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나 잘살자고 믿는 거 아닌가?"
"다 나 잘살자고 믿는 거 아닌가?"
  • 최태선
  • 승인 2017.06.09 0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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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서 아래와 같은 글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이 토론을 하며 적은 글인데 순간적으로 저의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분들의 사고가 바로 이 학생들의 사고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옮겨봅니다.

저희가 오늘 강의 시간에 만약 일제 강점기 시대로 가게 된다면 '나는 친일파가 될 것이다 Vs 나라를 지킬거다' 라는 주제였어요. 솔직히 이 주제를 듣고 너무 답이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했는데 막상 나눠보니까 6:4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쪽이 적어서 놀랐음...

이유를 들어보니까 어차피 지금 대통령도 친일파 딸 아니냐고 독립운동가 후손들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냐고 아무리 희생해 봐야 남는 건 교과서 한 줄 아니면 남지도 않는다. 우리가 여기 비싼 돈 내고 대학 다니는 이유도 다 먹고 살려고 다는 거 아니냐고 지금 친일파 후손들 다들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그래서 저희 쪽에서 아싸리 그럴 거면 너 명예일본인 해 이런 식으로 얘기 했는데 발표대표자는 일본이 좋은 건 아니래요. 일본이 좋은 건 아니지만 나라 배신해서 잘 먹고 잘 살면 그거 이득 아니냐고 당시 피해자들 나중에 우리가 나라배신 때린 돈으로 지원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러는데 할 말이 없어졌어요.

할 말이 없어졌다는 글쓴이의 말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저도 많이 느껴본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학생들의 사고와 다르지 않습니다. 비단 개신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결론은 '다 나 잘살자고 믿는 거 아니냐'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타락하거나 범죄한 목사들이 이미 면죄부를 주었고, 가톨릭 신자들은 나 잘 살자고 믿지 않는다는 건 신부나 수녀 혹은 수도자들에게나 해당된다는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과연 근본적으로 기독교가 나 잘 살려고 믿는 종교일까요?

학생들의 사고는 합리적인 것 같아 보입니다. 매우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들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삶의 목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해결해주는 것이 돈입니다. 결국 돈이 모든 것이라는 그들의 확고한 신념이 그들의 인생 자체를 재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고가 학생들의 사고와 비슷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학생들이 빠져 있는 함정에 똑같이 빠져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학생들의 사고는 그러려니 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인생의 깊은 의미도 모르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인들인 그리스도인들이 학생들과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가지는 이유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에서 벗어나 보다 성숙한 삶을 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사고가 학생들과 같이 현실에 얽매여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은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오래된 관습, 가치, 관념들을 깨는 새로운 질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능력을 나타내는 곳에서 복음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사고들을 산산이 부숩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은 세상의 통념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그 갈등을 해소하고자,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고자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상하가 도치된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역설과 아이러니, 놀라움 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통념과 기대하는 바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가 됩니다. 부도덕한 사람들이 용서를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어른이 아이처럼 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경건한 자들이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 모든 것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초대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우리의 관점과 삶의 방식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에서의 성공과 소유가 가슴을 뛰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어리석게 느껴진다면 우리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이방인이요, 유대인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복음을 알고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신념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소속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우리는 결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땅에서는 물론 영원히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회개가 하나님 나라로 우리의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우리의 마음이 향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뿌리를 내리고 있거나 묻혀 있는 이 지상, 곧 땅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즉 나와 너 그리고 우리와 그들에게 나의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연약한 사람, 소외 받은 사람. 세리, 창녀, 죄인은 물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심지어 원수에게까지 우리의 마음이 가 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 피안의 세계로 생각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던 우리의 마음을 돌려 그런 사람들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나만의 행복을 위해 언젠가 홀로 갈 나라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안에 와 있다는 생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죽은 후에 가는 나라로 생각하면서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세상의 일에 대해 무관심했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세상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면 죄인과 세리와 창녀를 비난하기 전에 무엇이 그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는가를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에 무관심하고, 나만의 행복을 위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쌓는 행위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란 자신만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지난 잘못을 뉘우친다기 보다는 이웃에게로 향하는 관심과 동정과 긍휼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마음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다른 이들의 고통과 슬픔 앞에서 애통하는 마음이며 그런 이들에게 다가가 감싸 안아주는 마음이며 나아가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비록 현실이 슬프고 비참해 보이고 절망적인 상태라 하여도 그 안에 하나님 나라가 깃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합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먼 피안의 세계를 바라보며 현실에서 도피하는 마음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내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 안에서 회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은 이처럼 먼 미래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시선의 변화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며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나의 눈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회개란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가치관도 삶의 방식도 완전히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시험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평탄해지거나 하나님께서 다가오는 십자가를 즉각적으로 대신 지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세상의 것을 다시 사모하고 현실에서의 안전을 도모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고무줄을 당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잡고 있는 손을 놓으면 고무줄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연단의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험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질병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시험입니다. 시험은 내가 고통을 얼마나 잘 참는가,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잘 믿는가를 확인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심이 아닙니다. 고통을 잘 견디면 더 큰 상을 주시고 그렇지 못하면 계속 고통 중에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평가도 아닙니다. 만일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오히려 아주 못된 고약한 분이십니다.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이 창조주이신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문의 시간들을 거치면서 인간은 고통 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시험이며 시험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시험을 받으면서 삶속에 존재하는 행복만이 아니라 불행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시험은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게 해주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잘 견뎌내야만 한다는 생각이나 그로 인해 받게 될 상을 미리 헤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시럼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초기 교회 성도들이 환란을 자랑했던 것도 그들에게 닥쳤던 환란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험은 인간을 죽음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게 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면서 인간은 지속적으로 세상의 방식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 받고 마침내 아무리 불합리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 안에 있는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인간으로 새롭게 빚어지는 것입니다. 성서는 그런 사람들을 새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새 사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서두에서 보았던 학생들의 사고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나 잘살자고 믿겠다는 사람들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으면서 새 사람이 되었다고 어깃장을 부리는 것입니다. 새 사람은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고 모두가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새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이웃을 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새사람들이 모여 산 위의 동네가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참 빛이 되고, 세상의 희망이 되기를 바라며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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