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러려고 목사가 되었나?'
'정말 이러려고 목사가 되었나?'
  • 최태선
  • 승인 2017.04.22 04: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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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사본만 있고 원본이 없습니다. 신학교 시절, 성서의 원본이 있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우상 숭배할 것이기 때문에 원본이 없는 것이 오히려 섭리이며 은혜라고 배웠습니다. 실제로 모세의 구리 뱀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은 뱀에 물린 사람들이 쳐다보기만 하면 나았던 모세의 구리 뱀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서도 우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상이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우리가 하나님보다 우선시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단 돈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돈과 같이 다 알고 있는 대상의 경우도 그것이 자신의 우상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신은 돈을 하나님보다 우선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하나님은 허명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실은 역으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돈은 강력하게 자신의 삶에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강력하게 자신의 삶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돈을 많이 벌면 매우 기뻐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는 그만한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명백하게 드러나도 사람이 그러한 사실을 보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우상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안전하게 자리하게 됩니다. 실제로 우상은 우리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금과옥조로 여기는 대부분의 것들이 우상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이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교리나 신조와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바른 신앙의 삶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은밀하게 자신의 무의식 속에 안전하게 자리하고 있는 우상을 발견해내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어떤 우상들이 숨어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숨어 있는 우상 가운데 하나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우상이 된 교회

며칠 전에는 시골의 한 교회 부목사가 된 대학후배를 찾았습니다. 그는 웃으며 자신이 사찰집사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에게는 '정말 이러려고 목사가 되었나?'라는 자괴감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일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교회는 벗을 수 없는 굴레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를 보며 사울 왕 치하의 이스라엘이 생각납니다. 사울 왕에게 악한 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서 주님의 영이 떠났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일까요, 악한 영의 백성일까요?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악한 영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왕을 요구한 순간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왕을 세우지 말라고 간곡하게 만류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인간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순간 이스라엘은 잘린 가지와 같이 파랗게 살아 있는 것 같았지만 죽은 것입니다. 사울 왕은 이해를 위해 예를 든 것뿐입니다.

새 이스라엘이 된 교회도 똑같이 이스라엘의 왕과 같은 목사를 세웠습니다. 물론 교회에 주어진 목사가 본래는 성령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제도가 되고, 섬기고 희생하는 자가 아니라 군림하고 다스리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목사는 교회의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목사에게서는 주님의 영이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번뇌하지만 악한 영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악한 영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과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사들은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목을 맵니다. 교회가 목사들에게 우상이 된 것입니다!!

목사가 아닌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자기 교회라는 우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큰 교회는 우월감을 가지고, 작은 교회는 생존에 허덕이느라 현실에 굴복합니다. 큰 교회건 작은 교회건 모든 성도들은 자기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 주일 성수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강도당한 이웃을 외면하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이 되어 긍휼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고르반'을 외치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교회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자기 교회를 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 교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을 자기 교회를 위해 살다 죽으며 평생 주님께 충성했다고 감사하며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충성할 뿐 그들 중 아무도 예수의 제자로 살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의 실상을 보게 해주는 분이 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예은이의 할머니 이 세자 장로님입니다.

"저는 50년 동안 감리회 한 교회만 섬겼어요. 그런데 사고 난 뒤 보니까 내가 한 게 신앙생활이라 할 것도 없더라고요. 신앙생활이 그저 내 중심으로, 내 새끼, 그냥 내 것만 생각하고 편리하게 살아온 거예요.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이 나를 보고 뭐라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나는 도무지 너를 모르겠다'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요."

구구절절이 옳은 말입니다. 아무나 장로가 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여성이 장로가 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장로가 되신 분이 자신에게 신앙생활이라 할 것도 없었다는 이 고백을 결코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가 우상이 되었다는 저의 다른 글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함부로 폄하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경고의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교회가 아니라 예배당이 우상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예배당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 못하고 우상이 되어 신앙생활이라 할 것도 없는 교회생활을 하게 하고 있는 이 엄연한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우선순위에서 앞서는 모든 것,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는 모든 것이 다 우상입니다. 지금 교회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모판

근본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인 형제와 자매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형제와 자매로 모여 사는 하나님의 가족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인 형제와 자매들의 모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소가 웃을 노릇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가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공동체성을 상실했습니다. 교회 안에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고, 자기의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다른 이의 불행과 어려움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상대방을 위한 교양이며 배려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느슨한 상조회나 교양 강좌를 하는 배움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은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일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고 명확합니다. 장 바니에는 우리가 그것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는 '라르쉬'라는 공동체의 창시자로 이 시대 공동체의 교과서와 같은 <공동체>라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그는 공동체와 관련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공동체를 사랑하면 공동체가 사라진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면 공동체가 생겨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형제와 자매가 되어 서로 사랑한다면 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모여 참된 교회 공동체를 이룰 것을 믿으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공동체성을 상실한 이유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교회의 성도들이 형제와 자매들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방관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예배에 참석하여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며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축소되었습니다. 형제라는 말은 아예 직분이 없는 초신자들을 일컫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 공동체, 성령공동체, 하나님 나라인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느슨한 종교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복음을 살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복음은 형제와 자매들의 사랑과 관심 안에서만 제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살면 환란을 당하고 세상의 미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서 경제적으로 망하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의 지원이 필요하고, 공동체의 이해와 위로는 더더욱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는 복음의 모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산위에 있는 동네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볼 수 있는 동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밝히는 산위의 동네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 우리가 지금 두 발 딛고 선 이곳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주는 치열한 삶을 사는 곳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삶을 전혀 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지탄을 받을 정도로 이기적이고 욕심 사나운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사는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치부하며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폄하하고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를 위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정작 하나님 나라 방식의 삶은 시작한 적도 없고, 하나님이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에는 신경 써본 일조차 없으면서 죽자신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좋아라하는 것입니다. 게중에 하나님 나라에 관해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했다고 착각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가 아니라 오히려 가두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양식장 안의 물고기처럼 되어 교회 밖을 향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산위의 동네가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 복음은 간 곳이 없고 자기 교회에 갇혀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일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팔아 주인이 된 목사들이 가두리 안에 있는 물고기들을 마음대로 팔고 잡아먹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교회는 우상이 되었고, 자기 교회밖에 모르는 교인들이 배나 지옥자식이 되었습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많아져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자기 교회 안에 갇혀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빛이 되지 못하고 교회가 산위의 동네가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라는 높은 봉우리를 오르기 위한 전진기지입니다. 제자들은 준비가 끝나면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 그들의 지상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인들을 양육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험을 감행하도록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하고 공급하는 전진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상이 된 이삭을 바치듯이

지금은 이 땅의 교인들이 제 역할에서 벗어난 교회를 버릴 때입니다. 말 그대로 교회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과격한 말이나 신성모독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성서는 교회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아들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이삭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였습니다. 그에게서 난 자손들이 이스라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삭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체였고, 오늘날로 치면 교회였습니다. 그런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미래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미래도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겟세마네의 예수님보다 더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아케다(결박이라는 히브리어로 모리아 산 사건을 일컫는 말)'는 약속의 자손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만이 아니라 별같이 많은 후사를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새 이스라엘로 치면 교회를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이전에도 하갈에게서 난 첫 아들, 이스마엘에게 빠져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물경 13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키우는 즐거움에 빠져 하나님을 잊은 시간이었습니다. 성서는 그 기간 동안의 사건을 단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은 그 시간은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삭에 빠져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칼을 빼드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아들일지라도, 이스라엘의 미래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그것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는 이삭으로 인해 하나님을 잊고 지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열 번의 실패를 통해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 되심을 배웠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실 것으로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 사람들의 해석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후손이자 미래의 이스라엘인 이삭도 자신과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해 내리찍던 칼이 잘라낸 것은 이삭이 아니라 이삭이라는 우상이었습니다.

믿음의 결승전

오래 전 저는 '아케다'를 믿음의 결승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이며  이스라엘의 미래인 이삭이 믿음의 여정에서 버려야 할 마지막 우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포함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들이 우리가 넘어야 할 마지막 믿음의 봉우리일 수도 있습니니다. 아브라함에게 '아케다' 사건은 바로 그 마지막 우상을 잘라내는 처절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은 '아케다' 사건을 통해, 마지막 우상이었던 약속의 아들, 이삭을 잘라냄으로써  마침내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우상이 될 수 있고, 우상이 된 교회는 버려야 하고, 지금이 바로 그런 때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으로 이 땅의 교회들이 참된 제자공동체가 되어 빛으로 드러나는 산위의 동네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충정에서 하는 말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참된 교회는 복음의 모판이며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입니다. 우리가 우상이 된 교회를 잘라버리고 선물로 받은 교회를 이삭처럼 되돌려 받아 제대로 누리는 이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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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2017-04-25 23:31:31
자신과 속한 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죽자신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좋아라하는 것입니다."에서 '죽'이 잘 못 들어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