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선교란 무엇일까?
건강한 선교란 무엇일까?
  • 김동문
  • 승인 2017.04.11 0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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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선교 참여 지수는 선교사에게 얼마나 꾸준하게 빠뜨리지 않고 재정 후원을 했는가에 주목한다. 한국교회의 해외 타문화권 선교 후원은 선교사와 선교 사역에 대한 후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아니 이것이 선교후원의 당연한 모습 아니냐고 반문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당연한 확신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많은 경우 우리들의 선교후원은 선교사와 후원자후원교회-파송교회 포함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선교의 궁극적인 것은 타문화권 사람들이다. 그들도 하나님나라 복음을 듣는 것이다. 그것을위해 선교사도 후원자도 존재하는 것이다. 즉 선교사나 후원자 모두는 하나님나라 복음 확장의 주역이 아닌 통로이며 도구라는 것이다.

선교사는 통로

적지 않은 경우 선교사의 뒷 배경 또는 사역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현지인들이 있다. 주인공은 선교사이고, 그들은 선교사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비춰지는 것이다. 선교지 주민들이 주인공이 된다면 어떻게 이야기와 화면 구성이 바뀔까? 해외 타문화권 선교사는 끊임없이 자신이 섬기는 이들과 자신의 사역을 후원하는 이들 사이의 간극을 메꿔주는 수고를 하여야 한다. 선교사 자신은 이 둘 사이를 가깝게 만들어주는 도움이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주인공이 아니라 바람잡이 같은 존재이다. 궁극적으로는 후원자와 선교지 주민 사이에 직접적인 다양한 형태의 직접적인 교류가 있도록 한시적으로 다리 역할을 하는 존재인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 한 기독교인 -> 교회 -> 선교단체 -> 선교사 -> (선교지) 주민의 흐름이, 한 기독교인 -> 한 비기독교인의 만남으로 발전해야 한다. 중간 단계에서 교회, 선교단체, 선교사는 '통로'여야 한다. 징검다리여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니면 공적으로, 어떤 나라나 다른 지역을 방문할 때면, 그 지역과 나라에 사는 아랍인이나 무슬림에 대한 궁금함이 앞서곤 한다. 내가 머무는 동안, 내가 만나는 이들과 교회, 단체가, 그곳에 있는 아랍인이나 무슬림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돕고, 가능하면,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기도 한다. 이것은 내가 아랍 이슬람권에 사는 동안에도 계속 그렇게 했던 삶의 버릇이다. 내가 머무는 나라 안에서의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심이 많았고, 그 나라밖에 사는 그 나라 주민들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도 궁금함이 많았다.

최근에도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달라스, 버지니아 지역의 아랍 이민자들과 무슬림 공동체를 그곳에서 사역하는 한인 기독교인과 사역자들과 찾았다. 음식을 먹고, 이슬람 사원을 방문하고, 무슬림 이민자와 이맘을 만나서 교제도 했다. 만남이 없이는 서로를 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선교사는 만남을 가로막고 있는 많은 부정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무너뜨리는 존재이다. “내가 살아봤는데 말이죠, 저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사람들이니 조심하여야 해요” 하는 말보다, “한 번 만나보시겠어요?” 격려하고 응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막힌 통로

후원자가 선교지 주민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지고 인격적이 되도록 돕기 위해, 끊임없이 현장 보고, 현장의 주민들의 형편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그래서 선교사 자신을 후원하는 후원자의 후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선교지 주민에 대한 이해가 더 자라가도록 도와야 한다. 선교후원의 성공 여부는, 후원자가 그 선교지와 그 주민들의 일상과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특정 선교지, 특정 선교사를 5년, 10년을 후원했어도, 선교사에 대해서는 알지 몰라도, 그 나라 그 주민들에 대한 상식과 이해는 자라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것은 문제이다. 선교사와 후원자 모두의 문제이다.

후원자가 선교사가 전해주는 기도 제목 외에는 그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수 없다면 아쉽다. 내가, 내가 속한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지에 대해 얼마나 알아가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연말이 되면, 연초와 비교해서 어떻게 그 이해의 폭과 넓이, 깊이가 자라갔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선교 후원’이라는 활동을 한 것일 뿐이다. 선교는 살아 있는 존재와의 사귐과 나눔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어떤 선교사들에 대해 아쉬움을 갖는다. 자신이 섬긴다는 그 주민들에 대해 더 앞장서서 미움과 증오심을 조장하는 이들에 대한 불편함을 느낀다. 선교사가, 다른 이들이 그 주민들에 대해 먼저 비난을 하여도 끝까지 품고자, 이해를 시키고자 애를 써야하는 것인데, 먼저 앞장서서 그들을 악평하고 비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사회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선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너무 멀리 가는 것일지 모르지만, 소돔과 고모라 백성을 대변하는 아브라함이나 반역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내려는 모세,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나님과 담판을 짓고자 하는 바울의 모습이 떠오른다.

몇 가지 제안

이런 것을 제안해보고 싶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종종 실천했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사는 곳에는 어떤 외국인 이주자들이 사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내가 속한 교회가 후원하는 해외 타문화권 선교지 주민들은 한국에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지 않은가? 관련 자료는 관심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그곳을 확인하면 한 번 개인, 단체로 방문해보라. 그리고 그 이민자들, 이주자들의 일상에 대해 직접 보고, 듣고, 말해 보라. 이 만남에서 생기는 또 다른 궁금함을, 그 나라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에게 물어보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배려하면 좋을는지를 물어보라. 그리고 혹시라도 후원 선교사가 한국이나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방문한다면, 그와 더불어 그 장소를 찾아보고, 구체적인 도움과 지혜를 구하라.

선교는 특정 땅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이뤄진다. 그런 까닭에 어떤 나라 주민들을 그 나라 밖에서 만나도 그 만남의 자리가 사역의 현장인 것이다. 후원하는 선교사나 단체에 조금은 도발적인 요청을 해보라. 당신이 살고 있는 나라와 지역에 머물고 있는, 그 나라 출신 이주자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청하라. 그리고 어떻게 이해하고 섬길 수 있는지 조금은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라.

그러나 이런 제안을 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판에 박힌, 인터넷에서 챙길 수 있는 그런 정보 외에는 현지에 대한 이해를 달리 갖고 있지 않은 선교사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내가 속한 교회와 공동체의 선교 후원의 건강 정도는 얼마나 될까? 내가 그 나라의 주민들에 대해 어떻게 이해가 깊어졌는지, 내 곁에 이웃으로 와있는 그 나라 출신 이주자들에 대해 얼마나 더 친근해졌는지에 의해 평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선교후원은 타문화권 사람들의 일상과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에게 내 마음이 주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도 선교후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현지인에 대한 무관심이 여전하고 타인종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태도가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우리의 선교, 건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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