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수녀와 결혼해서 잘 살았을까?
루터는 수녀와 결혼해서 잘 살았을까?
  • 심자득
  • 승인 2017.04.12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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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강연 “루터 씨, 낄끼빠빠 – 유쾌한 여성들의 교회개혁 뒤집어 보기",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백소영박사 초청강연

"루터는 수녀와 결혼해서 잘 살았을까?"

잘 살았다. 루터는 거룩한 직업으로서의 성직 수행을 위해 ‘독신 서약’을 종용하던 중세 가톨릭에 대항하여, 결혼을 신적 ‘소명’으로 해석하고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해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했다. 여성을 “똥자루” “욕정덩어리” “신앙적으로 열등한 존재” 라고 부르며 ‘열등’의 기호로 여겼던 전통적 사고방식에 종언을 고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루터가 여자, 결혼, 가정에 ‘관하여’ 한 이런 이해는 전 유럽으로, 미국으로 그리고 한국에 까지 개신교의 동선을 따라 세계에 퍼져 나가 지금까지도 교회 강단에서 “남편에게 맞추어 나간다면, 그런 아내는 ‘완전한 남자’를 만드는 ‘완전한 여자’가 될 것”이라고 울려 퍼지게 할 정도로 신실한 여신도들에게 신앙적, 윤리적 규범이 되고 있다.

그러나 루터는 그 이전의 강한 가부장제(Strong Patriarchy)에 비하면 혁명적이었지만 여전히 가부장제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루터씨, 낄끼빠빠!

교회개혁 500주년을 맞아하는 올해,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원장 김명현)은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여학생회 등과 공동주최로 <공개강연・워크숍 “루터 씨, 낄끼빠빠 – 유쾌한 여성들의 교회개혁 뒤집어 보기">를 3회에 걸쳐 열고 역사에서 잊혀져버린 여성과 교회개혁 이야기를 되살려내며 교회 구성원의 60% 가까운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주체가 되는 시대를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앞서 3월 23일에 하희정 박사를 초청해 교회개혁이 단순히 교회만의 개혁이 아니라 시민사회를 열어낸 사회개혁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공개강연을 가졌고, 3월 30일 신익상 박사를 초청해서는 루터 교회개혁의 중심 주제였던 3개의 sola가 교회현장에서 어떤 의미인지, 이것이 자본주의, 나아가 자본주의화 된 교회에 어떤 비판적 의미가 있는지를 돌아보며 남성성으로 정체된 휴머니즘을 넘어서기 위한 여성 담론을 폭넓게 살폈다.

11일 오후 감신대에서 있었던 세 번째 공개강연은 백소영 박사(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기독교사회윤리학)를 초청해 교회개혁 과정과 오늘날 교회에서 정형화・이상화된 젊은 여성, 기혼여성에 대한 모델을 해체하고 돌봄 노동에 대한 공동체적 가치를 모색하는 시간이었다.

백소영 교수(사진:<당당뉴스>)

개신교 여성 이해와 가정, 결혼에 관한 담론은 ‘혁명적’이었나?

백소영 교수는 당시의 여성인식을 루터가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를 소개하면서 ‘에제르 케네그도(ezer kenegdo)’의 개념을 먼저 설명했다. 창세기에서 “돕는 배필”로 흔히 번역되는 이 히브리어는 내조자나 보조자라는 의미가 아니고 “사랑의 관계 안에서 곁에 서서 동등하게 마주보고 응시하며 도움을 주는 짝”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중세의 교회개혁 과정과 오늘날의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지어 왔는지는 이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 억압적으로 대할 수도 있었고 동등한 대상으로 대할 수도 있었다.

루터는 결혼을 신적 ‘소명’으로 해석하는 글들로 수많은 수녀들을 수녀원에서 탈출시키며 여성을 ‘열등’의 기호로 여겼던 전통적 사고방식에 종언을 고한 ‘새로운’ 응시와 담론을 내놨다.

그간 남자를 원죄로 몰아간 악마적 존재로 비난받거나(테르툴리아누스) 재생산을 위한 수동적 도구로 간주되던(아우구스티누스) 여성을 ‘무려’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창세기의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가 이때만큼 중요하게 강조된 적이 또 있었던가! 개신교 목회자들과 개혁 신앙을 옹호하는 이들이 여자는 “필요악이 아니라 필요선”(존 코튼)이라고, 아내는 “방해물이 아니라 돕는 배필”(로버트 클리버)이라고, “당신만을 사랑하는 신실한 친구”요 “당신의 영혼에 힘을 주는 조력자”(리처드 백스터)라고, “하나님의 선물”(헨리 스미스)이라고 ‘격찬’했다. 루터 역시 전직 수녀 출신인 아내 카타리나를 “박사님” “비텐베르그의 샛별”이라고 칭할 만큼 존중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백교수는 “그러나 이 역시 온건하기는 하지만 가부장제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루터의 ‘소명으로서의 결혼’ 이해는 “여성을 조력자 정도로 이해한 것이며 여성으로 하여금 ‘주체’로서 자기 스스로를 규정할 권위와 장이 주어져 있지 않은 체 전업주부의 역할에 신앙적 정당성을 부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루터가 아내가 차려주는 식탁에서 ‘신적 담론’을 논한 내용을 묶은 책 『탁상담화』에서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나 기능적으로는 분명한 위계가 있어야 한다”면서 “아내는 남편을 따라가야지 남편이 아내를 따라가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말한 점에 대해서도 백교수는 “남편들이 바깥일에 전념할 동안 집안을 책임지고 아이들을 근대 시민으로, 경건한 신자로 길러낼 파트너’정도의 여성이해 일뿐 ‘주체’로서 자기 스스로를 규정할 권위와 장이 주어져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창조성과 자유의지를 가진 생명체인 인간이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돕는 배필(ezer kenegdo)’이라는 단어의 그 도움(ezer)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그동안 ‘가부장적’ 남성들(성서저자들을 포함하여)의 편견과 오해가 위계적 존재론을 정당화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백교수는 루터보다 진일보한 여성관을 지녔던 마태우스 젤 목사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 쉬츠 젤의 삶을 소개했다. 카타리나 쉬츠 젤은 스트라스부르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아버지로부터 경영을 배웠고 루터보다 2년 앞서 전직 사제와 결혼했다.

카타리나 쉬츠 젤은 목사인 남편처럼 글을 쓰고 설교를 하며 남편과 평등한 목회를 수행했다. 그래서 당시 개신교 지도자들 조차 남편 마태우스 젤에게 “제발, 네 아내를 입 다물게 만들어라.”고 했지만 남편은 아내를 끝까지 지지했다고 한다.

백교수는 카타리나의 이런 남편에 대해 “그는 진정으로 아내를 ‘마주본’ 남편”이라고 추켜 세웠다. “창조된 바대로 아내의 독특한 재능과, 자신이 소명으로 여기는 영역의 활동을 인정하고 지지해준 파트너이자 진정한 개혁가요 혁명가”이자 “효율성을 위한 성별노동분업이 아닌, 진정으로 마주보며 서로를 건설해간 이상적인 짝”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에제르 케네그도(ezer kenegdo), 마주봄이 일으키는 관계적 혁명

그렇다면, 어떤 마주봄이 ‘나의 자유’를 가로막지 않되 ‘너의 의미’도 건설하는 ‘우리의 답’을 찾게 할까?

백교수는 마주봄에 대해, 그리고 마주봄이 일으키는 혁명에 대해 가장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라면서 카터 헤이워드(Carter Heyward) 라는 여성조직신학자가 했던 말을 소개했다.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너는 내꺼야’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너는 너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야. 사랑한다는 것은 너의 권리를 옹호해 주고 너의 공간을 확보해 주고 너를 너 되게 하는 거야. 너랑 싸우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의 힘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너랑 함께 손잡고 싸워 나가는 거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냐면 ‘혁명이여 시작되게 하라’는 뜻이야.”

 

귀족이 통치하는 전통 사회(Aristocracy)는 이미 지났고, 관료들이 통치하는 근현대 사회(Bureaucracy)도 이미 후기 상태에서 백교수는 사회학자들의 말을 빌려 “이제 다가오는 사회는 ‘재능’이 통치하는 사회(meritocracy), 즉 각자의 전문성으로 서로를 돕고 건설하는 유동적, 유기적 사회”를 제시했다.

이어 “진정한 마주봄의 혁명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결혼한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면서 “서로 다른 너와 내가 존재하는 공동체”로 발전시킬 것을 촉구했다. 이는 성서가 말하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롬8:28)” 방법이며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워크숍 “호모 사피엔스, 다시 상상하다”

백교수의 강연이 끝나고 강연내용을 토대로 한 참여자들의 웍샵이 이어졌다. 참여자들을 나이대로 구분해 여성, 결혼, 가정에 대해 교회와 사회가 가졌던 기존의 인식을 돌아보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제도화 시켜 나갈 수 있을지를 토론하여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웍샵 참여자중 60~70대는 “교회는 여성이 수적으로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목회자중심, 남성장로중심으로 운영되고 여성은 교회내 봉사자 정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면서 “남편이 설거지 등의 가사를 분담해주는 정도의 마주봄이 아니라 의사가 소통되고 지향점을 같이 볼 수 있어야 할 것”을 지적했다.이들은 구세군 사관의 경우 ‘사모’가 같이 남편과 함께 안수 받고 같이 진급해 가는 제도를 양성평등의 주요 사례로 소개하기도 했다.

40~50년대 참여자들도 남성 주도의 교회운영을 지적하고 공평한 역할을 위해 △성역할이 평등하지 않은 장로 및 임원 성비를 남녀 50:50으로 교환하여 경험해 보거나 △성경에서 남녀의 역할을 바꿔서 읽어보기 등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혹여 일할 수 있는 여성이 없다는 현실론에 부딪히게 되는 경우 여성리더십을 신장시키는 교육이 필요하고 참여율을 높이기 육아돌봄센터 운영과 ‘성인지예산’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20-30년 세대들은 △주방 일을 여선교회가 전담하는 문화를 없앨 것 △10대와 20대의 고민과 관련하여 연애경험 등을 사역자들이 상담할 때 성경에 기대어 원론적인 해답만 들려주려 하지 말고 보다 현실적인 해답을 제시해 줄 것 △교회내에서도 여성피임문제 등 성교육을 실시할 것 △청년들에게 연애, 결혼을 강요하지 말 것 등을 제안했다.

재능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교회와 사회

이에 대해 백교수는 사제와 장로가 권한을 독점하는 전근대적인 제도가 교회에 존재함에 공감을 표하며 “교회가 이러한 전근대적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이 우선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극복 방안으로 계급혁명적 방법이 아니라 상하의 위계적 교회나 사회질서가 중간지점에서 만나는 평등한 구조를 만들어 갈 것과 신민질서 구조에 쉽게 순응하는 여성들을 깨워주는 교육을 계속적으로 해 나갈 것을 제시했다.

아울러 “생물학적 ‘엄마’가 아닌 기존의 정서적 부분, 돌봄의 능력이 있는 ‘엄마’의 역할”을 통해 “성역할에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고 양성평등적이며 서로를 억압하지 않는 제도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자”고 독려했다.

그래서 사람이 성이나 인종, 나라, 빈부의 구별 없이, 요담의 우화에서 보듯 감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서로 나무의 왕이 되려하지 않고 자신의 열매가 공동체에 가장 좋은 것이라는 자각과 소명을 가지는 사회, 각자에게 부여된 탤런트(=카리스마)가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재능이 통치하는 사회(Meritocracy)가 곧 하나님의 나라임을 깨닫고 새로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자고 했다.

"하나님이 고유하게 지으신 인간인 나, 그리고 너의 재능이 건설될 수 있도록 서로 도움(ezer)을 주기 위해 마주한 존재, 이는 비단 부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재론적 능력이요 이 땅에 새로움을 가져올 가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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