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청산과 교회개혁은 전혀 다른 길
적폐청산과 교회개혁은 전혀 다른 길
  • 최태선
  • 승인 2017.06.03 12: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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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청산이 새 정부와 함께 시대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적폐는 적폐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쌓인 폐단들이 켜켜이 쌓였습니다. 가까이는 이전 9년 정부들로부터 군사독재 시대를 지나 멀리는 친일까지 이르는 대한민국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직도 여전히 나라의 역사를 바로잡으려면 친일의 잔재를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닙니다.

교회의 개혁도 일종의 적폐청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시 더 오랜 기간 동안의 적폐가 켜켜이 싸여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적폐청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명분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옳고 그름을 가리고 옳음을 주장하는 일입니다. 분명 적폐의 청산은 옳고자 하는 노력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적폐청산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옳은 것을 주장하며 그것을 관철하려고 폭력을 사용합니다. 역사는 그것에 대한 증거로 넘쳐납니다. 세속 역사는 물론 기독교 역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대학살의 주인공 히틀러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옳은 것을 행하고자 그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식민지 정복 등도 모두 같은 사건들입니다. 인간은 옳은 일을 행한다며 더 큰 악,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존재입니다. 

대략 십여 전 전부터 개혁을 주장하며 자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급증하였습니다.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성서에 눈을 뜨고 부조리한 상황을 보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일이고 감사한 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옳음을 확신하며 틀린 사람들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을 뜬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몹시 사나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나운 태도와 방법으로는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옳은 것을 내세우며 폭력적이 되는 것이 안타까워 쓰게 된 글이 있습니다. 9년 전에 썼던 글입니다. 먼저 그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선과 악

70년대 대학을 다니면 누구나 어느 정도 지성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경찰의 무자비한 장발단속의 가위만 없었다면 그래도 활기 넘치는 낭만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명동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은 늘 젊음과 지성의 한 마당 축제였습니다. 음악과 미술과 철학과 사랑 그리고 현실의 부조리 등 다양한 주제가 흘러 넘쳤습니다. 그 가운데 단연코 지적이고 멋있어 보이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실존주의와 니힐리즘(허무주의)에 관한 토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에는 늘 장식용 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싸르트르와 카프카와 전혜린 그리고 카뮈의 책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 한 권 베스트 셀러를 선택하라면 역시 카뮈의 <이방인>일 것입니다. 사회 속의 이방인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방관자였던 주인공 뫼르소의 일탈의 삶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 당위를 거부한 채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그의 삶이 보여주는 부조리의 상황에 대한 실존적 저항이 참된 인간의 용감한 투쟁으로 마음 깊이 공감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마시던 막걸리는 술이 아니라 인생의 윤활유였습니다.


카뮈와 모리악

사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알베르 카뮈는 소설속 보다도 현실 속에서 더 부조리와 반항의 투사였습니다. 2차 대전 때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4년 동안 나치에 저항하지 않고 도리어 협조했던 프랑스 지식인들의 부조리한 행태를 그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해야 한다."

"오류의 청산에 실패하는 것은 스스로 쇄신할 준비에 실패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 당시 카뮈의 양심선언이었습니다. 그의 강력한 주장은 전후 프랑스 지식인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사르트르, 마르셀 등이 적극 그를 지지했고, 이러한 입장은 드골파와 레지스탕스 참여 그룹의 부역청산 작업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카뮈와 모리악

그러나 또 다른 노벨상 수상 작가였던 모리악은 카뮈와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나섰습니다. "악인들의 불안한 영혼도 순수하고 신성한 사랑에 목말라 있다."며 나치부역자들에 대한 관용과 용서를 제안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통찰 때문이었습니다. 한계상황에 처한 나약한 인간들이 생존을 위해 저지른 불가피한 부조리라는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실존이해에 기초한 또 다른 주장이었습니다. 그것은 전후 사회분열을 막고 억울한 희생자들을 양산해 낼 것에 대한 우려가 섞인 합리적인 대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리악에게 돌아온 것은 '성 프란치스코 같은 헛소리'라는 비아냥거림뿐이었습니다.


현실

여론을 등에 업은 부역청산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가능한 한 폭력적이기 마련입니다. 그 과정에서 형평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문과 처벌의 잔혹성에 대한 불만들이 속속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프랑스 사회를 극심한 분열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했습니다. 모함, 음해, 무고, 위증이 판을 쳤습니다. 거기에 야만적 인권유린까지 서슴없이 자행되었습니다. 총살형으로 처형된 사람이 일만 명, 조사 과정이나 투옥 중에 숨진 사람이 사만여 명, 징역이나 공민권 박탈 등 중형을 받은 사람이 약 십만 명 등 처벌 받은 전체 인원이 오십 여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폭력의 광기를 띠며 공포분위기 속에서 청산작업은 쉼 없이 무자비하게 지속되었습니다.

그제야 자성의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선두에는 의외로 부역청산의 주창자였던 카뮈가 서 있었습니다. "모리악이 옳았다." 그것은 "내가 틀렸다!"는 카뮈의 또 다른 양심선언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모리악의 통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부역청산작업은 극심한 국론분열과 혹독한 인권유린의 상처를 남긴 채 그 기세가 꺾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친일청산과 같은 프랑스의 이야기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인간은 온전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 인간은 신 또는 하늘의 선의의 창조물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체적인 행동에서 비인도적인 행위를 자행할 수 있다."

한스 큉의 말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만일 처음부터 프랑스 사람들이 모리악의 견해를 따랐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혼란과 부조리는 여전했을 것이며, 그것 때문에 프랑스는 영원히 불의한 사회가 되었다고 사람들은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선악을 따지는 마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2:17)

선악을 따지는 마음은 창조에 파괴를 가져오며 인간을 죽음으로 이끈다는 것을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 선과 악을 가리는 나무를 심어놓고 그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에서 우리는 창조 때의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과 악을 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음이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반열에 서서 추앙받아 마땅한 최고의 지성인, 노벨상 수상 작가인 카뮈와 모리악에게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떠올립니다. 인류의 모든 불행은 결국 인간이 선과 악을 가릴 수 있다는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말. 말. 말. 우리 사회도 선과 악을 구분하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모두가 그럴 듯 하고 모두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선과 악을 가리고 있는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마음을 없앨 때 인간은 자기의 창조주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그것은 곧 자기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악을 씻는 것보다 하느님의 선하신 마음을 느끼게 합니다. 그분 스스로 선과 악을 가리는 자가 아니라 인간이 가린 선과 악의 구분을 넘어 모두를 안아 주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마음에 그런 그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빌 2: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선과 악을 가리는 자가 아니라 선과 악의 구분을 넘어 모두를 안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혼란한 우리 사회를 바라보며, 모두를 보듬어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워합니다.(여기까지입니다.)


적폐 청산과 교회 개혁

새 정부의 적폐 청산의 과정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제 교회의 적폐가 청산되어야 할 시점이라는 말을 합니다. 나라다운 나라를 내세우는 새 정부가 상식이 통하는 나라 건설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개혁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적폐 청산과 교회의 개혁은 공통된 점이 많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나라는 상식이 통하는 나라가 되면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상식이 통하는 교회가 된다고 해도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근본적으로 상식과는 동떨어진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게 됩니다.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받아드리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지혜는 꺼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적폐 청산과 교회 개혁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국가의 적폐 청산은 권력을 쟁취한 정부가 항용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의 기준은 상식입니다. 상식이 통하면 어느 정도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고, 그 정도면 훌륭한 적폐의 청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개혁은 그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권력을 무력화키는 사람들의 사랑 운동으로 이루어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 사랑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결코 옳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선과 악" 글에서 결론으로 제시했듯이 모두를 보듬어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조금씩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주님은 '가루 서 말에 넣은 누룩'이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더디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국가의 적폐 청산과 교회의 개혁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겉모습은 비슷해 보이지만 그 방법이 완전히 반대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을 법원의 판결로 이루려는 것은 교회의 개혁이 아니라 교회의 세속화를 인정하고 강화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향은 이미 초기 교회에서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차라리 불이익을 당하라고 말했고 세상이 교회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판단해야 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적폐의 청산은 힘을 가진 자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교회의 개혁은 힘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한 평화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이 명확한 진리를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평화의 사람들이 직면하게 되는 세상의 저항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내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싶습니다. 적폐 청산을 보고 교회 개혁을 떠올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샬롬'을 보고 적폐 청산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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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2017-06-06 11:43:04
지금 여기서 분명하게 현존하는(clear and present)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안아주어야 하는지... 그게 고민입니다. 과거의 악(행)이라 하더라도, 현재 계속 진행형으로 생명을 해하고 사회를 피폐케 할 경우 어찌해야 하는지... 참 어려운 문제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