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쓰를 배우며 사우디와 스킨쉽을 나눈다
키쓰를 배우며 사우디와 스킨쉽을 나눈다
  • 엄경희
  • 승인 2017.08.24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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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일기] 다섯 손가락 꿈나무 엄마의 사우디 통신 3
'내가 하루 종일 끼고 다니는 아랍어 책' ⓒ 엄경희

사우디에 살면서도 현지인 아랍어 교사를 구하기 힘든 나에게 쇼핑은 아랍어를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그래서 이따금 남편을 따라 쇼핑을 갈 때면 아랍어를 사용하거나 배울 기회가 없나 두리번거리곤 한다.

마침 야채와 과일에 가격표를 붙여 주는 직원이 여느 때와 달리 3국인 남성이 아닌 사우디 여성이다. 나는 야채와 과일을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내가 아는 아랍어로 말을 걸어볼까 하고 아는 단어를 재빨리 떠올려 보았다. 오이가 아랍어로 뭔지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내가 아랍어로 오이를 말하려고 애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사우디 여성이 웃으며 "키야르"라고 시원하게 대답해 준다.

나는 "아~~~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함빡 웃었다. 사우디 여성도 웃어 준다. 멎 적기도 하고 내가 아랍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기도 해서 올려놓은 야채와 과일 중 아는 아랍어를 말해 본다. 브루뚜깔(오렌지)과 투파훈(사과), 아는 단어 달랑 두 개를 겨우 말하고 마냥 뿌듯해 하는 나를 보고 사우디 여성은 까르르 웃으며 내가 묻는 다른 질문에도 성심껏 대답해 준다.

"마아쌀라마!" 인사하고 저만치 걸어가는 내 뒤로 "마앗쌀라마!" 발음을 교정해 주는 사우디 여성과 나는 더 이상 고객과 점원이 아닌 학생과 스승 사이가 되어 있었다.

사우디 리야드에 산 지 4년이 되어 가는데 내 아랍어 실력은 보다시피 형편없다. 사우디에 오자마자 이제 내가 살 땅이니 이곳 언어를 배우리라 호기롭게 마음먹고 오늘처럼 마트에 갈 때 이것저것 아랍어로 뭔지 묻곤 했던 내 열정은 아랍어 알파벳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단박에 무너졌다. 생전 처음 보는 이 생소한 문자의 알파벳을 익히는 데만 거짓말 조금 보태 3년이 걸렸나 보다. 물론 공부하다 꽤 오랜 시간 손을 떼기도 했고 윤하를 임신하고 출산한 시간들이 있었지만 알파벳 떼고 단어가 읽히는 데만 3년이 걸렸다고 말하는데 나는 주저함이 없다. 그 만큼 첫 산을 넘기가 힘겨웠기 때문이다.

아랍어가 떠듬떠듬 읽어지면 뭐하나? 아무리 외우고 외워도 도무지 단어가 기억에 남지 않았다. 정말 수십 번, 아니 백 번은 새겨야 겨우 내 단어가 되었다. 슬하가 오이를 좋아해 슬하에게 "아랍어로 오이가 키야르야. 참 이쁘지?" 유난을 떨며 외운 단어도 이렇게 가물가물할 정도이니 내 아랍어 실력이 얼마나 느릿느릿 어렵게 나아가고 있는지 가늠이 되려나 ......

최근 사우디 정책의 변화로 점점 사우디 현지인 직원이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사우디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 하는 3국인들이다. 그렇기에 시골이나 현지인 상점에 가지 않는 한 아랍어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는데 어려움이 없다. 사우디 사람들도 영어를 잘 하는 편이다. 분명 서바이벌 언어는 아랍어이기보다 영어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어려운 아랍어를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공부하는 이유는 있다. 첫째는 아랍어를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교육 환경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곧 문화라고 하지 않았는가! 현지어를 배우기에 현지보다 더 이상적인 곳이 또 있겠는가? 도처에 아랍어가 쓰여 있고 아랍어를 모국어로 말하는 사람들투성이이며, 다양한 수준의 아랍어 책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이런 곳에서 아랍어를 배우지 못하면 우리가 사우디에서 ‘홈 스쿨’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울 것 같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영어 외에 나도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쳐 보는 첫 도전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아랍어를 가르치기 위해 나도 같이 밑바닥부터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기에 더 의미가 크다.

둘째로는, 효율적인 자투리 시간 활용으로 언어 공부가 그만이기 때문이다. 막내를 돌보고 살림하랴 집중된 시간을 갖기 어려운 나는 토막 시간을 이용해 아랍어 단어를 외운다. 책은 어느 정도 집중할 수 있는 장시간이 필요하지만 짧은 단어는 윤하 책을 읽어 주는 사이사이 들여다 볼 수 있고 다섯 아이가 돌아가며 조잘조잘 떠들어댈 때도 아이 말을 집중해 들어주면서 아랍어 단어를 중간 중간 되 뇌일 수 있다. 밥을 하거나 청소할 때도 공부할 수 있고 말이다. 아예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며 이런 자투리 시간에 찔끔찔끔 하는 공부이니 비약적 발전이 있기보다 거북이처럼, 아니,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조금씩 나아가는 수준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아랍어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땅의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이 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으로 사느라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 우리 가정이 터를 잡고 삶을 꾸리고 있는 곳이 아닌가! 이곳의 문화와 언어를 알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이 땅을 향한 내 도리요 또한 이방인으로서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에 아랍어를 공부하는 양은 정말 얼마 되지 않지만, 나는 하루 종일 아랍어 책을 끼고 다닌다. 작은 아이들 책을 읽어줄 때도 옆에 펼쳐 놓고, 큰 애들 공부 봐줄 때도 옆에 펼쳐 놓는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거나 단순 작업을 할 때도, 곁에 펼쳐 놓고 입으로 웅얼웅얼 한다. 심지어 잠자기 전 한 단어라도 들여다보려고 아랍어 책을 끼고 있다, 배게 밑에 놓고 잠을 잔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려는 마음으로 지나치게 유난을 떨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렇게 아랍어 책을 끼고 있을 때 이곳 사우디와 더 친해지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사우디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생생해 진다랄까? 사우디 사람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 하는 기분이 든다랄까? 사우디와 스킨 쉽을 나누는 기분이랄까? 사우디에 살면서도 집 안에 갇혀 한국 사람도 사우디 사람도 보기 힘든 상황에서 나만의 발버둥이랄까?

'아랍어가 가득한 곳에서 아랍어를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 ⓒ 엄경희

아랍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을지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어느 수준까지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이곳 사람들과 아랍어로 소통하고 관계하는 그 자체가 내 목표요 소망이다. 아랍어로 마음껏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아랍어를 배우는 자체로 이곳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수단이요 나와 이곳 사람들을 이어 주는 통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 마트에서 아랍어 몇 마디로 사우디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말이다.

올 겨울 날이 선선해지면 동네 놀이터에 나가 동네 아줌마들에게 아랍어를 배우는 게 내 목표다. 그렇게 아랍어를 배우다 보면 이웃도 생기고 친구도 생기지 않겠는가? 또 그렇게 이웃과 친구가 생기면 아랍어가 저절로 늘지 않겠는가? 그렇게 아랍어가 늘고 친구와 이웃도 많아지면 이 땅을 사는 게 더 즐거워지지 않겠는가?

마트에서 계산을 하고 나오다 비닐봉지가 하나 필요해 다시 계산대에 가서 비닐봉지를 달라고 했다. 그러는 김에 비닐봉지는 아랍어로 뭐냐고 물으니 "키~스"란다. 잘 들었는지 확인하려고 내가 재차 "키스?" "키스?" 하며 뽀뽀하는 시늉을 하자 계산대 직원이 웃어 죽겠단다. 집에 돌아와 사전을 찾아보니 진짜 키~쓰(كيس)다. 이 단어는 한 번에 외운 최초의 아랍어 어휘가 되지 않을까 싶다.

 

글쓴이 엄경희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살며 다섯 손가락 꿈나무 5남매를 기독교 독서 중심의 홈 스쿨하는 엄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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