하는 일인 것 같다.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 독서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교회를 꿈꾼다. 워드나 엑셀을 잘못 다루고 담임목사에게 제출하는 보고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못해도, 교인들의 일상 속에 함께 녹아드는 모습을 응원하는 그런 교회를 그려본다. 담임목사, 목사, 전도사가 역할의 차이이고, 계급이나 계층이 아님을 누리는 그런 목회자 공동체를 생각한다.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목회 현장의 동역자들이 고맙다. 그런 사역 현장을 꿈꾸지만 그 날이 아독하기만 한 동역자들을 응원하고 싶다. 박영호 목사가 지적하듯이 “가냘픈 예언자의 목소리조차 내기도 힘들고, 교회 제도를 전향적으로 바꾸는 일은 꿈도 못”꾸는 현장의 목회자들의 아픔을 같이 한다.

‘종교개혁 기념’은 ‘그때 그 자리’를 기념(만)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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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메이커 2017-03-18 08:35:09
자비량 전도사사역이 확장 되는 것 외에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 운좋게 좋은 담임목사님을 만나신 분도 있겠지만. 저도 자비량이지만 담임목사님께 최대한 순종합니다. 담임목사님도 저에게 인격적으로 대해주시고 생업의 사정들을 고려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