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제대로 알고 미화하지 말라’는 목사님께
‘이슬람 제대로 알고 미화하지 말라’는 목사님께
  • 김동문
  • 승인 2017.06.28 06:28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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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대로 알고 있'다는 확신을 의심하자.
아라비아 만(이란에서는 호르무즈 해엽이라고 부릅니다)에 자리한 아랍 이슬람 왕정 국가 중에 아랍에리미트가 있습니다. 그 중 두바이에 부르즈 알-아랍 이라는 인상적인 건물이 있습니다. 그 건물 가까운 곳의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풍경입니다.

ㄱ목사님께! 직접 얼굴을 대면한 적도 없는 입장에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혹시 목사님께서는 내가 들어온 것에 대해 ‘과연 그럴까?’ 의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의심은 사실, 진실에 대한 궁금함과 갈증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페이스 북 타임라인을 타고 올라있는 이런 글을 마주했습니다. 바로 ㄱ 목사님이 쓰신 글이었습니다. 한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섬기고 계시더군요. 목사님께서는 담벼락의 글에서 이렇게 교훈하고 계셨지요.

"무슬림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기 원한다면 무함마드의 삶과 가르침을 이해해야한다. 중동권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이슬람을 미화하는 사람들을 조심하라. 1,400년 동안 꾸준히 이슬람이 진행해온 샤리아와 지하드가 이슬람을 제대로 보여준다. 제발 제대로 공부하자."

이 글을 보면서 여러 가지로 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목사님과 같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목회자, 기독교인들이 무척 많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주변에도 넘쳐납니다. 노골적으로 혐오를 쏟아내든,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비꼬든지, 절대 다수가 이런 비슷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아랍, 이슬람, 중동의 배운 저는 걸프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90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후 나는 여러 가지 고민과 혼란을 겪었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배운 아랍어, 중동, 이슬람 세계가 현실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들어온 것, 머리로 배워온 것을 믿을 것인지, 내 눈 앞에 펼치지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지 갈등했습니다.

그 이후 지금도 나는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은 지금도 진실일까 의심하곤 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살아있는 생명체이기에 변하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년 전 정보로 지금 상황을 쉽게 단정하는 것은 안 됩니다. 내 기억 속의 어떤 사람에 대한 평판으로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을 규정짓는 것도 곤란합니다. 나는 내가 시간 속에서 경험한 것이나 남에 의해 내게 주어진 것을 갖고 살아갑니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지식과 경험이 편견 또는 선입견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함을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제발 제대로 공부하자'는 그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은 무함마드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어떻게 연구했는지요? 무엇을 읽었고, 누구에게 무엇을 들었고, 무엇을 질문했는지요? ‘이슬람을 미화한다’는 표현은 무엇을 뜻하신 것인지요? 목사님이 듣고 믿고 있는 것보다 이슬람, 무슬림의 긍정적인 면을 더 말하면 그것이 미화라고 생각하시는 것인가요? 상대방의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미화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목사님이 생각하는 것, 당신에게 알려진 것, 당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지난 1,400년 동안 이슬람이 진행해온 샤리아와 지하드는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요? 이와 관련하여 누구를 통해, 무엇을 통해 배웠는지요? 이 주제에 대해 목사님 스스로 연구해 본적이 있는지요? 무엇이 ‘샤리아’(이슬람법)인지, 무슬림이 아닌 중립적인 중동연구자, 학자들에게 묻고 듣고 연구해본 적이 있는지요? 그들 학자들이 쓴 책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지요? 기독교인, 무슬림, 무종교 배경을 가진 다양한 중동 관련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들어는 보았는지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독일어 꾸란 번역서 출판을 응원하고 서문을 작성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요? 이슬람 세계, 그리고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꾸란을 서구 언어로 번역하고 연구하던 종교개혁의 전통을 당신은 기억하고 있는지요? 고작 이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기 위해 조악하게 꾸민 꾸란, 이슬람 비판 글 몇 개를 접하고서 이런 식으로 확신을 발산하는 것이, 나름 배웠다고 하는 이로서 취할 당연한 것일까요?

제발 자기 전문 영역 밖의 세계에 대해 쉽게 단정 짓고 쉽게 가르치려 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그럴까? 합리적 의심을 갖고 역사를 배우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의 입장에 대해 건강한 교단 소속의 학자와 목사, 선교사들로부터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이견을 갖고 있는 이들로부터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확인하기 전에는 쉽게 단정 짓지 않는 ‘여유’를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잠시 한국을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1년 전, 6개월 전 그리고 한 달 전 한국을 떠올려보면 어떤 느낌이 다가오나요? 어떤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나요? 기독교,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또 어떤가요? 10년 전, 5년 전 그리고 일 년 전, 지난주 교회를 떠올리면 어떤 느낌의 차이가 있나요? 목사님은 한국 교회를 한 두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나요? 목사님이 공부하신 신학대학원 학생들을 한 두 문장으로 규정지어보시기 바랍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쉽지 않아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슬람을, 무슬림을 한 두 문장으로 단정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중동을 떠올리면 그곳에서 만났던 나쁜 자들도 기억납니다. 정치지도자도, 이슬람극단주의자도, 불의한 자들도 떠오릅니다. 동시에 다수의 절대 다수의 이웃들이 다가옵니다. 내가 만난 이 한사람으로 인해 전체를 좋다, 나쁘다 단정하지 않습니다. 규정짓지도 단정하지도 않는 여유를 배워갑니다. 40년 50년을 배웠는데도 아직도 성경을 잘 모르겠습니다. 30년, 40년을 중동을 접해왔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이 가득합니다. 다만 성경 속 하나님이 중동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그곳에 계시며 말씀하시며, 그 땅과 그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랍 이슬람 세계에도 계시며 말씀하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제대로 알면 좋겠습니다. 나는 목사님께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거나 들어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슬람에 대해 부정하고, 무슬림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것(만)을 당연한 것,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기독교 복음주의 공동체에서 이슬람 선교를 위하여 만든 '인카운터 이슬람'이라는 책이라도 읽어 보았는가?’, ‘건강한 사역단체 프론티어스가 이 책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는 인카운터이슬람 교육과정(http://frontiers.or.kr/ewi/?ckattempt=1)이라도 들어봤는지요? 제대로 배워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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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는자 2017-07-10 10:43:05
서두에서 언급했지만 우리는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루터의 글을 해석해야 한다. 그의 이슬람에 대한 비판은 오직 이슬람 하나만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나아가 종교개혁 운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루터의 또 다른 저서인 『튀르크인에 대항하는 군대의 출정설교』에서 그는 “만약 우리가 터키인에게로 간다면, 우리는 사탄에게로 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교황주의자들 가운데 머무른다면,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이슬람이 외부의 적그리스도라면 가톨릭교회는 내부의 적그리스도로 보았다.

이상으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가르침에 대한 사실을 확인해보았다. 이슬람 선교에 깊이 참여했던 전재옥 교수의 말로 글을 마칠까 한다.

“그들(무슬림)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며, 이 작업은 언어와 학문적인 접근, 그리고 그들 속에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화해의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수련과 성숙의 과정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무슨 말인가? 균형감을 가지라는 말이다. 이슬람포비아적인 극단도 잘못이요, 이슬람미화적인 극단도 잘못이다. 늘 올바른 정보를 기반으로 균형감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자기반성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깨우는자 2017-07-10 10:42:38
2. 팩트체크- 이슬람 세계, 그리고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꾸란을 서구 언어로 번역하고 연구하던 종교개혁의 전통을 당신은 기억하고 있는지요?

꾸란 번역 서문에 보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루터는 이 꾸란을 통하여 오히려 성도들이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는 단순히 꾸란의 주장을 깨뜨리기 위해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번역된 꾸란을 읽고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알게 된다면, 무슬림에게 포로가 된 성도들이 그들을 복음으로 이끌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자칫 이슬람으로 대거 개종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또한 존 위클리프와 마찬가지로 가톨릭교회 비판의 준거로서 이슬람을 삼는 것이 시대적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에 서문을 쓴 것이다. 즉, 복음을 전하는 측면도 있지만 무지한 이들을 깨우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그가 이슬람이나 튀르크인의 장점을 언급한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무능함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므로 루터는 무함마드의 끔찍한 믿음을 타파하기 위해서 꾸란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구약의 선지자와 사도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꾸란을 읽는 사람들은 이방 종교들을 반박하듯이,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반박할 수 있다. 한 예로 이슬람이 가르치는 기도는 기독교가 하는 기도와는 다르다. 교회가 하는 기도는 영원하고 참된 하나님이시며,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하는 기도이다. 루터는 이러한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참된 하나님과 복음을 가르쳐 줄 수 없음을 주장한다.

깨우는자 2017-07-10 10:41:46
꾸란이 독일어로 번역되기 전 1526-29년 어간에 루터가 남긴 글에 의하면 “내게 무함마드의 꾸란의 몇 부분이 있는데, 언제 시간이 있으면 그것을 꼭 독일어로 옮기고 싶은데...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책이 얼마나 더럽고 부끄러운 책인가 하는 것을 알도록 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던 루터가 과연 응원했을까? 꾸란 번역 서문에 보면 사실은 이랬다.

루터는 1542년 2월 꾸란의 라틴어 번역본을 보면서 꾸란이 형편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수도회의 설교자 리콜도의 꾸란에 대한 반박”이란 이름으로 출판된 책에서 성자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을 부인하는 이슬람의 교리에 대해 반박하기도 하였다. 루터는 꾸란의 내적 모순과 성경과의 비교를 통해 나타난 모순들을 지적하는데 주력하였고 사탄과 결탁하지 않는 한, 이성이 없는 사람만이 이슬람의 교리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꾸란의 본질은 거짓과 기만이며 이전에 사도들이 이방인들의 오류를 비판했듯이,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는 복음의 적대자들의 오류를 비판해야 한다고 1543년에 출판된 테오도르 비블리안더(TheodorBibliander)의 책에 서문을 붙이면서 말했다. 루터는 설교자가 꾸란을 읽게 되면, 자신의 신앙을 더욱 견실히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더욱 담대하게 기독교 신앙을 지키라고 투쟁하도록 교인들에게 권고할 것이라고 확신할 정도였다. 즉, 루터는 황당하고 신성 모독적인 꾸란을 읽음으로써 신앙과 복음의 진리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깨우는자 2017-07-10 10:40:52
1. 팩트체크- 그런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독일어 꾸란 번역서 출판을 응원하고 서문을 작성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요?

늘 역사에 대해 평가, 해석할 때는 배경을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한 문장만 가지고 평가, 해석할 때에 오류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가 그렇다. 배경이해 없이 한 구절만 가지고 해석할 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자기 주장을 펼치기 위한 실수를 범하기가 쉽다.

과연 마틴 루터가 독일어 꾸란 번역서 출판을 응원하고 서문을 작성했을까?
당시 시대적 배경은 이랬다. 11세기 서방은 십자군 운동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슬람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려 하였으나, 십자군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유럽과 이슬람 세계는 잠시의 휴전 상태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오스만 투르크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계속하여 발칸 반도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여 광대한 지역을 이슬람화하자, 이슬람은 유럽인들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불링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이슬람에 대해서 다루었으나, 가장 이슬람에 대한 생생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민했던 사람이 루터였다.

루터는 이슬람의 신(神)을 사탄으로 보았다. 그의 책 『튀르크인에 대항하는 군대의 출정설교』에서 “터키인들의 이 같은 거룩한 외형 가운데 그토록 많은 소름끼치는 가공할 추행들이 숨겨져 있는데, 말하자면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거짓말할 뿐 아니라, 그의 피, 죽음, 부활과 그가 세상에 행한 모든 선을 모독하며 부끄러워하며, 그들의 무함마드를 그리스도 위에 모신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또한 성부 하나님을 모독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사탄을 숭배한다.”고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