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냐 음주냐' 논쟁, 성경 남용을 경계한다.
'금주냐 음주냐' 논쟁, 성경 남용을 경계한다.
  • 김동문
  • 승인 2017.08.12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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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 체크] 성경 속 포도주와 '예수는 먹보 술꾼"은 오해
그리스 파포스(Paphos)의 신전 모자이크 그림에, 포도와 포도주의 신 디오니수스가 술을 즐기고 있다.

다시금 기독교인들 사이에, 술 마시는 것이 맞다 아니다 틀리다 논쟁이 주요한 대화거리의 하나가 되었다. ‘음주냐 금주냐?’를 주장하는 이들중 다수는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성경에 있다고 말한다, 그 주장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주목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 시대의 술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

술 마시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경에서 그 근거를 내세운다. 술 마시지 말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한다. 게다가 예수님의 식습관을 끌어다가 그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논쟁에는 예수 시대의 문화와 사람들의 일상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포도주, 성경에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포도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맑은 포도주가 아니다. 발로 포도송이를 밟아서 으깨서 만드는 포도주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포도주스는 물론 포도즙 수준도 아니었다. 그 보다도 더 투박한 것이었다. 이 새 포도주의 여전히 포도알맹이와 껍질 등 덩어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시고 떫은맛이 가득한 포도주를 신포도주, 새 포도주, 독주라 불렀다. 1년, 2년 그 이상을 항아리에 넣어서 묵힌 포도주라고 하여도 그 시고 떫은맛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새 포도주를 자연 발효시킨 것이 묵은 포도주이다. 그런데 포도주는 새 포도주도 묵은 포도주는 값 비싸고 귀한 것이었다. 로마 귀족들이라고 하여도 이 포도주를 음료수로 마실 수준이 아니었다.

"밟고 밟아 포도주를 만드세' 스페인 메리다 에서 발견된 2세기 로마문명 모자이크. © AISA / The Bridgeman Art Library

신 포도주는 '독주'라 하여 마시는 것을 금했다. 물을 섞어 포도즙을 마셨다. 어떤 경우는 1:3의 비율로 포도주와 물을 섞어서 마시기도 했다. 혼합 비율이 1:10인 경우도 이상스럽지 않았다. 마치 매실이나 레몬 액에 물을 섞어 마시는 것을 연상해도 좋을 것 같다.

포도주만 마시거나 물만 마시거나 하면 맛이 없지만 포도주에다 물을 섞으면 맛이 나고 마시는 사람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령 있게 짜여진 이야기는 독자에게 기쁨을 준다. 이상으로 내 글을 마치련다. (마카베오하 15:39)

성경 속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도주를 일상에서 음료로 마셨다는 언급은 전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닌 억측이다. 하루 날품을 팔아 벌어들인 한 데나리온의 돈으로 겨우 가족들 하루 끼니를 때울 정도였다.

발로 포도송이를 밟아 포도주를 만드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 www.freebibleimages.org

로마 제국의 식민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그야말로 궁핍했다. 시대별로 지역에 따라 형편에 차이가 있겠지만, 예수 시대 6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는 250~300데나리온이었다. 성인 1인당 1년에 70 데나리온 정도 있어야 했다. 가장이 먹여 살리는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면 날마다 날품을 팔아야만 얻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1 데나리온으로 살 수 있는 빵은 그야말로 하루치 먹을 빵에 불과했다. 고기나 과일, 생선 같은 특별한 먹거리를 먹을 형편이 아니었다. 막노동이라도 날마다 할 수 있으면 그것조차 복 받은 인생 같았다.

주기도에 나오듯이, 날마다 빵을 뗄 수 있는 것을 기적으로, 기도제목으로 삼았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도주는 보릿고개로 고생하던 한국의 60, 70년대 서민들에게 쌀 막걸리 이상, 맑은 소주 그 이상이었다.

일반 서민들에게 포도주는 부유함, 복 받음의 상징이었다. 일상적으로 마실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래 전 '소고기 국에 흰 쌀 밥'이 이 땅에 살던 서민들에게 다가오던 그 의미 이상이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5)하는 고백은, 왕 다윗으로서의 고백일는지는 모른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소리도 서민들의 몫이 아니었다. 평범한 백성들에게는 잔 가득히 채워진 맛갈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꿈이었을 뿐이다.

예수가 먹보와 술꾼이라고요?

예수께서 술을 즐기시고 먹는 것을 밝히셨다는 주장을 펴면서 금주를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점에서 ‘음주 정당화’ ‘음주 권면’을 하는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경 구절이기도 하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태복음 11:18-20)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누가복음 7:33-35)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예수 시대 서민들의 삶은 빵 한쪽 겨우 먹는 수준이었다.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반대하던 이들이 사용한 것이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던 것이 예수의 삶이 아니었던가? 예수께서 세례 요한처럼 금식 또는 가려 먹지 않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대적자들의 수사였던 것이다.

마치 포도송이가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이겨져 포도주가 되듯이, 사람들에게 짓밟혀 피투성이가 된 예수. 그래서 에수의 그 잔은, 그의 몸이고 살이었다.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우리 가운데는 포도주 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는 예수를 떠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아니,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 포도주를 마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잔이 포도주 잔이라고 하여도 우리가 생각하는 와인 잔은 아니었다. 또한 양껏 마시는 장면을 떠올릴 것도 아니었다. 예수 시대 그 시절 발에 짓이겨져서 포도송이 포도 알이 다 터지는 포도주 만드는 현장, 그 소리와 냄새, 맛과 향이 가득했을 곳을 기억한다. 그야말로 포도 알갱이 터지는 그 현장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예수가 마지 포도송이가 사람들에게 짓 밟혀서 붉은 핏빛 포도즙이 되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짓눌려서 살이 찢기고 터져서 죽음에 이르는 장면을 묵상해보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누가복음 22:20)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한복음 6:55)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논쟁 그 곁에 있는 현실

성경 속 그 시대 서민들의 일상에 대한 주목 없이, 음주, 금주를 성경적이다 아니다 하는 논쟁은 여러 가지로 아쉽다. '나는 술을 마신다', '나는 술을 안 마신다', 그냥 자기의 의견으로 말하면 안되는 것일까? 굳이 자신의 선택이나 취향이나 삶의 방식을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고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행동이라고 내세울 필요는 없지 않는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누가복음 12:29, 30)

무엇이 더 중요한가? 헤롯을 여우로, 그 화려한 궁궐을 여우굴로 일갈한 예수의 메시지가 새롭게 다가온다.

오늘 본문은 익숙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던 이들이 느낀 것은 우리들과 달랐던 것 같다. 예수 시대, 몸보다 옷에 관심이 많고, 삶보다 음식 먹기에 더 관심이 많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 로마인들, 식민지의 로마화된 힘 있는 이들, 어찌 보면 그 시대에 1%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고민은 너무 달랐던 것 같다. 그들은 무엇을 먹어야 할지, 무엇을 마셔야 할지 늘 식도락 고민에 빠져있었다. 삶을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을 즐기기 위하여 먹었고,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폼 나게 입는 것 즉 입는 행위 자체를 즐겼다.

하루하루, 일용할 떡을 생각하여야 하는, 평범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사는 세상은 '별천지' 같았고, 그들은 '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먹고 마시고 옷 입는 것이 취미생활이었던 이들과 달리 평범한 이들은 '목숨'의 문제였고, '몸'을 지키는 이슈였다. 없으니 헤롯 대왕의 화려한 궁궐을 여우 놈이 사는 여우 굴로 빗대고, 로메 황제의 장엄한 궁궐을 까마귀 둥지로 일갈하던 예수의 당찬 소리를 떠올린다.

그런데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보여주기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는 문화가 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입는 것, 잘 입는 것, 보여주기 위하여 입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이들이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먹는 것 자체를 취미 생활하듯 여흥을 즐기듯이 먹고 마시는 이들이 있다. 삶을 이어가기 위하여 생존을 위하여 먹어야 하는 치열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그들은 살고 있는 것 같다. 보여주기 위하여 멀쩡한 아파트나 집을 뜯어 고치고 이것저것 채워놓고 꾸미는 것을 고민하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집이 집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집도 '과시'의 수단이고, 돈 벌이와 돈 자랑의 도구일 뿐이다.

나는 오늘도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 살까?" 생각한다. 제게 1%의 사람들 그리고 그 삶을 따라가고 싶어 하는 유사 1% 추구 계층의 염려는 없다. 그렇게 할 여유도 걱정도 없다.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을 뿐이고요, 살기 위하여 먹고 마실 뿐이다. 집을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닌 살기 위하여 남의 집에 세 들어 살거나 은행 융자를 얻어 아직 내 집이 아닌 집에 살 뿐이다.

지금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음주 금주 논쟁에서 말하는 그 '술'은 무엇일까? (앞에서 다루었듯이 성경이 묘사하는 그 술은 아니다.) 누구나 사서 마실 수 있는 그것일까? 아니면 거기에도 '격'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평범한 서민들은 한 달을 힘겹게 벌어도 먹고 마실 수 없는 그 것도 있는 것일까? 문득 오래전 한 장면이 떠오른다. 소주 한 병을 마실 돈이 없어서, 동네 구멍가게에, 소주 한 병 맡겨두고, 가끔씩 그 가게에 들러, 한 잔 힘겹게 마시고는 집으로 향하던 동네 아저씨가 생각난다. 우리의 금주 음주 논쟁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누구를 향한 이야기인가?

우리의 눈길은 어디에? 영화 쿼바디스를 보도(2014.12.11)한 jtbc 화면 갈무리

로마제국과 그 앞잡이들에 의해 일상이 힘겨웠던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생각한다.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 그러나 스스로 덜어낼 수 없었던 삶의 무게로 짓눌려 살아야 했던 삶을 생각한다. 그 악한 자들에 의해 짓밟힌 그 삶, 온 몸에 피 터진 예수의 형상을 떠올린다. 오늘도 그때처럼 있으면 먹고 없으면 못 먹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음주하라, 금주하라 성경을, 예수를 내세우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우리의 이런 논쟁은 누구를 위한 논쟁일까? 음식은 음식일 뿐이 아닌가? 마시거나 안 마시거나, 성경 남용, 예수 오해 하지는 말자. 우리도 모르게 예수께서 지적하신 그 이방인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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