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차별 신학은 이유없이 공고하다
여성차별 신학은 이유없이 공고하다
  • 최태선
  • 승인 2017.04.02 0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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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설교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낮은 곳에 또 다른 강대상이 있고 그 아래에 교인들이 앉는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강대상이라 불리는 설교대가 있는 곳은 카펫이 깔려 있고 신발을 벗고 올라갑니다. 거룩한 곳이라는 상징성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이중의 강대상은 차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장로님이나 남자 선교회장은 높은 강대상에서 기도를 하거나 사회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여자 선교회 회장은 낮은 강대상에서 사회를 봅니다. 처음에는 그런 구분을 거의 인식조차 못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단이나 교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제가 기억하고 있는 교회의 기억입니다.

그런 것이 교회 안의 여성 차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분위기가 그러했고, 제가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남자였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소자들과 소외된 자들과 약자들에게 편향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여성들 역시 바로 그렇게 소외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서를 다시 보니 여성에 대한 시각이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일반화된 것은 교단마다 조금은 차이가 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를 망라하고, 과거와 현재를 망라하여 다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차별에 대한 교육은 신학교에서도 일반적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기사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총신에도 여성 안수의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신학자인 강호숙(54) 박사는 이 한 마디 기도 때문에 총신대 시간강사직에서 해고됐다. 2015년 12월 대학 총장이 참석한 총신대 신학대학원 여동문회 송년회 자리였다. 강 박사는 목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밟아야 하는 안수를 여성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총신대에서 7년 가까이 시간강사로 일한 강 박사는 2016년 1월에도 대학측의 요청에 따라 시간강사 관련 서류를 제출하고 수업계획서를 온라인으로 입력했다. 그런데 다음달 그가 맡기로 한 강의가 폐지·유보되거나 담당교수가 바뀌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대학 관계자들은 강 박사에게 "송년회 자리에서 여성안수 발언을 해 배제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혹은 “여성안수에 찬성하는 사람을 강사로 위촉하는 것에 대해 교단측에서 총장을 공격했다”는 말을 전했다.

강 박사는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고, 서울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는 모두 강 박사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총신대가 여자교수를 뽑지 않는 것은 여성차별"이라고 결정했다.

강호숙 박사(미주뉴스앤조이 자료사진)

기사에서 보듯이 강 박사가 이겼지만 그녀의 복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여성차별에 대한 신학은 이유 없이 공고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서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서는 여성이 영적으로 우월한 존재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성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내 사라와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물론 사라뿐만 아니라 조카 롯과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도 함께 떠났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함께 떠났다는 이 기사에서 사라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서에서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은 분명한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거지와 나사로의 기사에서 부자의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서는 의도적으로 이름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배역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단지 그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부자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면 후대의 독자들은 부자가 한 행동의 책임을 이름이 언급된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그의 역할이 모든 부자들을 향한 것임을 호도할 것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당시, 그가 속한 문화에서 여성은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후의 율법에서조차 아내는 그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첫딸을 낳았을 때는 속전을 드릴 필요도 없었고, 여인들은 법정의 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여자가 서원을 한 경우도 아버지나 남편이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아내의 이름 사라가 언급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서 기자의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애초에 두 사람에게 함께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실은 17장에서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이 주어질 때 사래에게 사라라는 새 이름이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내인 사래에게 남편인 아브람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의 약속을 주실 때 그 약속은 사라를 향해서도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여정이 들어선 아브라함과 똑같이 사라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는데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얻는 모든 자손을 일컫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라에게서 얻는 자식을 통해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사라가 단지 아브라함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똑같은 부르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사실을 통해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의 부속물처럼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역시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는 나라이며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의 여정의 출발지점인 이곳에서도 이처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돕는 배필

성서를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보면 세 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에덴동산이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세 번째는 신약의 새 이스라엘입니다. 사라는 두 번째 이스라엘 무대의 성서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 나머지 두 무대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에덴동산입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을 맡아 돌보게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짐승과 새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데 돕는 사람인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 여자가 하와(이브)입니다. 성서는 그녀를 돕는 배필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돕는'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에제르'이고 배필은 '네게드'입니다. '네게드'는 '상대자'라는 의미로 부부로서의 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짝은 단순히 짝으로서의 짝이 아니라 돕는 상대자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아담이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와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아담의 짝으로 주어졌습니다. 다른 모든 생물들도 짝이 있습니다. 그 짝은 종족보존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는 단순히 종족보존을 위한 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돕는다는 의미의 '에제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제르는 '도우시는 하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묘사하는 형용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형용사를 여자에게 사용한 것입니다. 성서는 하나님께 사용하는 단어를 사람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예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우리는 이곳에서 하와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로 아담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돕는다는 의미는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방식에서 섬김이란 노예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주인이나 손님에게 시중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서에서 말하는 섬김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지만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르게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부리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큰 자가 작은 자를 돌보고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한다면 돕는 배필로 주어진 여자는 오히려 남자보다 우월한 큰 자라는 것을 유추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여자가 남자보다 영적으로 민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를 더 잘 섬길 수 있는 존재임을 늘 느껴왔습니다. 부모가 다투는 자녀들 가운데 큰 아이를 야단치고 이해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큰 자도 작은 자도 없는 나라입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평등하게, 인간답게, 존엄성을 가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대등하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이제 마지막으로 새 이스라엘이 펼쳐지는 신약시대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사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는 여자를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남녀가 차별이 없음을 선언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가장 확실하고 결정적인 증거는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많은 여자들이 십자가 형장에 있었으며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와 같이 이름을 밝히고 신분을 밝히고 있는 여성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는 부활의 증인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즉 여성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성서에서 부활의 증인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자칫 성서를 믿지 못할 문서로 만들 수도 있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서는 이 사실을 은폐하거나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여자와 남자가 차별이 없음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의도적인 선택임을 드러냅니다.

남녀가 평등한 새로운 교회

저는 남녀가 평등한 새로운 교회를 위해서도 가나안 성도들의 출현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출발은 기존의 것을 허무는 해체의 과정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해체란 단순한 해체가 아니라 '탈구축', 혹은 '재구축'을 위한 해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가나안 성도들이 기존의 교회를 떠나 구축하는 새로운 예수 공동체는 남녀가 평등한 새로운 교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여성 안수는 물론, 남녀가 동등하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뜻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일에 대등한 상대자로서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이 시대 가나안 성도들의 출현은 성령의 일하심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가나안 성도들에게 이 시대 한복판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남녀가 대등한 상대자로 활돌하는 새로운 교회인 예수 공동체를 우뚝 세웠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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