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너무 달랐던 안식의 의미
달라도 너무 달랐던 안식의 의미
  • 김동문
  • 승인 2017.04.2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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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케하시는 하나님의 노동을 만나다
아눈나키(Anunnaki)신과 그가 지은 인간 피조물. 인간은 신들을 쉬게 하기 위한 노동하는 존재로 지어졌다고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설명한다.

[미주뉴스앤조이=김동문 편집위원] 한국교회 안팎에는 과도한 노동, 쉼 없는 수고를 당연시하는 문화가 있다. 교회, 하나님을 앞세운 영역에는 쉼, 안식을 말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또는 헌신되지 않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것은 사람다움과 쉼(안식)에 대한 가치관이 드러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그때 그 자리에 살던 이들과 그들의 삶의 한복판에서, 그들의 언어로, 서로 반응하면서 소통하였다. 창세기 속 그 대화 현장으로 다가서 본다. 그 현장에서 그들이 느꼈을 인간의 존재이유와 안식을 다시 생각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문명 속에 살던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았을까? 창세기의 인간 창조와 안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간 창조와 안식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사람들과 이집트 나일 문명권의 거주자들이 이해하고 있던 인간 창조의 과정과 그 목적, 안식에 대해 어떤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안식’, 규칙적인 안식에 대한 개념이 존재했을까? 있었다면 그 안식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을 수 있는, 안식을 빼앗긴 상태를 형벌 또는 인간의 실존으로 묘사하는 것 같은 창세기 구절들은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을 향한 축복 언약은 이 안식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그 궁금함을 안고서 고대 근동 세계로 들어 가본다.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로는 가장 대표적으로 1849년 Austen Henry Layard 가 발견한 에누마 엘리쉬를 들 수 있다. 이 토판의 초기 기록은 기원전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 6번째 토판 중에는 다음과 같은 인간창조 관련 이야기가 등장한다.

1. 사람 창조 목적

"마르둑(Marduk)은 신들의 말을 들었다. 그는 지혜로운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 그는 입을 열어 에아(Ea)에게 말했다. 그가 마음에 가진 계획을 그와 상의했다. “제가 핏줄을 묶어서 뼈를 만들 것입니다. 제가 Lullû를 만들 것이고, 그(amelu)의 이름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제가 사람(Lullû-amelu)을 만들 것입니다. 사람에게 신들의 노역을 감당시키고, 그들로 쉬게 할 것입니다."

‘에누마 엘리쉬’에서 묘사하고 있는 인간 창조의 목적은 신들의 안식이다. 그리고 신들을 대리한 노동력 확보이다. 이런 비슷한 입장은 다른 창조서사에서도 발견한다. 1882년 Hormuzd Rassam가 고대 도시 십파르(Sippar, 현재 텔 아부 합바 tel Abu Habba)에서 발견한 기원전 6세기 신바벨로니아 제국 시대의 토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바벨론 창조서사가 담겨있다. 라쌈(1826~1910)는 이라크 북부 모술지역 출신이며, 십파르는 바그다드 남서쪽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신들이 기쁜 마음으로 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인간을 창조했다. 아루루(Aruru)는 그와 함께 인간의 씨를 창조하였다."

다시 에누마 엘리쉬를 살펴본다. 마르둑과 에아의 협력으로 인간이 그 목적대로 지어졌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들은 그(티아맛 : Tia-mat)를 묶고 에아 앞에 붙들어 세웠다. 그에게 처벌을 내려, 그의 피를 흘렸다. 그의 피로 그(에아)가 인류를 만들었다. 그는 그들에게 신들의 노역을 감당시켰고, 신들을 쉬게 했다. 지혜로운 에아가 인류를 만든 후에 신들은 그들의 노역을 그들에게 감당시켰다. 이 일은 생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누딤무드(Nudimmud)는 마르둑의 기교로 창조를 수행했다." 인간 창조 주체가 된 신에 대한 설명은 달라도 신의 멍에를 지우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동일한 입장의 다른 토판 기록도 있다. "그가 멍에를 질 수 있도록 사람(Luullaa)을 창조하라."

2. 사람의 운명은 그저 노동하는 쉼없는 삶

이런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 따르면 인간의 노역과 쉼없음은 지어진 운명이다. 결국 인간은 왕의 모습으로 하강한 신을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하는 운명을 갖고 있다는 나중 나중의 왕권신수설을 무조건 수용하여야 하는 또 다른 운명을 갖고 있었다. 이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안식 개념은 어떯게 자리잡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짚어보아야 한다. 누구를 위한, 어떤 형식과 내용을 갖춘 안식이었을까? 메소포타미아의 안식은 신과 왕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신과 왕을 경배하기 위하여 수고하여야 했다.

7번째 날은 마르둑 신, 자르파니트를 위한 축제일이었다. 14일, 19일, 21일, 28일도 동일한 의무가 주어졌다. 인간은 그 신을 기쁘게 하기위해 그를 경배하는 의무가 주어졌다. 왕의 경우도 왕복을 갈아입지 않으며, 병거를 타지 않으며, 제물을 바치지 않으며, 법적 결정을 하지 않으며, 고기를 삶지도 굽지도 않는 날이었다. “이 날은 악한 날이다. 위대한 백성들의 목자는 화덕의 숯불로 구운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안식 규정은 모든 백성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제한적인 규정이었다. 안식은 의무규정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특권이기도 했다.. 소수의 특별한 존재들의 일하는 것이 금지된 날을 위해 절대 다수의 평범한 이들은 여전히 수고하여야 하는 날, 그것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일상화된 쉬는 날의 풍경이었다.

3. 사람과 땅의 쉼, 아브라함의 축복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하여 사람과 땅의 쉼 그리고 아브라함의 언약과 축복의 이야기를 짚어보자. 창세기 저자가 그리고 있는 쉼의 보편화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 같은 존재들의 쉼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짚어보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특정 신과 왕 같은 특수 신분을 위해 절대 다수가 일을 하는 날이 안식이었던 것과 안식일에도 일하는 존재,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다는 그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노동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창세기 저자의 안식, 쉼에 대한 언급은 특별하다. 왕이나 신만이 누릴 수 있었던 그 안식의 의무가 모든 백성의 것이 되었다. 또한 뭇 백성의 안식을 위해 노동하는 신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언급된다. 안식에 관련한 하나님과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감은 창세기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들이 주목해야할 중심 어휘의 하나이다.

아브라함을 향한 축복에 등장하는 '복'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후손들이 밟는 땅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축복의 의미는 무엇일까? 땅은 신의 소유이며 국가와 왕의 소유라는 개념이 절대적이었던 그 시대에 땅을 갖는 다는 것, 그리고 그 땅의 주민들이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은 안식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 것일까?

4. 오늘 2017년, 안식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간은 신들의 쉼을 위해 일하는 노동인력, 노동하는 존재로서 지어졌다. 또한 안식은 신들과 왕과 그의 신하 같은 특수 신분을 위한 날이었다. 절대 다수가 그들의 쉼을 위해 일을 하는 날이 안식이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간 창조와 안식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여호와를 쉬게 하기 위한 노동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안식을 같이 누리는 존재로서 소개된다. 안식은 여호와의 안식을 공유하는 것이었고, 여호와의 창조와 완성을 누리는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인간들에게 부여된 안식일에도 일하는 존재감이 창세기에서는 여호와에게 입혀져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었다는 그 인간, 그 인간의 안식을 위해 하나님이 노동한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창세기 저자의 안식, 쉼에 대한 언급은 특별하다. 왕이나 신만이 누릴 수 있었던 그 안식의 의무가 모든 백성의 것이 되었다. 또한 뭇 백성의 안식을 위해 노동하는 신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언급된다. 안식에 관련한 하나님과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감은 창세기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들이 주목해야할 중심 어휘의 하나이다. 창세기 저자가 그리고 있는 쉼의 보편화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 같은 존재들의 쉼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창세기 저자는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4천 년 전 아브라함 시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 고대 이집트인들처럼 그렇게 쉼없이 노동하는 운명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식의 의미도 잘 모르고,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누리게 하는 '복'도 나누지도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우리의 안식은 어떤 자리에 있는가? 창세기 저자가 언급하는 안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른 아침부터 몸으로나 마음으로 교회당과 교인들을 떠나지 못한 채 예배와 집회와 모임을 이어가는 적지 않은 기독교인의 삶은 건강한 것일까?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두어야 할 것을 사람들이 하느라고 쉼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본다.

사실 출애굽기 20:8-11, 신명기 5:12-15에 소개하고 있는 안식일 규정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종교 행위조차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매우 특별하다. 여호와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영적인 쉼을 누리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제사(예배) 조차 강제하지 않았던 창세기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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