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자는 예배의 구경꾼이 아닙니다.
예배자는 예배의 구경꾼이 아닙니다.
  • 김동문
  • 승인 2017.04.1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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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장 1절부터 9절로 설교하기

우리들은, 바른 예배,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삶으로 드리는 예배 등 예배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들의 공동체는 예배에 대한 다양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예배함 또는 예배드림에 있어서 주체가 되지 못하고, 구경꾼으로 자리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관객평가단이 되어 예배를 평가하고, 설교를 평가하기에 익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배의 주체가 목회자나 설교자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설교자나 목회자는 자신이 예배드림의 주체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청중 또는 교인들은 단순하게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무엇일까요? 특별히 예배드림에 있어서 목회자와 성도들의 역할은 각각 무엇일까요? 누가 예배드림에 있어서 더욱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이런 궁금함을 갖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면 좋겠습니다. 조금 시대적인 거리감이 있지만, 구약 시대에는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오늘날은 우리의 삶으로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배’라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제물 드림의 현장을 우리가 바로 이해한다면, 바른 의미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게되고, 오늘날 우리의 예배드림을 돌아볼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 성경 속으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성경 말씀은 레위기 1장 1절부터 9절입니다. 레위기 성경 본문, 부담스럽지요? 구약 성경 본문도 설교에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레위기 본문은 설교 주제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본문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 통독을 시작했다가도 중간에 포기하게 만드는 본문이 되어버린 레위기. 이렇게 레위기가 소홀하게 취급되는 것은 레위기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에도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레위기만큼 예배에 대하여 깊이 있는 통찰력을 안겨주는 본문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지 않다고요?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대감을 갖고 오늘 본문 속으로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1) 성경 분문 자세히 보기 : 레위기 1:1-9절

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너희(이스라엘 자손)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이스라엘 자손 중에 누구)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이스라엘 자손 중에 누구)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이스라엘 자손 중에 누구)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이스라엘 자손 중에 누구)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 그(이스라엘 자손 중에 누구)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 (이스라엘 자손 중에 누구는)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오늘 성경 본문은 번제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번제’는 제단에서 희생제물을 완전하게 불로 태워 그 연기를 올리는 제사의 한 형태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얼핏 연설문 같기도 하지만, 대화록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대화 속의 또 다른 작은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1~9절까지를 눈으로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구조를 살펴보면, 2절 하반절부터 9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해달라고 지시하신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2절부터 4절은, ‘제물의 종류와 제물을 바치는 태도, 그 효과’를, 5절부터 9절은, ‘제물을 드리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은, 가축 중에서 소나 양, 보다 구체적으로는 흠 없는 수컷을 드리도록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태도로 제물을 바치도록 되어 있는지, 3가지 강조점이 나옵니다.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회막은 성막, 광야 성전으로, 이후에는 건물 성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4절에 따르면, 제물 드림의 효과가 무엇인지를 소개합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로 인하여 그 제물 드리는 자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제 5절부터 9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제물을 드리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장면에 어떤 이들이 등장하고 있나요? 제물드리는 이와 제사장입니다. 출애굽 당시의 제사장은 아론의 자손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것은 제물을 드리는 이의 주도로 이뤄집니다. 곁에서 제사장이 이를 보좌하는 형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성경 본문 다시 읽기

본문 속의 등장인물은 모세와 하나님이십니다. 전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듣고 반응하는 이는 모세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하여야 하는 것 가운데는 5절부터 9절까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모세, 두 분이 나누고 있는 말씀 주제는 제물드림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이야기 안에 두 주체가 나옵니다. ‘제물드리는 이’와 ‘제사장’입니다. 

한 번 더 동물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연상해봅니다. 제사장과 제물드리는 이의 역할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레위기 본문은 주거니 받거니 문답식으로 다시 구성할 수 있습니다.저의 오른편 분들은 제사 드리는 어떤 분이 되어서 관련 분문을 읽어주시고, 왼쪽 분들은 제사장의 역할을 따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분위기로 접근해봅니다.

5 그(이스라엘 자손 중에 누구)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 그(이스라엘 자손 중에 누구)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 (이스라엘 자손 중에 누구는)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이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물드림의 현장을 느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사장과 제물드리는 이의 역할에 주목하여 봅니다. 어떻게 보면 제사장들은 제물드리는 이를 돕는, 마무리 역할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마치 설과 추석의 한국 전통 제례나 고사 같은 의식에서 제주와 제주 옆에서 돕는 손길의 역할 분담 같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제사장들은 도움이 역할이고 제사드림의 주체는 제물드림이라는 것을 오늘 성경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제물드리는 이들 사이의 이런 역할 분담은, 제사 방법과 태도를 소개하는 레위기 4장까지 이어집니다. 다양한 제물의 다양한 형태와 종류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원칙 역할 분담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구경꾼이 아닌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사장과 제사드리는 자의 긴밀한 협력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그 때 그 자리로

출애굽 공동체가 처해있었던 삶의 자리는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출애굽이 한창 진행되던 출애굽 초기에 광야에서 이런 말씀을 나누신 것으로 보입니다. 출애굽에 참여한 이스라엘 자손들과 많은 다양한 민족들은 이집트에서 제사 드렸거나 제사에 참여했거나 제물 드리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의 제사는 어떠했을까요? 

1) 이집트에서의 제사의 주체는, 제사장이었을 뿐이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제물을 가져가는 것은 제사 참여자들의 몫이지만, 그것을 드리는 행위는 일종의 특권이었습니다. 당연히 제사장들의 몫이었습니다. 제물을 그들의 신에게 드려 신의 응답을 듣거나 그 능력을 힘입는 것, 그 신의 능력이나 신탁을 전달하는 것 모두는 제사장들의 특권이었습니다. 이런 선 경험이 있었던 출애굽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형태와 태도의 제물드림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출애굽 백성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적잖이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제사드리는 이집트인들이 늘 수동적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이런 새로운 제시 사항이 번거롭고 불편하기조차 했을지 모릅니다. 꼭 그래야만 하나 싶은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2) 예배자들을, 거룩한 제사장의 특권으로 이끕니다.
이집트에서는 일부 소수 특권층들만이 제사장의 특권을 누렸고, 거룩한 자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공동체 구성원 누구나 제사장이 될 수 있고, 거룩한 자가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실천, 실습의 현장이 제사드림의 형식과 태도를 통해서도 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부담이 아니라 새로운 권리, 특권이었습니다. 즉 제사드림은 부담이 아니라 은혜였던 것입니다. 제사드림의, 제물 바침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의 회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본문을 대하면서,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 말씀하신 출애굽기 19:6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것이 레위기 오늘 분문과 4장까지 이어지는 본문이, 그 때 그 자리에 살던 출애굽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무슨 영험한 능력을 가진 자로 취급되고, 그렇게 주장되고, 인식되었던 제사장을 먼저 떠올려보세요. 여러분들에게 그런 특권, 그것도 현세와 내세의 비밀과 권력을 가진 제사장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느껴지는지요? 설레임인가요? 거부감과 부담감 같은 것인가요? 교회 공동체에서 아니면 일터에서 어떤 중요한 직책과 책임을 맡았을 때 느꼈던 감정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긍심과 뿌듯함과 설레임과 같은 다양한 느낌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던 출애굽 백성들에게, 낯설음과 당혹감, 설레임과 기대감, 뿌듯함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3. 지금 이 자리로

우리의 예배 현장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많은 경우 예배 참여자들은 구경꾼으로 자리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 속의 출애굽 공동체가 이집트에서 경험해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배의 순서에 격식을 따라 일부의 사람들이 역할을 맡기도 하지만, 예배의 주체가 아닙니다. 게다가 대다수의 예배자들은 예배를 준비하고 드리고 나누는 것에서 주체가 되지를 못합니다. 누구의 책임일까요? 목회자나 성도들 모두의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목회자 중심의 예배도 아쉬움이 있고, 예배드려주는 이들 같은, 의무적으로 예배에 출석하는 예배자들의 모습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민제사장을 말하지만, 우리들의 생각과 삶의 태도나 예배자로서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모두가 주체가 되어, 예배자로 서로 서며,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드림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몇 가지를 함께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1) 주체적인 예배자로 서기
첫 번째로는, 주체적인 예배자로서의 특권을 빼앗기기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주체적인 예배자인가요? 서로가 주체적인 예배자로 서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배 순서를 구성하고 예배를 진행하고,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서로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찬양 드림도, 회중 기도도 새로워져야할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설교자도 변해야 합니다. 설교자, 목회자가 모든 것에 능통한 자인 것으로 착각하거나, 설교자나 목회자는, 예배드림에 있어서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즉 ‘애정남’ 같은 역할을 언제나 맡을 수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설교자도 예배자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2) 묻혀가는 예배자 벗어나기
둘째로는, 예배드림의 주체는 나 자신입니다. 목회자의 어떤 힘을 빌려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의 기도만을 힘입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그래야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체로 서고, 능동적으로 예배드림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출애굽 공동체의 새로운 변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의 믿음에 묻어가는 신앙생활을 넘어서야 합니다. 내가 왕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삶으로 제사드림, 예배드림에 있어서, 서툴거나 익숙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옆에서 돕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제사장들처럼, 영원한 대제사장되신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는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산제사 즉 삶의 예배가 완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삶으로 예배드리는 예배자로 서기
세 번째로는, 공동체의 고백과 마음과 삶의 자리를 담아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듣는 자로 목회자와 성도가 자리매김 되어야 합니다. 역할의 차이일 뿐 이것이 신분상의 차별이 아닌 것을 서로 존중해줘야 합니다.

설교자가 전하는 메시지도 이런 면에서, 공동체의 삶의 자리가 담겨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설교의 주제도 교회 공동체의 삶의 정황이 담겨야 할 것 같습니다. 예배 드림에 있어서,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어떨까요? 최소한 한 주 전에는 예배에서 함께 나눌 말씀 본문을 공개하고, 한 주간의 삶 속에서 미리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될 때 좋은 이야기나 교훈, 덕담을 주고받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한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기도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메시지가 공허한 메아리 또는 직적 유희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맺는 말씀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레위기 본문을 통해 우리들은 새롭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음을 다시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예배자입니다. 청중이 아니라 주체입니다. 우리를 거룩한 존재,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을 감사하고 싶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때로는 예배를 돕는 자로, 때로는 예배를 이끄는 자로 존재할 수는 있지만, 모두가 함께 예배에 나아가는 이들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로, 하나님과 만나는 자로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교회 공동체의 고백의 자리, 예배의 자리에서 주체로 설 수 있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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