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의 눈물
  • 최태선
  • 승인 2017.05.25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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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다. 이 마음 누구도 모른다."

세월호 사건으로 딸을 잃고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아픔과 절망 속에 살고 있는 조은화양의 어머니가 한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녀의 그 참람한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이럴 때 나도 다 겪어봐서 다 안다고 말하는 이는 그 마음을 애초부터 몰랐던 사람입니다. 정말 그런 아픔을 경험했다면 자신처럼 그런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무례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이는 그나마 조금 나은 편입니다. 다른 이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이나 다행이라 여기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경쟁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지옥짓기를 하고 있다는 걸 추호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감옥으로 가신 대통령님과 순실님은 노란 리본이 아니라 노란색만 보아도 질색팔색을 하셨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 정부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아예 그걸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까지 했습니다. 청와대의 주인이 바뀌자 청와대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전에는 노란 리본을 달고만 있어도 신분을 확인하고, 온 목적을 묻고, 가방까지 열어 보여야 했답니다. 감옥에 계신 대통령님과 그녀의 절친님들이 근본적으로 지탄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패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추종하는 정치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 국회의원은 시신 몇을 건지기 위해 수천억 원의 비용을 들이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항변하였습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참람한 장애입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만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도 일반 사람들은 그러려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이 처절한 다른 이의 불행에 급기야 하나님까지 모셔왔습니다. 그는 권위 있는 태도로 대한민국을 정신 차리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세월호를 수장시켰다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더욱 참람한 것은 그런 설교를 들어도 분노하지 않는 수만 명의 교인들이 그 교회를 다니면서 자신들의 교회가 한국교회의 귀감이라고 나대고 나불거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역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비참한 장애인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제가 속이 상해서 너무 빈정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송구합니다. 저 역시 참 못된 사람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패륜이며,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참혹한 장애이며, 그러한 패륜과 장애를 인식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권정생 선생

하느님의 눈물

동화 한 편이 떠오릅니다. 권정생 선생의 <하느님의 눈물>입니다.

토끼는 약한 동물입니다. 호랑이나 사자처럼 강한 동물이 아닙니다. 토끼는 그런 강한 동물의 먹이가 되는 아주 약한 동물입니다. 하지만 그런 토끼도 풀에겐 무서운 포식자입니다. 약한 토끼지만 더 약한 풀을 뜯어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 토끼가 풀의 아픔을 깨닫습니다.

"칡넝쿨이랑 과낭풀이랑 뜯어 먹으면 맛있지만 참말 마음이 아프구나. 뜯어 먹히는 건 모두 없어지고 마니까."

풀을 먹는 건 좋지만 마음이 아픕니다. 자신의 생명이 남의 아픔을 담고 있음을 토끼는 깨우칩니다. 그러자 토끼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토끼는 힘들어 합니다. 그저 좋아서 먹던 풀도 먹지 못합니다. 배고픈 시간을 보내며, 하느님께 부탁을 합니다. '하느님처럼 보리수나무 이슬이랑,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을 먹고 살아가게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누구에게도 아픔이 되지 않는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부탁에 하느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 그렇게 해주지.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오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단다."

이 동화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바라는 권정생 선생의 복음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 세상은 긍휼이 기조가 되는 세상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마음이 바로 그 마음일 것입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작은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보잘 것 없는 작은 미물에 관심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토끼

그런데 우리가 이 동화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주인공이 토끼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토끼처럼 연약한 동물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기왕에 세상에 태어났으면 사자와 호랑이처럼 강한 동물이 되고 깊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우리는 강한 동물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다른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싶은 존재입니다.

역설적으로 권정생 선생은 약한 토끼를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토끼는 약자입니다. 호랑이와 사자는 물론 그보다 작은 모든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는 어찌 보면 참으로 서글픈 존재입니다. 하지만 토끼가 풀의 아픔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토끼 스스로가 약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토끼는 풀의 아픔에서 자신의 아픔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물(권정생 선생 / 산하 펴냄)

그런 걸 동병상린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류역사는 동정을 최고의 모욕이라 하고 시기 받는 것보다 못하다고 여겨왔습니다. 동정이나 긍휼과 같은 단어는 약자들의 변이라 여겨온 것이지요. 그래서 인류역사는 불행을 향해 치닫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현대는 그 속도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성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가난한 자는 세상풍파에 속수무책인 사람입니다. 늘 당하다보니 다른 당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곤 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들의 아픔을 느끼는 존재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권정생 선생 같은 그런 새로운 인류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권정생 선생을 제가 존경하는 이유는 그분의 글에서 다른 이들의 아픔을 느끼는 감수성이 특출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어린아이들까지 희생되었습니다. 권정생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몸의 열이 40도까지 올라 밤새 끙끙 앓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열 받는 경우가 있지만 희생당한 이들의 아픔 때문에 체온이 올라간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 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권정생 선생을 존경하며 마음 깊이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분이야말로 동화 속의 토끼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우리는 모두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지향점은 사자나 호랑이가 아니라 토끼입니다. 토끼가 되어야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의 증거이며 마지막 심판에서의 판단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끼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복음이 복음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토끼가 그리스도인들의 지향점이 되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이 토끼처럼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토끼가 죽어가는 풀의 아픔을 깨닫게 되었을 때 토끼와 풀은 '우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될 때 나와 다른 이는 '우리'가 됩니다. 다른 이들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될 때 다른 이와 나는 '우리'가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서가 말하는 '우리'의 의미를 망각하였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일용할 양식도 '우리'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용서 역시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와 남이 '우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너와 남이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 나라는 그 벽을 허문 나라입니다. 너와 남이 따로 없는 '우리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제가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래도록 가난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여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잘 해보려던 교회마저 지금은 유야무야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나 쓴 글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다가왔던 사람들도 저를 만나면 실망해서 돌아섭니다. 그런 상황이 전혀 힘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저는 제가 이렇게 된 것이 가장 감사합니다.

그 이유는 저 스스로 제게 일어난 변화를 감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야 비로소 다른 이들의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외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단 고통 받는 소외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 속에 있는 불안함과 두려움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는 인식과 함께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작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자들의 나라입니다. 토끼들의 나라입니다. 사자와 호랑이와 같은 영웅들이 없는 나라입니다. 나와 남을 비교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되었기에 경쟁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까지 하나가 되는 나라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희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지탄을 받게 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자와 호랑이가 되려하고, 토끼가 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토끼가 된다는 것의 의미, 토끼가 된다는 것의 신비를 그리스도인이 모르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저는 늘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작은 자들의 나라라는 사실을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저의 말은 늘 마이동풍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강도를 높여보고자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부자는 지옥에 갔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게 되었습니다. 성서는 그 이유를 부자가 살아 있는 동안 호사를 다 누렸고, 거지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유가 내포하고 있는 소중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 말씀에는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사는 나라,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대의가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아야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상 밑으로 음식을 던져주는 자선이 아니라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그를 불러 같은 상에서 함께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부자가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나사로는 헌데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나사로의 아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사로를 자신의 상으로 초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공감하지 못하는 나사로의 아픔은 개들까지도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했습니다. 개들은 나사로에게 다가와 헌데를 핥아주었습니다. 개들이 나사로의 상처를 치료해주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나사로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그를 자신의 식탁으로 초대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의 부가 그를 큰 자로 만들어 작은 자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작은 자만이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는 이 근본적인 성서의 진리를 그리스도인이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반드시 작은 자가 되어야 바늘 귀를 통과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성서의 교훈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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