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종교개혁은 새 문명 남상의 상징
한국의 종교개혁은 새 문명 남상의 상징
  • 이호재 교수 (성균관대학교/종교학)
  • 승인 2017.08.03 10: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간 10주년 축하 특별 기고

 

이 글은 위기에 처한 인류 문명에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답게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다. 인류는 과학적 유토피아의 전개와 생태계 위기로 인해 지구의 생존마저 위협받는 극단의 선택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런 인류의 존망의 위기상황에서 그리스도교는 현대 학문과 과학혁명의 성과를 창조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이는 새로운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사랑과 희생의 황금률을 소규모 인격공동체에서 전개하는 새 종교혁명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인 측면에서 다원적 종교전통의 역사적 유전자를 지닌 한국인,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제국주의의 희생자이며, 낡은 냉전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겨져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인 한국이 지닌 역사적 숙명이다. 한국 교회는 ‘수난과 고난’의 역사적 아픔을 자각하여 새 종교개혁 운동의 전개로 낡아지는 인류 문명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 부여된 역사적 사명이 아닐까.

 

1. 창조주가 되려는 인간

그리스도교 일원주의적 세계관에서 발생한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중세 유럽 가톨릭의 면죄부로 상징되는 부패사건에 대한 루터의 95개 조의 종교선언으로 촉발한다. 교회혁신 운동의 하나인 종교개혁은 고대 그리스 인문학의 재발견에 따른 학문적 역량 축적이 그 배후적 역할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어서 영국에서 발생한 산업혁명의 여파로 물리적 힘을 축적한 유럽은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식민지 개척에 나선다. 이런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두 차례 세계 대전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기초한 서구 문명의 본질에 대해 세계인은 심각한 반성적 성찰을 하게 된다. 더불어 뉴톤과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이원론이 지탱하던 절대시공의 세계관은 상대성이론과 불확정성의 원리 등 신과학의 발달로 물질과 이성의 이원론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물론 현실세계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또한, 19세기 찰스 다윈이 발표한 생물진화론을 바탕으로 허버트 스펜서는 사회진화론으로 사회의 변화와 발전방향을 조망한다. 이런 진화의 개념은 사회 진보와 인류 발전이라는 속성으로 과학적 유토피아의 사유 관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더구나 나노공학(NT), 생명공학(BT), 정보기술(IT), 인지과학(CS)의 융합으로 미래 인류는 유기체인 인간과 비유기체인 인간로봇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예견마저 나오는 세계에 살고 있다.

반면에 성인의 말씀이 담긴 경전은 새로운 해석을 거부하면서, 경전의 해석학적 전통이 축적되면서 ‘전통과 정통’이라는 교리체계 안에서 화석화되어 가고 있다. 종교의 시대는 가고 과학의 시대를 거쳐, 초과학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종교적 인간은 과학적 인간이 지닌 오만을 제지할 수 있는 겸손의 미덕과 사랑의 실천이라는 모범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창조·진화론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신학자와 신자의 종교적 사유로는 새 시대를 맞이할 수 없다. 마치 역사의 가을에 여름의 무성한 옷으로 치장하여, 열매 없는 무화과처럼 과거의 영광만을 뽐내고 있는 것이 작금의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현상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필자가 그리스도계가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화제를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사유는 축 시대를 이끌어온 큰 공적이 있다. 만약 한국의 그리스도계가 현대 과학과 학문, 그리고 다른 종교와 대화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가진다면, 얼마든지 『성경』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새 문명의 조명탄이 될 수 있는 미개발의 광맥이 담겨져 있다.

보라! 바야흐로 과학혁명을 통하여 자신을 얻는 인간이 스스로 창조주의 고민을 하는 시대이다. 인간은 생명과학과 로봇공학의 도움으로 영생을 꿈꾸지만, 인간이 만든 AI(인공로봇)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여 인간 영역을 초월하리라는 예측은 이제 기삿거리도 되지 않는 세상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인간 자체가 과학기술과 의학기술의 도움으로 영생을 꿈꾸지만, 인간이 창조한 AI가 인간의 사고영역을 벗어나 영생을 꿈꿀 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다.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니다. 이 역설적인 딜레마에 빠진 인간은 마치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이 생명과를 따먹고 영생하기를 걱정하는 창조주의 고민을 하는 창조설화의 현대판 재현이 아닌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정보량과 과학기술의 발전 추세를 볼 때 미래사회의 변화의 폭과 깊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과학은 절대 종교의 시녀가 아니고, 종교가 이미 과학의 시녀가 된 시점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류)이 신이 된다’라는 호사가들의 말에 ‘불경죄’를 물을 수 없는 ‘특이점’의 시대, ‘오메가 포인트’의 시대는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를 선도하지 못하는 종교문화는 역사 시대의 쓰레기로 처해 질 운명에 놓일 수밖에 없다. 과학혁명의 도전에 한국 그리스도교계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2. ‘격의(格義) 그리스도교 문화’ 현상을 탈피하자

한국의 그리스도교계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보수 정통주의자들은 초기 선교사가 전해 준 문자주의와 근본주의로 무장된 ‘복음의 씨’를 한국의 종교적 심성에 이식시키려고 하였다. 엄격하게 말하면 현재의 한국 그리스도교는 예수교와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의 사랑실천이 부족한 바울의 성경해석(특히, 로마서)에 근거한 바울교이자, 칼뱅주의적 성경해석이 주류를 차지하는 칼뱅교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지구촌의 모든 사유가 합류된 지구촌 사회에서 유대교의 경전인 타나크(구약성경)와 예수의 생애가 헬레니즘에 의해 해석된 전통만이 정통 해석으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일원론적 그리스도교 세계관에서 해석된 교리체계는 종교다원주의 시대와 과학혁명에 적극적으로 대화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역사적으로 다원주의적 종교세계에 들어온 그리스도교는 아직 한국의 막내 종교로서 한국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양식있는 신학자의 자기점검이다. 토착화를 위한 신학계의 노력이 다른 종교와의 대화태도에 따라 배타주의, 포괄주의 혹은 다원주의로 나타나지만, 가톨릭은 포괄주의, 개신교는 배타적인 태도가 주류의 추세를 보인다. 이를 필자는 ‘격의 그리스도교’현상이라고 부른다. ‘격의 그리스도교’ 현상은 그리스도교가 한국의 종교적 심성에 안착하지 못하고, 마치 인도불교가 중국에서 전래되었을 때 불교의 공(空)등의 종교적 언어를 노장사유를 빌어 표현한 과도기적 현상을 말한다. 한국에서 토착화 신학이라고 전개된 다양한 신학적 움직임은 종국에는 그리스도교를 중심한 포괄주의 혹은 정복신학일 수밖에 없는 신학적 관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안병무, 서남동이 주도한 민중신학, 유동식의 풍류신학, 박종천의 상생신학 등도 우리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를 내리는 새로운 ‘성경해석’의 차원과 그리스도교 혁신운동으로까지 전개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서구 신학과 교리, 공의회와 신앙고백의 바탕위에 한국적 옷을 입혀놓은 꼴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토착화 작업과 불교와의 대화에 적극적이었던 변선환, 홍정수 신학자에 대한 감리교의 종교재판을 상기해 보라. 엄격하게 말하면 교단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지 않는 신학자는 서구 신학과 교단신학의 테두리에서 신학적 사유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2년,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변선환 교수가 종교재판에서 답변한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혹자는 인도 신학자 M.M. Thomas, Stanly Samartha, Raymond Panikkar의 신학을 힌두교적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며 정죄합니다. 그러나 희랍철학이나 독일철학을 사용하여서 만든 서구신학은 혼합주의가 아니고 유독 힌두교나 불교나 유교와 같은 동양철학의 범주를 가지고 복음을 재해석한 모든 아시아신학은 아시아적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는 이유를 본인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기독교대한 감리회 서울연회 ‘92 재판위원회, 『교리사건 재판자료 정리·서술집』(고양: 月刊 온 세상 위하여, 2005), 380쪽)

이런 상황에서 자유스러운 경전읽기와 이를 통한 새로운 경전해석이 가능할까? 과연 ‘정통과 이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한국의 신학적 전통과 목회현장은 새로운 성경해석을 하는 풍토자체가 봉쇄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토착화(문화)신학은 한국 종교문화를 서구 신학의 틀 안에서 조명하는 환원주의적 신학에 불과하지 않은가? 마치 조선 시대에는 주자학적인 관점으로 유가경전을 보고 다른 관점의 유학을 ‘이단’시 한 역사적 전통과 서구전통에 뿌리를 둔 서구신학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독하여야 하며, 다른 성경해석을 이단시 하는 것은 역사적 유비현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격의그리스도교문화’ 현상을 탈피하기 위해 우리의 문제를 신학적 담론으로 하여 성경을 재해석해 내는 신학적 용기를 가진 신학자와 목회자가 더욱 많이 나와야 한다. 성경이 어찌 헬레니즘의 철학적 사유에서만 해석이 되는가. 유·불·도의 다원적 종교전통에서 살아온 한국 그리스도교계가 열린 신앙의 태도로 성경을 볼 때 새로운 성경해석은 진정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경재, 박재순, 김흡영, 이정배 등과 같은 신학자는 유영모, 함석헌에 대한 신학적 자산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이들에 대한 재조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 역시 변찬린, 유영모, 함석헌의 성경해석을 주목하고 있으며, 그 첫 학술적 작업으로 변찬린을 조명해 보았던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계는 서구의 신학적 연구성과도 배워야 하지만, 유영모, 함석헌, 변찬린의 신학적 자산은 송천성, 파니카 등 아시아 신학자등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더 깊고 방대한 사유체계를 형성하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한국의 ‘격의그리스도문화’의 탈피는 새로운 성경해석에서 다시 시작하여야 하며, 우리는 홀대시 하고 있는 함석헌, 변찬린, 유영모 등의 신학적 자산을 충분히 활용하여야 한다.

 

3. 소규모 인격공동체 운동을 전개하자

과연 한국의 주류를 차지하는 대형 교회현상은 바람직한 종교현상인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한국 교회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양적 성장을 입증하는 증표로서는 충분하지만, 과연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현상인지 여부는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간단하게 말해 사랑실천이라는 최고의 종교적 덕목이 한국 교회에 작동이 되고 있는가? 이는 한국 교회에서 스스로 철저하게 묻고 대답하여야 한다. 믿음이 없는 신앙, 실천이 없는 신앙은 절음발이 신앙이다. 신앙은 실천을 동반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모형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는 초 미니교회와 예수 승천 후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 명의 성도가 자율적으로 형성된 사랑의 공동체(행 4:23–35)로 말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교회는 성도들이 잠시 모였다가 흩어진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다음을 가진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의 은사로 만들어진 인격과 인격이 연대한 인격성전을 말한다. 전자의 미니교회는 한 명이 아닌 두세 명이 공동의 마음을 가졌을 때 예수가 함께한다는 복음이고, 후자는 한 명이 아닌 120명이 일심으로 기도할 때 성령이 내린 오순절 사건이다. 특히 성령으로 충만해 진 120명은 서로가 가진 것을 자발적으로 나누어 생활하는 자율경제를 실현한 인류 역사의 첫 사건으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 사람 안에서 발생하는 영육의 투쟁, 차별지, 분별지, 분열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는 다른 종교의 지향점에 비해 성경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이심전심’의 방법론을 세계 경전가운데 유일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의 초대형 교회현상은 자본주의의 성장논리를 답습한 교회형태이다. 따라서 양식 있는 목회자는 인격 공동체가 작동하는 작은 교회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 신학자마다 다른 예수 이해는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가 준 계명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1)” 역사적 예수가 실천한 것도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랑 실천한 것이고, 교회사적으로 예수가 부재한 현 성령의 시대에도 인격적 공동체를 통해 서로서로를 돕는 사랑실천 이외에 그리스도교 교인에게 부여된 큰 사명이 어디 있는가. 한국교회는 ‘믿음구원’, ‘은혜구원’이라는 ‘바울교’와 사랑실천이라는 예수의 복음가운데 어느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가? 혹시 예수가 준 유일한 계명인 사랑 실천보다는 개인차원의 ‘믿음구원’과 기복신앙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지 않음에도 한국 교회가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 단지 외부인의 편견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인가는 되물어보아야 한다.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의 참다운 행위는 절대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같이 거대한 초국적 종교조직이 일사불란하게 할 수 있는 행위도 아니고, 교단과 교리체계로 분열되어 ‘정통과 이단’싸움에 골몰하는 개신교의 대형교회에서 실천할 수 있는 성스러운 행위도 아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두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심이 되는 자리, 120명이 일심으로 성령에 충만해지는 공동체의 공동각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예수를 믿는 신자에게 주는 축복이다. 혼자가 아닌 골방의 두세 명과 다락방의 120명의 인격공동체만이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예수를 믿는 신도이다. 작은 인격 공동체를 전개하자. 작은 인격 공공체가 서로 연대하는 곳에 예수의 복음과 사랑실천은 꽃 피울 것이다.

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곳에 사랑실천이 뒤따르고, 사랑실천은 더 깊은 새로운 신앙을 낳는다. 한국의 그리스도교인은 과거의 성경해석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태도보다는 현재의 교회현상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여 새로운 성경해석을 통하여, 진정으로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가 간 부활과 승천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다가오는 영성시대의 첫 열매가 되고자 하는 신자가 가져야 할 종교적 자각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조망하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은 대형교회에서 탈출하여 작은 인격공동체 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 이는 한국이라는 분단국가가 지닌 문명사적인 인식하에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에서 그 첫걸음을 내걸어야 한다. 새로운 성경해석은 다른 종교의 경전, 과학적 발견과 대화하고, 현대학문과 해석학적 전통을 공유하며, 굳건한 새 문명의 종교적 사유체계를 수립하는데서 시작된다. 다시 강조한다면 낡은 문명과 새 문명의 전환기에 그리스도교가 짊어진 중차대한 사명은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천적인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 이를 필자는 ‘새로운 성경해석을 하자’라는 다소 도전적인 제안과 ‘믿음구원’이라는 바울신학보다는 예수의 사랑복음이 지상에서 작동되도록 한국 그리스도교는 환골탈태하여야 한다. 이런 그리스도교만이 새 문명에 초대받은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한국 교회는 새 문명을 추동할 종교적 힘이 충분하다.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신앙적 각성을 통해 새 시대의 모범이 되어, 덩치만으로 세계 몇 위를 자랑하지 말고 새 신앙인의 모습으로 한국 사회와 인류 문명을 선도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