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코스비와 세이비어교회를 생각하며
고든 코스비와 세이비어교회를 생각하며
  • 최태선
  • 승인 2017.04.07 12: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몇 년 전 세이비어교회의 고든 코스비 목사님이 별세하셨습니다. 세이비어교회는 지역의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들의 섬김을 우선시 하여 온 워싱톤 DC 중심가의 한 교회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살상을 직접 경험한 고든 코스비목사는 1947년 교회를 개척하여 2010년 은퇴하기까지 63년간 이 교회를 통해 현재 9개의 자매교회와 40여개의 수많은 선교기관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교회는 교인이 150명 이상이 된 적이 없습니다. 코스비목사의 설교는 언제나 미제국주의의 침략성과 야만성 그리고 냉혹한 시장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습니다. 미국목사의 설교 중 가장 체제 비판적입니다. 그는 미국을 'Empire'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세이비어교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복지사역 혹은 내적 치유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이끌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 방식이 가능함을 실존적으로 보여주고 드러내야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세이비어교회는 소그룹을 통해 노숙인, 마약·알코올 중독자, 에이즈 환자, 빈민 등 소외된 이웃들을 대상으로 200여개 사역을 촘촘히 진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복지사역이나 세상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 자기성찰에 기초하여 '예수 믿기'에서 '예수 따르기' 혹은 '예수 살기'로 나아가는 '십자가 지기 운동'입니다. 세이비어교회의 이야기를 듣고 세이비어교회를 모델로 삼은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있지만 그 결과가 그다지 시원치 않은 것은 세이비어교회와 사역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사역과 영향력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세이비어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 한 목사가 그곳에서 자신이 보았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만난 50대 후반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이 교회를 30년 이상 다니고 있다. 단순한 교인이 아니라, 선교활동에 있어 매우 헌신적인 활동가였다. 그러나 정교인은 아니다. 정교인이 되려면 약 2,3년간의 교육과정을 마쳐야 하고, 마지막에 선서를 한다. 거기에는 자신의 소유가 하느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필요에 따라 하느님나라 사업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내어 놓겠다고 하는 글귀가 있는데 그는 이 구절에 걸려 마지막 관문인 선서를 하지 못했다. 부자청년이 가진 재산을 모두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떠나갔다는 청년과는 달리 근심을 안고 30년을 예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신앙고백과 실천에 철저한 교회이다. 한 교회는 교인을 4종류로 나누는데, 재정기여도에 따라 구분이 된다. inward/outward 라는 매일묵상 글이 메일로 오는데, 주제는 항상 돈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예수님께서 꾸준히 설파하셨던 맘몬과의 싸움입니다. 맘몬은 코스비 목사님이 말한 'Empire', 곧 제국이 보장하는 거짓 평화의 실체입니다. 제국은 언제나 남보다 많이 갖는 것이 성공이요, 비싼 것일수록 좋은 것이자 옳은 것이라는 시장 자본주의적 가치를 나타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통해 그것이 거짓임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것을 무효화하는 운동입니다. 세이비어교회의 매일의 묵상 주제가 돈인 것은 그들이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와 삶이 돈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출발점이며 우선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유가 하느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필요에 따라 하느님나라 사업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내어 놓겠다"는 선서는 단순히 소유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의 것으로 드린다는 헌신의 공표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다면 150명이 아니라 단지 몇 명이 모인다고 해도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든 코스비 목사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의 중심주제는 이것입니다: 예수가 시대들 속에서 그의 지상의 삶을 따르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의도하셨을까? 21세기에, 지구적인 가난을 제거하고, 탐욕과 공포와 인종주의와 군사주의의 마귀들을 몰아내며, 우리가 인간이 되는 과업을 이루도록 도와주도록, 지금 우리를 사용하시라고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준비된다면, 하나님은 준비된 것보다 더 많이 하십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와 세이비어교회는 소유의 포기와 헌신이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그것이 복음이 주는 자유임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오래 전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세이비어교회 개척자 고든 코스비 목사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너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5)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부유한 자리 잡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은 순종적인 들음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삶을 그의 집, 가족, 혹은 가족의 신들과 동일시하지 않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으로 나그네가 되었으며, 낯설고 적대적인 환경에 유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부르셨지만, 아직 그 약속의 확증을 보여주시지는 않은 그분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시도록 내어 드렸습니다.

아브람은 늘 부자였습니다. 사실 그의 소유는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이후에 도리어 늘어났습니다.(창12:16) 창세기 13장 2절은 "아브람에게 가족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또 아브람의 조카 롯도 부유했습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으며 이 때문에 아브람의 목자와 롯의 목자 사이에는 다툼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부유했습니다. 아브람에게 롯과의 친족관계는 소유를 주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습니다.(13:8)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조카가 어디에 머물지 먼저 결정하게 했습니다. 롯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 동산" 같은 지역을 선택해 그곳에 거주했습니다.(13:10) 아브람은 친족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부유해지기를 거절했고, 네 왕의 침략으로 빼앗긴 재물과 양식을 되찾아 주고 나서도 소돔 왕에게서 물품을 받아 부유해지기를 거부했습니다.(14:1이하)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14:24)

아브라함의 신앙을 결정적으로 시험한 것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22:1이하)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독자"(22:2)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삭은 육체를 따라서 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약속을 따라서 난" 아들이었습니다.(롬9:7-8)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생명의 선물이었으며 아브라함 자신의 능력이 죽은 것과 같았고 그 아내의 태가 "죽은 것"과 같이 멈추었을 때 주신 선물이었습니다.(롬4:19)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 그의 가장 귀중한 소유를 돌려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삭의 삶을 매 순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기꺼이 드린 그의 행위는 가장 고상하며 순수한 형태의 순종과 신뢰 행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자신의 계획만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또한 포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소유물과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소유물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니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을 것이니라."(히11:17-19)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위해서 그의 가장 소중한 소유라 할지라도 내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린 것입니다.(약2:23)

소유의 포기와 예수님 따르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도 보았듯이 소유를 포기하는 것은 단순히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자기를 부인하는 가장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실천입니다. 우리의 소유는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소유로 드러나는 정체성은 우리의 참 자아가 아니라 거짓 자아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의 거짓 자아를 버리고 참 자아로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그렇게 참 자아를 되찾은 사람들의 예수 따르기 운동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낳는 가장 중요한 열매는 그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인 힘 안에 뿌리내리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대상을 조작함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창조하거나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두려움이나 거리낌으로 소유를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거나 우리의 가치를 소유로부터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고 사용하지만 그것에 종속되거나 중독되지 않습니다. 소유 가능한 대상을 통해서 삶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우상숭배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된 자아는 자신을 소유와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세이비어교회와 교인들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소유의 포기와 예수님 따르기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귀중한 본보기입니다. 또 코스비 목사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준비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일하심을 보여주는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고 사람들이 많아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만 명이 아니라 150명의 헌신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세이비어교회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는, 사도 바울의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고백이 그들을 통해 이 시대에 울려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친구라고 불러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소유의 포기와 예수님 따르기는 성경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속의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세이비어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를 통해서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