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을 지키라' 다시 읽기
'안식일을 지키라' 다시 읽기
  • 김동문
  • 승인 2017.04.06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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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눈으로 성경읽기] 제4계명 안식일에 대한 바른이해

"어, 이집트는 1주일이 10일이었는데, 안식일은 주7일제?"

성경 독자들에게는 그냥 부담 없이 넘어가던 성경 본문이 낯설게 다가온 경험들이 있다.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동안 눈치 채지 못했던 성경 메시지가 다가올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세오경의 한 사건은 바로 십계명에 관한 것이다. 이 십계명을 대하면서 성경 독자들은 그 계명을 듣던 이들에 대해 크게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그들은 누구였던가? 단일 인종이나 혈통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출애굽기 12:38)다. 출애굽 공동체는, 이집트에서 살다가 같이 나왔다는 것 외에는 이들 사이에 다른 것도 많았음을 짐작한다.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그들은 문화적으로 이집트에 속한 이들이었을 것이다.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이집트어를 듣거나 말하고, 읽고 쓸 줄은 몰라도 고대 이집트어를 접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명령, 계명, 율례, 법도를 주셨다. 그렇다면 이들 다양한 무리들이 다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이나 신에 관한 내용은 상형문자로 기록했다. 고대 무덤이나 왕과 신에 관한 기록들은 상형문자로 기록되어있다. 정부문서나 행정문서는 신관문자로 부르는 상형문자를 간소화한 형태의 글자를 사용했다. 깊게 다루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은 어떤 글자로 기록되었을까? 그것은 그 시대 배경으로 따져본다면, 당연히 상형문자였을 것이다. 출애굽 당시 고대 히브리어 문자가 발견되지 않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전달받는 이들의 공용어나 공통된 인식을 고려할 때, 이렇게 상상하는 것도 자연스러울 것 같다.

또 생각할 것이 있다. 고대 근동에서 법 제정자, 법 수여자는 법의 집행자였을 뿐이다.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고 법에 따라 심판과 상을 베푸는 자였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단어가 주는 억압감이 적지 않았다. 성경을 대하는 독자들도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계명이나 율법을 보면서 부담을 느끼는 것도 이런 선 이해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오경의 율법은 법의 제정자, 수호자이며 반포자인 하나님의 공개적인 결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짧게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을 먼저 만드신 다음에 그 규정을 지키도록 하시는 것이다. 십계명도 그런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이런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십계명을 다시 읽어보자. 그 가운데 4계명을 예로 살펴본다.

1. 성경 읽기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20:8-11)

2. 현장 다가서기

이 계명이 주어진 시기는, 출애굽 한 지 1년이 채 안된 시기의 일이다. 그리고 장소는 시내 광야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집트의 역법과 안식의 존재 유무이다.

고대 이집트의 창조신화 어디에도 6일 간의 천지창조와 신의 안식의 개념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안식일 개념도 없었다. 고대 이집트는 주 7일 개념이 아니었다. 1년은 12달, 3계절, 한 달은 30일, 한 주는 10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주를 10일 단위로 생각하던 것에서, 한 주를 7일로 지내라는 것은 혁명적인 큰 변화였다. 그것은 미터법에서 미국식의 야드파운드법으로 바꾸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혼란스러운 것일 수 있었다. 양력을 음력으로 바꾸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었다. 익숙했던 이집트 나일문명의 모든 것을 버리고, 저 큰 강 유프라테스 문명의 셈법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다고 이 메소포타미아의 문명 안에 갇히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쉽게 이뤄질 일이 아니었다. 이집트를 버리되 완전히 버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안식일도 주어졌다. 고대 이집트는 계층과 계급이 엄격하게 존재하던 체제였다. 이집트 신왕국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가중되고, 정복당한 지역의 주민들이 이집트에 노예와 종으로 끌려왔다. 계속되는 전쟁을 펼치기 위하여 수많은 용병들(직업 군인)이 유입되었다. 노예나 종, 하층민들에게 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쉼은 본토인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이집트 사회는 견고한 피라미드 구조였다. 강한 자의 독점이 당연시되는 사회였다. 그런 배경에서 살던 이들 모두에게, 가축과 모든 계층과 계급의 사람들이 다 같이 쉬어야만 하는 날이 정해졌다. 자유민만이 사람으로 취급받던 시대에, 모두가 사람이 되어, 사람처럼 쉬어야만 하는 날이 주어졌다. 이 원리를 지키려고 한다면, 먼저 피라미드 세계관에서 수평적 세계관을 바꿔야만 했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쉬운 일이었겠는가? 사람들의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뼛속 깊숙이 아로 새겨진 몸에 새겨진 의식이 바뀐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이들에게 이런 안식일 규정은 그야말로 낯설고 충격적인 것 그 자체였을 것이다. 요즘 말로 표현한다면 DNA, 유전자까지 다 바꾸는 변화, 그것은 완전한 변화(transformation)이었다. 철저하게 이집트스러운 것을 벗어버리는 세계관의 변화, 궁극의 혼란을 겪는 수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3. 일상 안에서

또한 4계명은 여호와가 이미 이룬 일을 소개하고 있다. 안식할 수 있는 근거와 이유, 환경을 여호와가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고,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명령이 아닌 ‘안식일을 누리라’는 초대이기도 한다.

또한 안식일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독점할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출애굽의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안식을 보장하고, 나의 안식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혹사시키지도 말고, 모든 존재와 같아지는, 더불어 안식을 누리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쉬기 위하여 다른 존재의 쉼을 빼앗는 행위도 안식일을 어긴 것이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아주 치명적인 것이었음에 다시 주목하여야 한다. 단지 무엇 무엇을 하지 않는 행동 강령이나 명령이 아니었다.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은 안식을 위한 싸움이 필요한 시대이다. 안식을 해치는 창조질서를 거부하는 혼돈과 공허, 깊은 어둠의 체제와 싸워야 한다. 그 싸움을 지나가지 않고서는 안식의 의미를 느낄 수도 누릴 수도 나눌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그 명령 안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창조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엿새 동안 힘써 수고한 그대는 쉴 자격이 있다’고 우리는 선언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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