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양재영
  • 승인 2017.06.06 05:3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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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교수 [정의란 무엇인가?] 주제로 LA강연회 가져
강남순 교수 강연회가 LA향린교회에서 열렸다  ⓒ <미주뉴스앤조이>

[미주뉴스앤조이=양재영 기자] 텍사스 크리스천대 강남순교수 강연회가 LA향린교회(곽건용 목사)에서 열렸다.

강남순 교수는 지난해 6월 <코스모폴리타니즘과 종교>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지 1년만에 LA를 방문했다. 그는 “지난해 큰 기대없이 왔는데, 정말 좋은 시간을 가졌다. 어려움이 있지만 대안적 교회의 가능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희망을 볼 수 있었다"고 평했다.

“예수의 연민의 시선을 따르는 것"

<정의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강남순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했다.

“데리다는 인간의 근원적 존재방식으로 ‘연민'(compassion)을 거론했다. 연민은 동정과 다르다. 동정심으로 홈리스에게 식사와 옷을 대접할 때 우리는 ‘왜 그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왜?'라는 질문은 근원적이고 구조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연민은 ‘왜?’라는 질문을 통해 그 고통이 야기된 요인들에 관심을 갖고, 타자의 고통에 함께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정의’라는 개념이 나온다.”

강 교수는 다양한 차별과 억압, 배제의 문제 속에 있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고자 하는 ‘연민'의 개념을 기독교의 ‘믿음'과 연관지어 설명했다.

“데리다는 ‘연민을 느끼는 한 그 사람의 인간성이 유지된다'고 말했는데 그 말에 동의한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예수의 연민의 시선을 따르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섹스(sex)와 젠더(gender)”

강 교수는 ‘정의'의 개념이 근대에서 탈근대인 포스트모던 시대로 이행하면서 많은 변화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분배적 정의', ‘회복적 정의'와 같은 근대의 거대담론은 탈근대로 이행하면서 다양한 차별과 불의의 문제를 배제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탈근대 이전에는 정의에 대한 추상적 개념밖에 없었다. 근대의 거대담론은 우리의 구체적 삶 속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조건에 의해 발생한 불의한 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

과거에는 ‘정의'에 대해 한 두가지만 이야기하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성, 계급, 인종, 장애, 외모, 언어 등 생각해야 할 리스트가 길어지고 있다.

(1995년) 베이징 여성대회가 열렸을 때 가톨릭 단체가 젠더(gender)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로비를 벌였다. 섹스(sex)는 생물학적 구분이다. 즉,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절대로 변화할 수 없는 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젠더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여성성과 남성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주장이 나왔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1949)에서 말한 ‘여자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는 주장처럼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은 태어날 때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가톨릭의 신적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여성성은 사회, 문화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혁명적 개념이었다.  

즉, 여성들이 목숨걸고 다이어트와 성형을 하는 것은 남성들의 시선으로 보는 아름다움에 맞추기 위해 사회, 문화적으로 강요된 미(美)를 이루려는 노력이다. 무엇이 불의이고, 억압과 차별인가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정의에 대한 이해는 없는 것이다"

강남순 교수 강연회가 LA향린교회에서 열렸다 ⓒ <미주뉴스앤조이>

“영어를 못하면 2등 시민"

강교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오늘날 새롭게 부상한 ‘외국인 혐오', ‘자연차별주의', ‘남성중심주의'등의 다양한 문제를 거론하며 ‘언어차별주의'라는 익숙치 않은 개념을 설명했다.

“국제회의를 가다보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이 지배적이다. 세계 모든 지식이 출판될  때 영어로 쓰여진 것이 제일 우선권을 가진다. 영어가 제일 언어인 나라가 인적, 물적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은 2등 시민으로 물러난다. 영어가 서툰 사람들을 보는 사회적 시선들이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다.”

강남순 교수는 다양한 인종, 성별을 가진 공간인 대학을 예로 들면서 포스트모던적 접근방식으로 볼 때 일상생활 모든 곳에서 차별, 억압, 배제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제가 주로 학생들을 만나는 대학이라는 공간은 세계의 축소판이다. 교수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이다. 다수가 남성이다. 외국인 교수는 극소수이며, 다수의 제일 언어가 영어이다. 즉, 영어를 제일 언어로 한 백인남성이 주류를 이룬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차별의 구체적 이야기를 하다보면 10개가 넘는다. 일상생활에서 어디를 가든지 이러한 불의와 억압, 차별은 존재한다. 포스트모던적 접근방식으로 볼 때는 근대의 거대담론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주 구체적이며 작고, 다양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현대의 정의에 대한 관심에서 가져야할 접근방식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피해자인 사람이 다른 쪽에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며 “교육받은 백인 부자여성이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남성을 억압할 수 있다. 그래서 단순한 이분법적 접근방식은 정의를 보는 관점에서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정의의 문제에 관심할 때 거대한 억압과 불의 속에서 한 개인이 빠질 수 있는 무력감, 즉 지적 패배주의를 극복해야 함을 강조했다.

“미국의 여성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의 목적은 여성의 참정권 획득과 교육기회 균등이었다. 여성들에게는 법학, 의학, 신학 등의 학문을 열리지 않은 분야였다. 여성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분야를 공부할 수 없는 영원한 미숙아였다. 성숙성이 결여되어 있기에 참정권도 주지 않은 것이다.

이런 초기의 변혁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72년간 투쟁했다. 그들은 참정권을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그 씨뿌리기를 통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희망이라는 것은 낙관주의와 다르다. 낙관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데이터에 근거한다. 진정한 희망은 구체적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는다. 이런 정의에 대해 애쓰고 씨름하는 자체가 희망이다. 승리에 대한 보장이 있기에 정의에 대해 관심하고, 불의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속에 희망이 있다. 무수한 불의와 탄압들 속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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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2017-06-06 19:07:28
남성성과 여성성은 천부적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만들어 진다는 주장은 결국 동성애를
지지하고, 하나님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한 것을 뒤집기 위한 괘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