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포퓰리즘과 교회의 금송아지
정치적 포퓰리즘과 교회의 금송아지
  • 이상명
  • 승인 2017.05.13 02:5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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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명 총장 / 미주장로회신학교

현대 정치판에서 자주 거론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다. 한국 시민들은 이번 대선을 치르면서 후보자간, 야당과 여당이 서로의 정책과 주장에 대해 주저 없이 예의 그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고 쏘아붙이는 정견 발표를 자주 접하였다. 이 표현은 선거용 선동이나 기회주의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정치적 경쟁자를 폄훼(貶毁)하기 위한 부정적인 욕설로 사용되기도 한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포퓰리즘이라고 하면 ‘인기편승주의’ 혹은 ‘대중영합주의’라는 부정적 의미가 대중 속에 강하게 각인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치적 공방 속에서 그 단어가 원래 지닌 좋은 의미마저 해치고 있다.

현대 사회에는 소수의 권력 엘리트들이 언어유희와 여론 조작을통해 국민의 주권을 농락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모든정치 담론을 흑과 백, 좋거나 나쁜 것, 옳거나 그른 것으로 대립하고 구획함으로써 전선을 명확히 하는 것도 불온한 포퓰리스트들이 자주 취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희생양과 원흉을 지목하여 적개심을 유발하는 선동도 일삼는다.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눈앞의 공약을 남발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도 현실성도 결여하고있다. 그들이 자주 떠벌리는 인민 혹은 대중도 실제로는 그들의 단기적 실리에 함께 편승해 줄 ‘소모용 대중’일 뿐이다.

국회의원 가운데 약 40퍼센트가 그리스도인인데도 한국 사회의 모든 엘리트 집단 가운데 가장 낙후성을 면치 못하는 곳이 정치판이다. 정치판을 질타하기 전에 교회가 정치집단으로 전락하여 파생된 문제는 아닌지 뼈아픈 자성적 숙고가 있어야 하겠다. 더 이상 늦지 않도록 교회의 세속화를 추동하는 잘못된 포퓰리즘을 심각히진단해 보아야 할 때다. 잘못된 포퓰리즘에 빠지는 것이 교회 타락의 본질이다.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을 때만 대중 혹은 회중의 요구는 그 정당성을 갖는다.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방책으로 성서의 가르침을 떠나는 것이 세속적 인본주의다. 모세가 시내산에 머무는 동안 산 아래서 아론은 다음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선동에 영합해 하나님을 능욕하는 일에 동조하고 금송아지 우상 제작을 주도했다.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대중들이 좋아하는 금송아지 우상을 내세우는 것이 포퓰리즘이다.하나님의 영광 대신 인간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권위 대신 인간 본위의 권위를 주창하는 모든 것이 복음의 정신으로 척결해야 할 금송아지이고 포퓰리즘이다. 한국 교회는 여전히 목회 세습과 금권선거와 교권주의로 요동치고 있고, 상품화된 설교와 복음이 대중의 인기몰이에 영합하고 있다. 목회자들이 대중이 원하는 신학을 조성하고 대중이 좋아하는 이벤트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설교를 강단에서 외치는 동안 교회는 복음의 정신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허장성세한 교회의 외침이 깡통소리보다 더 요란하다. 대중적 가치를 추구하는 시끌벅적한 그 요란함 때문에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복음의 본질에서 떠난 교회의 행태가 더욱 추하고 그 선포(설교)가 더욱 공허한 법이다.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대중을 복음으로 깨우쳐 하나님의 나라와 그 가치를 지향하도록 인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 자신이 대중을 이끌고 세속주의에 항복해 버리는 영적스캔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좌우를 헤아리지도 않은 채 자신의 신앙과 다르면 무조건 지옥불에 떨어질 원흉으로 몰아붙이는 일부 몰지각한 교회 지도자의 마녀사냥 식 여론몰이도 정치판의 포퓰리스트들이 일삼는 선동의 정치술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정신이 죽은 무덤이 되고 있다. 교회는 어느새 사회를 변혁하는 주체가 아닌 사회에 의해 변혁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룡이 되고자 한 한국 교회가 거대한 몸통, 작은 두뇌를 갖고 기후 변화에 취약해 멸종했던 공룡의 전철을 밟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예언적 메시지가 대선 정국과 맞물렸던 요즈음 더욱 쟁쟁하게 들린다.

이상명 목사 /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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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목사 2017-05-24 11:04:13
지적하신대로 예수님과 예수님이 전하여준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에서 멀어져 가는 기독교의 모습을 봅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 기독교를 안다는 것을 달리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일단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최소한의 변화라도 일어날텐데, 본질인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과 동떨어진 비본질의 것을 붙잡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비본질의 것이 본질인 냥 지도자들이 왜곡, 호도하고 있으니 교회나 성도들은 그대로 좇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도자들이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은 기복을 원하는 대중, 곧 성도들에게 맞추는데 기인합니다. 총장님께서 지적한 포풀리즘의 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맞춰 예수님이 전하여준 바른 복음을 전파해야 할 지도자들이 사람에게 맞춰, 내세를 무시한 현세에서의 복만을 추구하는 무당과 같은 역할로 전락함으로, 변질된 지도자 상이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교회가 양적 팽창이 있어지기는 했지만 반면에 생명력이 약해져 가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한 현상은 원치 아니하는 바이지만 기독교에 대한 불신, 양적 감소로 이어질 것입니다. 늘 뇌리에 스치는 바는 지도자들과 성도들과 교회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지도자들과 성도들과 교회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중세 종교개혁자들이 맞추었던 포커스는 본질인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전하여준 복음입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 속에서 그 본질로부터 탈선하여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본질에 입각한 기독교가 아닌 기형적인 기독교의 모습으로 탈바꿈 되어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 2017년엔 무엇보다도 전 세계의 기독교, 즉 지도자들과 성도들과 교회가 본질인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전하여 준 복음에 포커스를 맞추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로 알고, 하나님과 세상 앞에 반듯한 모습을 갖출 때, 희망 찬 미래를 열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 위해 예수님의 실체, 예수님이 전하여 준 복음의 실체를 다시금 정리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예수님이 추구했던 바, 살았던 삶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을 마련하고, 지도자들과 성도들과 교회가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