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 교회는 술·담배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일까?
왜 한국 교회는 술·담배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일까?
  • 김강기명
  • 승인 2017.08.10 20: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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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담배 금지'에서 복음의 의미를 생각하다
최근 한국 교계 안팎에서 ‘기독교와 술’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한 구약신학자는 술을 다룬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 7년 반 전(2009.12.10.)에 뉴스 M에 실린 김강기명 님의 글이 다시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당시의 기사를 다시 공유합니다. - 편집자 주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엘-젬(El Jem)에서 발견된 2세기경 로마시대 모자이크에 담긴 포도주 만드는 장면, (튀니지 수쎄 Sousse 고고학 박물관 소장)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술·담배 금지 논의가 명확한 신학적 논리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보수 교회가 낙태·동성애 반대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신학적·성서적 근거를 끌어다 쓰는 반면에, 한국 교회의 술·담배 금지는 그 근거가 거의 최소한으로 제시된 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기독교인들이 술·담배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복음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제시하는 근거가 훨씬 더 많다. 이를테면 "예수님 별명이 먹보에 술꾼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문화적·도덕적 잣대에 갇히지 않으신다"거나, "술·담배는 아디아포라(선과 악이 명확한 문제가 아닌, 아무래도 괜찮은 '비본질'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뜻)에 속한다" 같은 논의가 그것이다. 한국 교회는 미국 보수 교회의 판박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양자가 주된 의제로 삼는 윤리(도덕)적 쟁점은 꽤나 다르다. 미국 교회가 집중하는 '도덕 이슈'의 중심에 낙태와 동성애 문제가 있다면(그래서 종종 이 문제로 교단이 분열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한국 교회의 중심에는 '술과 담배'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은 이 문제가 그토록 집요하게 한국 교회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을 적실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머리로는' 술·담배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일요일이 아닌 주중의 사석에서는 큰 거부감 없이 술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그 태도는 돌변한다. 이를테면 자신들이 주중에 술을 마시는 건 괜찮아도, 목사나 전도사, 혹은 교회의 책임 있는 사람이 술과 담배를 가까이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된다. 왜 그럴까? 사실 이 문제는 '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술·담배 금지가 한국 교회의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방식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술·담배 금지 : 구별 짓기를 통한 정체성 확인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유독 한국 교회에서 술·담배가 중요한 도덕적 이슈로 떠오르는 것은 선교 초기의 경험에 기인한 것이다. 통상적인 설명은 그 당시 조선은 술·담배·오입질의 문제가 심각한, '매우 타락한' 상태였고, 따라서 선교사들의 전략 중 하나가 이 문제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선교 전략'이란 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타 문화권에 기독교를 전파한다고 할 때 교회는 여러 가지 전략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 그 문화권의 언어로 복음을 번역하는 토착화의 전략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초기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다른 전략을 택했다. 그것은 강고한 '구별 짓기'의 전략이었다. (물론 이는 매우 복잡한 결들이 지나가고 있는 초기 선교 역사를 매우 단순하게 설명한 것임을 밝혀 둔다.)

선교사들은 이 중에서 구별 짓기 전략을 취했다. 첫째는 문명·비문명의 구별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 땅에서 본국에서보다 훨씬 더 상류층의 생활양식을 갖고 살았다. (류대영,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는 '복음'이 하나의 '상류 문화' 혹은 '고상한 삶의 길'로서 자리매김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들은 각종 '문명적 삶'을 '복음'과 거의 동일시하여, 선교사가 들어가는 곳마다 '문화 전쟁' 또한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선교 전략에서 일부일처제·근대 교육·질병 관리 체계 등은 '복음'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두 번째 전략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구별 짓기의 전략이었다. 그것은 일상의 도덕적·문화적 삶을 선교사들이 통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교회를 다닌다면(복음을 믿는다면) 술·담배·오입질을 그만두라"는 것. 교회가 세속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기관'인 것은 단지 영적으로만 알려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것은 '표징'을 요구한다. 한국 교회의 경우는 그 시작에 술·담배 금지가 핵심에 있었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신앙 수행에서 기독교인들은 술과 담배를 금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의 구별된 집단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공동체의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토착화 전략이 추구하는 지난하며 어려운 성찰적 과정보다는 훨씬 더 쉬운 방식으로 자신들의 교인됨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복음은 아주 단순한 것(예수 믿고 교회를 다녀서 이전의 술·담배 하던 습관이 사라지는 것)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록을 보면 선교사 자신들은 그다지 엄격하게 주초 금지를 지키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실 선교 모국에서도 술·담배 문제가 그다지 기독교인들의 구별 짓기 코드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선교사들의 집에서는 가끔 와인 파티가 열리기도 했고, 골초 선교사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일종의 '문명인으로서의 자유함' 정도로 여겨졌고, 그들의 지도를 받는 조선인 교인들은 상당히 엄격한 수준에서 술·담배를 금함으로써 자신들의 '구별됨'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술·담배 문제가 '아디아포라'라고, 혹은 예수가 '먹보에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였다는 것을 긍정하더라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술을 입에 댈 때 불편함을 느끼고, 담배 피는 사람들을 보면 움찔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술과 담배가 도덕적 이슈나 기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가르는 구별 짓기의 코드로서 오랫동안 습속화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술·담배를 자유롭게 하는 기독교인을 아무리 신학적으로는 받아들이더라도, '기독교인 공동체의 어떤 유대감이나 소속감'이 그 순간 흐트러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복음'보다도 기독교인의 기독교인 됨을 손쉽게 확인할 표지가 바로 술·담배 문제인 것이다.

복음은 '구별 짓기'인가?

따라서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독교인들에게 물어야 할 것은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복음을 하나의 '내용'으로, 특히 '기독교 공동체'가 '공유하는' 어떤 내용으로 이해할 때 나는 결코 순수한 복음을 찾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그래, 술·담배 문제는 복음의 본질이 아니니, 복음의 본질에나 집중하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복음의 본질'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어떤 내용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물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코드들과 더불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선행, 따뜻한 성품, 형제자매애, 호칭, 교회의 용어들, 신학적 담론들, 예배 시의 신체 동작이나 방언 등 다양한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이 무언지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음을 이렇게 이해하는 한 영원히 복음은 한 '정체성 집단'의 것으로, 끊임없이 동일한 것을 재생산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만다. 술·담배 금지 같은 유치한 기준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타자와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복음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복음이 이런 것일 때 '전도'는 언제나 타자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귀속시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즉 '기독교인(공동체의 회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바로 (복음의 '시작'인) 1세기에 예수와 바울이 부딪혔던 문제이기도 했다. 그들의 적수였던 바리새인,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언제나 '복음'과 '하느님나라'를 하나의 '구별 짓기'를 통해 이해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소속되고자 했다. 하느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그들의 수많은 선행, 할례 등의 의례들, '이방인'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체험들(우리는 손쉽게 유대교를 '율법의 종교'로,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로 이해하는 후대의 이해를 폐기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 역시 '은혜'를 전면에 내세운 종교였다)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느님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항하여 '믿음'을 내세운다. 따라서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다른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믿음이. 그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뭐든 간에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하여 그들과 '구별 짓는' 관계가 아닌 '열린'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믿음'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의 '믿음'이 유대인들의 '율법'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조건으로 기능하고 말 것이다.

예수의 영구 혁명 : '복음'은 '교회'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의 이런 전략은 너무도 쉽게 구별 짓기의 전략으로 회수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그걸 증명해 준다. 그들은 바울의 이름으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논한다. 사실 바울의 서신들(신약성서의 1/3에 해당한다)을 읽어 보면 바울 자신도 결코 일관된 전략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방향은 바울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뭐,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거지만, 그래도 교회 설립 운동은 해야 하겠고…. (이런 고민이야 오늘날 사회주의자들도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주의 혁명은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구별된 소집단(혁명가 집단)이 필요하고…' 하는 식으로.)

반면 예수의 전략은 그러한 회수가 좀 더 힘든 어떤 측면을 보여 준다. 예수의 삶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에서, 특히 이른 시기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결코 어떤 '구별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그리고 어떤 '내부자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기껏 병을 고쳐 놓고는 동네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식인 것이다. 예수 복음의 핵심은 바리새인들의 구별 짓기 전략에 맞서서 그 '구별'이 은폐·조장하는 폭력을 고발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복음 선포는 바리새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드러냄으로써 구별의 논리 속에서 배제당한 자들로 하여금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전략만 가지고 무슨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예수 자신이 그런 공동체를 통한 어떤 혁명 전략을 수행하지 못하고 몸소 그런 구별의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점에서 예수 운동은, 그 '복음'은 어쩌면 '교회'라는 것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영구 혁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바울의 전략에 의해 하나의 교회를 만든다 할지라도, '구별 짓기를 철폐하는 예수'의 모습은 그 교회가 결코 '닫힐 수 없는' 어떤 것임을 계속해서 증명해 내는 전거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그가 화석화한 하나의 기억으로 갇히지 않고 지금도 교회의 구별 짓기에 대항하는 존재로 살아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교회에 의한 예수의 신격화는 오히려 이 '부활하여서 지금도 구별 짓기를 철폐하는 예수'를 구별 짓기의 논리로 회수하여 안전한 동일성의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예수의 '복음'은, 그리고 '구원'은 어느 시대나 동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이 아니라, 매 순간 구체적인 삶 속에서 동일시하는 어떤 폭력이나 배제로부터 벗어나는 '사건' 속에서만 잠시 잠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쩌면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 교회가 강요하는 구별 짓기의 논리를 거부하는 주당들과 골초들이야말로 '예수 사건'을 체험하는 '복 있는 자들'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공동체 내부의 논리 속에서만 머무르려 하는 '착한 그리스도인'들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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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영 2017-08-16 09:40:22
복음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뇌와 반추의 흔적이 담긴 탁월한 글 감사합니다. 초기기독교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할례라는 '구별짓기'까지도 과감히 벗어던진 위대한 결단(사도행전 15장)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단지 주초문제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오늘날 한국교회의 형식적, 관행적, 종교적, 이분법적, 배타적, 자기중심적 (이 모두가 예수님께서 의도하시고 가르치신 복음의 본질과 정확히 반대되는 개념이자 흐름이네요!) '구별짓기'의 문제를 다시 한번 곰씹게 됩니다. 500년 전 개혁자들이 '항상 개혁하는 교회'가 되라고 주문한 이유를 조금 알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