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하나님을 집착하는 목사들
유독 하나님을 집착하는 목사들
  • 최태선
  • 승인 2017.06.13 0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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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일) 고등법원이 내린 기각 소식을 듣고 우리의 생명 되시고 소망 되신 하나님 앞에 다함없는 감사를 올려드렸다"

누가 한 말인지 알려드리지 않아도 이 말을 한 분이 누구인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예배당을 지은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세 가지 길.' 유죄판결을 받은 후 3일째 되는 날, 조용기 목사의 설교 제목이었다. 조 목사는 빨간색 나비넥타이를 매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후 1시 예배 단상에 섰다.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를 유익하게 하고, 회개와 인내를 이루며, 신앙을 연단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교했다. 마치 조개가 진주를 만들 때 아파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신자를 진주처럼 만들기 위해 고난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인들은 조 목사의 말에 아멘과 박수로 화답했다."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분의 기사내용입니다. 혹 발견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재판을 받았던 이분들이 유독 집착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결과가 좋아도 하나님, 나빠도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매우 신앙적으로 들리지만 제겐 역설적으로 인간의 원죄가 떠오릅니다.

원죄

신학자 하비 콕스는 "뱀이 하는 대로 버려두지 말라'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은 하와를 향한 뱀의 유혹을 모티프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묻고는 그 열매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네가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로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하와는 그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와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과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의 올무에 걸려들어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성서는 바로 그것이 타락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와가 스스로 주체이기를 포기한 사건이며 동시에 뱀의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의 타락은 시작되었고 전능하지 않은 인간이 선악을 가리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불행 역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옳음에 천착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 무언가 자신의 옳음을 뒷받침할 그 무엇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처럼 선악의 기준이 되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옳음을 뒷받침해줄 배경이 된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하나님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말끝마다 하나님을 언급하는 사람일수록 스스로 자신의 옳음에 집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아이러니가 등장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진실 되게 경외하는 사람들은 함부로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며, 자신의 판단으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경우라도 막상 그런 판단을 하고 있는 자신이 가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급적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을 자주 언급하는 사람일수록 늘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사람일 개연성이 아주 높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특히 개신교 신자들은 기도의 마무리로 이 말을 사용합니다. 공적 기도는 물론 식사기도의 마무리도 모두 그렇기 때문에 거의 날마다 이 말을 사용하게 됩니다. 주마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주마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나의 옳음을 주장하고 남이 그르다는 판단의 근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도 치렀고,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은 물론 식민지 정복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서는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며(마 721-23), 주님의 이름으로 인간이 행한 일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그것도 많이 행했다고 그것이 다 주임이 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벌을 내리시기까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인간은 얼마든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벌을 받을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내세우면서도 성령을 거슬리는 말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시험해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는가를 시험하여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요일4:1)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나의 기도가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기도인지, 성령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나의 언행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나의 언행이 주님의 뜻에 따른 것이 되려면 오순절 성령을 받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언어가 아니라 주님의 언어, 영적인 언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언어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말을 하고 있을까요?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성령으로 치장하고 합리화하는 이들의 입에서는 '하나님'이나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과 주님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횟수와 빈도가 많고 높을수록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언어로 다른 이들을 다그치면서 그들을 지배합니다. 이때 주님의 이름이라는 말은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가장 좋은 구실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언어를 말함으로써 상대방을 섬기는 종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난발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우리의 언행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는지를 살피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린다는 성공한 그리스도인의 상투어도 버려야 합니다. 영광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언제든 다시 실패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을 줄 수 있는 가변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 놓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할 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3)

이 시대 기독교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없이 복음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그런 이들을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 

노파심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함부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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