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세습으로 돈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들은 세습으로 돈의 노예가 된 것이다
  • 최태선
  • 승인 2017.03.25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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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와 김동선은 공통점이 참 많습니다. 이들은 돈 많은 부모 덕에 똑같이 승마를 하고 아시안게임에서 같은 팀의 일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겉으로 드러난 사실보다 더 현저한 공통점은 이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입니다.

정유라는 여덟 살 때 자신의 몸을 닦아주는 어른 세신사의 뺨을 때렸습니다. 보통의 상황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이미 돈의 노예가 되어 사고가 마비되었습니다. 힘없는 자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 불의한 방법으로 일류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불의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녀는 돈 많은 부모를 가진 것이 실력이라고 주장하며 할 수 있으면 너도 해보라고 사람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정유라와 김동선

김동선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종업원을 때렸습니다. 태도가 불량하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다른 이의 태도가 불량하기 때문에 자신이 때려도 된다는 사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재벌가 자식의 특권의식입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순찰차도 부술 정도로 그는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이전에도 그는 술집 여종업원을 성추행하였습니다. 죄질이 불량해서 재판에 회부되었고 1년 형을 받았습니다.

이 두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못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게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의 전형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 사람은 자세히 보면 굉장히 단순하고 순수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행동이 이토록 후안무치한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을 은밀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돈입니다. 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돈을 단순히 돈이라 하지 않고 맘몬이라는 인격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돈의 속성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식간에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단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정유라와 김동선 뿐일까요? 단지 이들이 어리고 젊기 때문일까요? 어릴 때 고생을 하고 자라면 어른이 되어 돈을 벌면 돈의 노예가 되지 않을까요? 그 대답은 모두 '아니요'입니다. 그렇다면 돈의 힘을 이길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돈의 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돈을 無力化하는 것입니다. 돈을 무력화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부를 두려워하자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부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부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한민국의 노숙자도 이미 부자입니다. 구걸할 대상이 있고 주워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북한의 꽃제비들에 비해 부자입니다. 적어도 이 나라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부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부자가 아니라는 생각은 부의 문제를 피해 에둘러 돌아가려는 처사입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이 사막의 성자 푸코입니다. 그는 부를 두려워하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를 두려워하자. 부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무한히 풍요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연약함을 생각한다면 부는 큰 위험이다. 왜냐하면 부는 나 자신이 그에게 사로잡힐 가능성이 크고 동시에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가난해지자. 가난한 예수님을 닮기 위해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되자. 그분의 말씀에 순명하기 위해서라도 가난해지자,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렇게도 가난을 강조하셨고 부에서 멀어지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사신 것처럼 우리도 가난하게 무소유로 살면서, 가난한 노동자들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사용하지 말자."

푸코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부가 자신에게 큰 위험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했습니다. 그는 부를 무력화시키고자 가난하게 살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작은 자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가장 낮은 곳에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푸코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랑하고 간증합니다. 교회가 커진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겸손한 듯이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정작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작 그렇게 커진 교회에는 예수님이 안 계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비관적으로 우울하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나라입니다. 그래도 자신의 심령만은 가난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심령이 가난해지면 부자로 살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지면 반드시 푸코처럼 가장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가고 또 내려갑니다. 스스로 가장 작은 자가 되어 작은 자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주변에 핍절한 자가 없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경제적인 풍요만이 아니라 샬롬이 이루어집니다. 샬롬은 하나님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결핍이 없는 참된 평화입니다. 복음이 복음인 것은 이처럼 복음대로 살면 샬롬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습

세습은 김하나가 말하는 대로 성서에서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세습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부가 세습 한 가운데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父子 역시 정유라와 김동선과 마찬가지로 돈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들 父子가 정신을 차리고 세습을 포기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정유라와 김동선이 개과천선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지만 결코 가능하지 않은 기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습의 부당성에 대해 지적하면서 세습을 멈추라고 항의하지만 그것을 듣고 마음을 돌릴 사람이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후임 목사를 정하지 않은 일 년여의 기간 동안 세습의 필요성에 대해 나름 깊이 확신했을 것이며, 세습을 강행할 시 부딪혀야 할 저항 역시 헤아려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맘몬은 그에게 그것이 하나님과 그 교회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라는 생각을 불어넣었을 것이며, 자신들이 겪게될 세습의 부당성에 대한 지적은 하나님을 위해 받아야만 하는 고난으로 치부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욕망 가운데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그리고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듯이 기다리실 것입니다. 혹자는 그들 父子가 아니라 그 교회 교인들 때문에 세습을 못하도록 항의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택은 그들의 몫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이 돌아오면 달려가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실 아버지처럼, 살진 송아지를 잡어 벌이는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할 마음을 가지고(첫째 아들과 다르게)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세습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세습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리의 삶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는 것입니다.

성광

이에 대해서도 푸코는 귀중한 조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1909년 샤를르 드 푸코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의 사도직은 선함의 사도직이어야 한다. 어짊의 사도직이어야 한다. 나를 보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게 되어야 한다. '이 사람이 이렇게 선하니 그가 믿는 종교도 선할 것이다.' 누군가 내가 왜 온유하고 선한가 묻는 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보다 훨씬 더 선하시고 좋으신 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나의 선하신 스승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제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성광(聖光)이 되어야 한다. 사제는 사라지고 예수님만이 보여야 한다. 나에게 오는 모든 영혼 안에 좋은 기억을 남기도록 노력해야 되겠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자. 웃는 이와 함께 웃고 우는 이와 함께 울자. 그래서 모든 이를 예수님께 인도하자."

비단 푸코만이 사제일까요? 만인제사장이라는 말이 진실이고, 그것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인 모두가 사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신의 사도직을 제대로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푸코처럼 어짊의 사도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성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명성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그 일은 주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의 기회입니다. 비록 그 일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그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고 사망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희망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피상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우리의 삶의 현장의 구체적인 사건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면 우리는 이 일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 여러분,

부디 푸코가 걸었던 그 길을 우리도 걸읍시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 웃는 이와 함께 웃고 우는 이와 함께 웁시다. 그래서 모든 이를 예수님께 인도합시다. 명성교회의 세습이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사라지지 않도록,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길에서 장렬하게 산화하여 성광이 됩시다. 그때 우리는 진짜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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