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물든 기독교
폭력에 물든 기독교
  • 최태선
  • 승인 2017.04.29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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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가장 큰 죄악

작금의 국정농단 사건을 보는 시각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식을 달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게 나라냐'는 피켓의 글로 그것을 표현하였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 다양한 시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도 일단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녀에게는 많은 잘못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악한 것, 가장 큰 죄악을 뽑는다면 그녀가 의도적으로 또한 습관적으로 국민들을 둘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녀의 무의식적인 이분법적인 사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폭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폭력적입니다. 이분법적인 사고에는 근본적으로 폭력이 내재하고 있지만 그것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화합과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자신의 업무와 역할을 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폭력을 조장하는 일에 몰두해온 것입니다. 그녀의 이분법적 사고가 그녀 자신도 모르게 우리 사회를 폭력이 난무하는 곳으로 만들고, 자신과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지옥으로 만든 것입니다.

폭력에 물든 기독교

어쩌면 그녀의 그런 사고를 뒷받침해주는 배경이 되어 준 것이 기독교인지도 모릅니다. 기독교, 그 가운데서도 개신교는 특히 배타적이고 폭력적이었습니다. 그 예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사찰 방화사건, 단군 상 목 자르기, 사찰 경내에 들어가 땅 밟기 기도하기, 방송사 점검 등등 수도 없이 많고 잊혀질만하면 반복되는 사건들입니다.

이러한 폭력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분법적인 사고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처럼 폭력적인 성향을 띠게 된 것은 기독교 내의 사고의 주류가 이분법적인 사고로 이루어져 있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현저한 것으로는 물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들 수 있습니다. 오늘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광장이나 지하철 등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 곁에는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엄청난 불통의 분위기와 함께 자신을 반대하는 누구와도 충돌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동성애 반대, 이슬람 포비아에서 나오는 할랄에 대한 반대, 천주교 이단 주장, "예수 성공, 불신 지옥"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들이 기독교 자체를 폭력에 물든 기독교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반드시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는 가정 하에 자신의 옳음을 위해 그른 상대방을 반드시 응징해야 합니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무언의 경멸이나 무시 등으로 상대방에게 정신적 폭력을 가하기 마련입니다. 폭력적이 될수록 자신의 옳음이 강화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폭력 역시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자신들의 폭력적인 태도가 비폭력 저항의 길을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방식과는 반대의 길이라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폭력을 행사하면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분법적 사고의 틀 안에 갇힌 사람은 세상의 평화와 하나님의 평화가 어떻게 다른지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스스로 세상의 평화의 방식을 자신의 방식으로 고착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우리는 성서에서도 그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진 대표적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얼핏 보면 예수님 자신이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는 분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기준으로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서 예수님의 선한 마음, 자비로운 마음, 사람을 살리시는 마음은 보지 못합니다. 오그라들었던 손이 펴져 기뻐할 그 사람의 마음은 더더욱 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보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안식일 준수라는 율법뿐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기 때문에 어떠한 병도 고쳐서는 안 된다는 완고한 시선으로 예수님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지켜봄에는 이미 폭력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다시 말해 이분법적인 사고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처럼 폭력을 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이것을 택했는데, 다른 사람이 저것을 택한다면 자신과 같지 않은 선택에 압력을 가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저것을 택한 사람을 흠잡고, 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기 마련입니다. 그가 선택한 것을 포기하고 그도 내가 택한 것을 택하도록 강요하여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나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폭력이 동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은 내 식으로 다른 사람을 종속시키는 것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존경과 사랑의 거리를 일방적으로 파괴하고 없애는 힘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폭거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힘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언제나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웃으면서 좋은 말로 폭력을 가할수도 있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폭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가할 수도 있고, 종교의 거룩함으로 폭력집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고쳐주시고, 살리시는 선한 일을 하셨지만 그들의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과 예수님 사이의 괴리를 제거할 폭력을 모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폭력에 의해 돌아가셨지만, 폭력을 가한 그들 역시 그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 보면 소외받은 자들은 항상 이런 폭력의 대상이었습니다. 병자라는 이유로, 소경이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약자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종교로부터 소외되어 고립당하는 폭력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상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러한 폭력을 정당화하였습니다. 소경인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고 살기가 어려운데 사람들은 그들은 그가 소경인 것이 누구의 탓인지를 질문합니다. 그 질문 자체에서 우리는 인간 깊이 내재한 끝없는 폭력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소경인 것은 조상 탓도, 그 소경 개인의 탓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가 위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소경을 바리새파 사람들의 폭력으로부터 구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폭력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처럼 인간을 폭력에서 구원하는 종교입니다.

엠마뉴엘 레비나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성찰하게 해주는 이가 바로 엠마뉴엘 레비나스입니다.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인입니다. 타자성의 윤리학을 말하는 그는 어릴 적부터 삶 자체가 타자적이었습니다. 서구철학에서 '타자'는 배척의 대상이었으며, 이방인, 경계, 주변인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학자였음에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일반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범학교에서 40여년을 가르쳤습니다. 점차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나중에는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엠마뉴엘 레비나스

레비나스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프랑스 국적을 획득하였고, 프랑스 군대에 입대한 후 포로로 잡혀 수용소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가족이 모두 수용소로 끌려가 죽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평생 왜 이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고민했고, 그것이 그의 철학 발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서구의 전통적인 철학은 '시선'을 중심으로 합니다. '시선'은 나 이외의 다른 것들을 대상으로 만듭니다. 레비나스의 '얼굴'이라는 개념은 서구 전통 철학의 이러한 '시선'에 반대해서 등장한 개념입니다. '시선'은 내가 주체가 되어 다른 이를 보는 것이지만, 레비나스는 타자가 보여주는 얼굴의 호소를 그 사람이 나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레비나스는 서구철학의 전통적인 존재론이 '타자의 타자성'을 무시한다고 지적합니다. 나아가 그러한 서구철학의 존재론은 전체성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사상적인 기반을 제공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분법적인 사고가 전통적인 서구철학의 존재론과 마찬가지로 '시선'을 가지고 타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상적인 기반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고는 필연적으로 전체성을 추구하면서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모든 타자들에게 폭력을 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은 우리에게 얼굴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얼굴이라는 말은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얼굴은 사물과 근본적으로 구별됩니다. 사물은 전체의 일부로, 또는 전체 속의 한 기능으로 의미가 있지만 얼굴은 그렇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랍과 책상다리로 이루어진 책상은 바라보지도, 호소하지도, 스스로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얼굴은 바라보고 호소하며 스스로 표현합니다. 

레비나스는 그냥 얼굴이 아니라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을 제시합니다. 그 얼굴에 '도덕적 호소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얼굴은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이 오히려 나의 주체성을 본연의 주체성으로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레비나스의 얼굴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관계적인 존재이며 도덕적인 책무를 가지며 그것이 인간을 주체성을 가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준다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타자가 근본적으로 내가 만든 틀 안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거기에 '무한'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율법이 신의 계시처럼 주어져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자의 입장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다가오면 그저 해석할 뿐이지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구철학에서는 개인이 타자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굴면서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타자는 신으로부터 오는 계시와 마찬가지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레비나스는 고통 받는 타자가 호소할 때, 그것을 신의 계시처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타자가 가지는 저항할 수 없는 무저항성입니다. 타자의 얼굴에서 오는 힘은 상처받을 가능성과 이 무저항성에 근거합니다. 상처받을 수 있고 외부적인 힘을 막아낼 수 없기에 그 얼굴에 도덕적인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보다 강한 타자가 명령함으로써 내가 고통 받는 누군가를 돕는다면 인간의 자유는 없어집니다. 하지만 내 자유가 유지되면서, 내가 나만을 위해 살겠다는 내 자유를 억누르고 사람을 돕는 쪽으로 나를 사용할 때 우리의 진짜 주체성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자를 레비나스처럼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가지는 폭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등을 이루는 새로운 사회를 목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떠받치는 것은 나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타인을 도덕적 명령을 요구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의 철학을 타자성의 윤리학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새사람'으로의 변화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의 말대로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데리다가 말했던 무조건적인 환대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또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서로 사랑하는 새계명과 우리가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의 의미를 새롭게 파악하고, 폭력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평화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려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폭력을 휘두르며 전체성을 향해 치닫는 사단의 하수인이 됩니다.  나아가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옳고 그름에 천착하는 것이 가인의 후예가 가지는 가장 현저한 특징이며, 그것리 원죄의 본질임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자신의 사고에 절대성을 부여하려는 '나'의 '시선'에서 벗어나 레비나스가 말하는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로 거듭날 것입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비참함과 직면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다. 그것은 동료들이 가져온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다. 그것은 세계를 건설하는 데 자기의 돌을 놓음으로써 이바지하고 있다는 느끼는 일이다."-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생텍쥐페리가 말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이 아닐까요? 그 일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진 막무가내인 폭력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레비나스의 말처럼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에 담겨 있는 명령과 무저항성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참된 기독교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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