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는 나의 날개
휠체어는 나의 날개
  • 신기성
  • 승인 2017.08.05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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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 주립대 차인홍 교수

그의 삶을 돌아보는 많은 기사들과 이야기들은 모두 가난하고 불우했던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을 언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희망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던 어린 시절, 삶의 긍정적 의미를 부여잡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에 소아마비를 앓게 되었던 불운의 전격적인 방문, 그리고 9살에 재활원에 보내진 사연 등은 시작부터 흐린 겨울날의 잿빛 하늘만큼이나 우울한 인생 서막이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고진감래(苦盡甘來)가 아닌, 시작부터 따스함이 넘치는 사랑이야기라고 부른다. 이제부터 그의 사랑이야기를 좀 펼쳐보려고 한다.

재활원에서 지내던 어린 그가 감당해야 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배고픔과 외로움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장애인이라는 굴레와, 견디기 힘든 사람들의 차별과 냉대는 덤이었다. 더구나 밖으로부터 주어진 이런 제한보다 그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미래에 대한 절망이었다.

그런 차교수의 인생을 바꾼 첫 번째 희망은 우연히 찾아왔다. 그의 나이 11살 때, 재활원을 방문하여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강민자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강민자 선생은 아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바이올린을 가르쳐주곤 했다. 그녀의 사랑 넘치는 돌봄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세워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차 교수는 1971년 충청남도 음악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암울한 어린 시절의 상처를 씻고 희망이라는 것을 갖게 되는 계기를 바이올린에서 찾은 것이다. 세상과 단절되었다고 생각했던 그의 삶이 열리고, 미래에 대한 꿈이 생기게 되었다.

두 번째 계기는 일본 연수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 재활원과 자매결연된 일본의 한 장애시설로 그는 1년 동안 연수를 가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원하는 것을 사고, 더 나은 환경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난생 처음 휠체어를 타보기도 했고 휠체어스포츠를 통해 운동도 마음껏 하게 되었다.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1976년 강민자 선생님의 제자인 고영일 선생님의 제안으로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이 창단되어 다른 장애우 청년 3명과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연습공간이 없었던 그는 연탄 광에서 하루 10시간이 넘도록 피나는 연습을 했다. 그는 이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그저 연습에 열중했지만 연습을 하다보면 어느덧 음악이 주는 선율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차인홍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쾨쾨한 연탄 광에서 추위에 떨며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지만, 내 영혼은 바이올린 선율 속에서 깊은 위로와 안식을 얻고 있었다. 환경을 초월한 아름다움 속에 나 자신이 기뻐 춤을 추고 있었다. 연탄 광에서의 연습 시간은 내게 고통이면서 또한 고통 너머의 즐거움이 분명히 있었다. 나는 그 즐거움을 잠깐씩 맛보며 시린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 중에서.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장애의 몸으로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24살이 되도록 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한 학력이었다. 젊음은 희망을 의미하는데 그에게는 자신감도 미래도 없었다. 그저 ‘인생이 이렇게 살다가 끝나게 될까’하는 절망감만 들었다.

그의 인생에 결정적 희망이 되었던 또 한사람은 그의 아내 조성은씨이다. 차교수에게 ‘장애는 불편하기는 하지만 무능의 의미는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이다. 그 때까지 보지 못한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게 된 것도 아내와 동행한 유학 생활을 통해서였다.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힘겹게,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하나님은 선물로 유학의 길을 열어주셨다.

차교수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자 서울 간다며 핸드백 하나만 들고 집을 나와 미국으로 건너온 이야기는 유명한 실화이다. 미국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 후 그의 아내는 가발 가게, 재봉일, 피아노 레슨 등으로 가계를 꾸려나갔다.

현대그룹 아산재단의 후원을 받아 미국 신시내티 음악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쌀(La Salle) 4중주단의 사사를 받았다. 졸업 후 뉴욕 시립대 브루클린 음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싸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지휘를 전공으로 박사학위까지 마치게 된다.

자신의 나라에서도 이방인처럼 살았던 차교수는 각고의 노력 끝에 받은 박사학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의 낯선 이방인의 삶을 이어가야 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평생의 유일한 희망이고 업적이었던 음악을 포기하고 치과기공을 배우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가 늘 의지했던 하나님은 알지 못하던 시기에 이미 그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기적처럼 오하이오 라이트 주립대 교수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7개월간의 심사 절차를 거쳐 83명의 지원자 중에서 뽑히게 된다.

자신조차 반신반의 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이다.

“1년 동안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7개월 동안 최종 결과를 기다리면서 ‘과연 나 같은 장애인이 정상인들과 경쟁이 될까’ 생각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연약한 저를 높여주셨습니다” 그는 또한 매일 드리던 새벽기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경험했다고도 한다.

차교수는 10년 전에 종신교수 심사를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했고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 일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는 오케스트라 공연때마다 공연장이 꽉 차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전문 음악가로서 교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도 영향력 있는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다.

나는 그의 인생이 성공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했던 어두운 시간들, 희망이라곤 전혀 없던 모진 고통의 순간들, 그리고 지면에 다 밝히지 못한 사람들의 차별과 냉대와 편견을 감당해내야만 했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등을 다 겪어야만 했다. 결과가 좋다고 과거의 상처가 쉬이 잊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사랑의 빚을 지고 산 삶"이라고 말한다. 지난 반생은 사랑을 받으며 산 삶이라고 고백한다. 더구나 자신을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걸어온 인생이 최선의 길이었다고 겸손히 말한다. 누군가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이 올 수 있었던 최선의 길을 걸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부러운 삶인가!

태어날 때부터 욥의 고난을 운명처럼 짊어진 채 세상에 내던져진 것 처럼, 삶의 시작은 불운했다. 칼바람이 뚫고 들어오던 어두운 연탄 광에서 하루 10시간 넘게 바이올린을 연습하며 삶의 희열을 조금씩 맛보던 어린 시절은, 하나님께서 창대하게 이끌어 가실 사랑이야기의 작은 시작이었지만, 그의 세상은 여전히 그 광안에 갇혀 있었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사랑에 빚진 자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왜일까?

모두들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는 불확실한 미래와 취업 문제 등으로 인한 가중된 불안을 겪고 있다. 차교수의 다음 격려는 이 어려운 동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하물며 저 같은 사람도 성공시켜 주셨는데 여러분은 가만히 놔 두실리가 없다. 나의 스토리가 장래를 위해 몸부림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은 그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증명해주는 샘플에 불과하다고 겸손히 얘기한다.

또한 믿지 않는 친구들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왔음을 인정한다고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인이 되고 있다.

그는 지난 반평생이 사랑 받은 이야기라면 남은 반평생은 사랑을 주는 삶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받은 사랑을 되돌려 주는 삶을 이루고 싶어 한다.

가진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빚진 사람이라는 그의 말이 마음을 울린다. 우리는 가진 것이 축복이라고 믿지 않는가? 우리는 갖기 위해 기도하지 않는가? 우리는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실망하고 슬퍼하지 않는가? 우리는 오늘도 더 가지기 위해 고단한 삶에 마음의 짐까지 더 짊어지지 않는가?

뭔가를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빚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의 의무로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소명이라고 인정한다면, 이 세상은 점점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 질 것이다.

그는 어떤 면에서 두 다리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받을 수 있었다고도 고백한다. 뒤에서 휠체어를 미시는 하나님의 속도와 방향대로 자신을 맡긴 채 따라가기만 했을 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나의 달려가는 속도에 주님이 맞춰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모습과는 다를수도 있는,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나의 방향에 맞춰달라고 간구하지는 않는가? 나의 속도에, 좀 더 가속도를 내 달라고 늘 애원하지는 않는가? 그러다 결국 부서지고 깨지고 넘어지는 경험을 하지는 않는가?

차교수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약할 그때가 곧 강할 때(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입니다…… 약한 만큼 강하신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그 인도하심대로 따라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멘!

그는 지금도 방학이 되면 연주회 뿐만 아니라 교회 간증과, 선교 여행, 장애인 음악회 등의 일정으로 한국, 동남아, 유럽, 남미, 미국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성공한 그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져 이미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 오늘도 구슬 땀을 흘리고 있다.

인생 전반부의 성공이야기보다 더 드라마틱한 후반부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 될지 기대가 크다. 차교수의 간증처럼, 하나님께서 앞에서 이끌어주시고 뒤에서 밀어주시는 방향과 속도에 우리의 인생을 맡기고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10)

차인홍 교수 최근 근황

차교수는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하여 뉴욕 주립대 송도 캠퍼스 초청 및 옥천, 단양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연주와 강연 그리고 경산중앙교회에서도 연주를 하였다. 8월에는 대전 국제음악제에서의 연주와 매스터 클라스를 위해 다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지난 봄에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오래된 87년의 역사를 가진 베네수엘라 국립 오케스트라 (Orquesta Sinfonica de Venezuela) 와 (차인홍 지휘/바이올린) 녹음한 음반이 최근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남미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프로덕션Interactive Line Productions & Media 와 프로듀서 Hildemaro Alvarez 와 함께 녹음 작업을 했으며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전세계 특히 남미전체 음반시장에 소개될 예정이다. 현재 iTunes, Amazon, Google, Deezer 등 디지틀 음원싸이트에서 샘플 음악을 들을수 있고 음원을 구입할수 있다.

음반 발매를 기념하는 취지로 베네수엘라 국립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예정이고, 12월에는 일본 현지교회 초청 순회 연주와 간증 일정 등이 예정되어 있어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 이외에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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