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이냐 자유냐?
구속이냐 자유냐?
  • 방영민
  • 승인 2017.08.2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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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 속 술 | 성기문 | 시커뮤니케이션 | 2017
기독교 역사 속 술 | 성기문 | 시커뮤니케이션 | 2017

교회의 타락과 성도의 방탕의 원인은 술이 아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근본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술을 죄악시 했고 술 마시는 것은 성도의 정체성과 어긋나는 일로 규정하였다. 그야말로 술은 금기였고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였다. 마치 동성애를 인류의 타락과 사회의 부패를 만들어내는 주범으로 공격하는 것처럼 이 술이 성도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교회를 부정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그러면 성경은 정말 술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술은 입에도 대지 말라고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은 술에 취하는 정신 상태와 그것에 중독되어 장악당한 영혼의 성향과 상태를 죄로 규정하지 결코 술이라는 액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술을 죄악의 액체로 정의하면 우리는 알코올이 들어간 그 어떤 음식도 입에 대어서는 안될 것이고 그것으로 치료를 받아도 안 될 것이며 그것의 향기를 느껴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술에 대한 성경적인 기준을 분명히 세우고 그것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 도덕적 중립과 양심의 자유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문제를 죄라고 규정하여 성도에게 굴레를 씌울 수 없다. 교회가 본질적으로 집중하고 추구해야 될 일이 있고 사회를 향해 감당해야 될 소중한 역할도 있는데 언제까지 이 문제에 붙잡혀서 역행하고 퇴행하는 일을 반복할 수 없다.

 

요약 여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술이 어떻게 이해되어져 왔는지 한 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저자는 구약 학자인데 역시 학자다운 면을 가지고 이 작업을 훌륭하게 이루어 성도에게 바른 관점을 제공한다. 그는 술에 대한 글을 쓰며 이것이 판도라의 상자가 되어 수많은 혼란과 재난을 주기 위해 쓰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과 자유를 주어 본질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책은 총 12장으로 구성이 되었고 저자는 술에 대하여 기독교적 시각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조망한다. 몇 개의 챕터 제목을 보면 “고대 근동의 맥주와 포도주의 기원과 발전”, “구약성경에 나타난 포도주와 맥주”, “신약에 나타난 술”, “기독교 초기 역사에 나타난 술”, “청교도와 술: 청교도는 술을 금지했는가”, “금주의 시대(19-20세기)”, “한국 개신교 전래와 근본주의 운동” 등의 제목을 가지고 주제를 펼쳐간다.

특별히 필자에게 기억에 남는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수님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가는 교부들이 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이다. 금욕적인 삶을 중시했던 동방 교부 중에 키프리안은 술과 여자가 영성의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성찬에서의 포도주 사용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복종의 문제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이고 이것의 부재는 영적인 은총의 부재라고 한다. 이것은 성찬에서의 포도주 사용이 당연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예수와 바울의 입장을 계승하는 것이다.

또한 사복음서가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를 반대하고 저항하며 성찬에서의 포도주 사용의 의미를 발전시킨다. 그래서 그는 영지주의와는 다르게 포도주는 몸을 유익하게 하고 몸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 관한 소논문까지 작성하여 권면하였고, 가이사랴의 바실과 크리소스톰은 술취함은 악마의 일이지만 포도주의 유익을 전한다.

이렇듯 교부들은 포도주와 술에 관하여 취하는 것은 엄격한 죄로 정의하지만 이것에 선용에 대해서는 권장한다. 그리고 이후 이 술의 전파와 보급은 수도원을 통해 확장되는데 교회와 수도원은 양조장이 있어서 이것을 일상 식품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이것은 수도사들에게 전염병을 예방하고 건강에 도움을 주어 영성생활에 유익이 되었고 순례객과 방문객들을 대접하는 환대와 영접의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또 하나는, 청교도들과 음주문화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거룩한 무리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시대를 일컫어 청교도 시대라 하는데 그때에 사람들은 술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역시 청교도들은 도박, 게임, 춤 등을 반대하고 주일에 오락과 놀이를 금지한다. 그러나 그들은 금주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물론 과음과 취하는 것은 반대하였지만 술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금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맥주를 즐겼고 럼주와 포도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저자의 주장 책을 보면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다섯 가지의 주장을 한다. 첫째, 음주 문제는 오랜 기독교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기독교의 기원, 수도원 운동, 개신교의 발흥과 발전, 부흥 운동과 기독교 선교와 상당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음주 문제는 역사적으로 아디아포라(비본질적이고 도덕적 중립)의 문제라고 정의한다.

셋째, 음주 문제는 기독교에서 중요한 신학 즉 창조신학과 기독론 그리고 성찬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넷째, 음주를 죄로 규정한 한국교회의 전통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밀려온 세계적인 금주 운동과 그 역사와 맥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교회의 음주 문제는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심각하게 논의해야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이런 자신의 의견을 여러 자료와 정보를 분석하고 종합하여 도출해 낸다.

 

나의 주장 필자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데 특별히 한국교회의 전통이 19세기 20세기 초에 시작된 세계적인 금주운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유럽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확산되면서 공장주들은 작업능력을 높이고 이윤을 올리기 위해 독주를 이용하였고 노동자들은 노동 스트레스를 술집을 이용해 해소하며 건전한 술 문화가 사라지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무제절한 술 소비가 확산 되며 사회적인 문제(폭력, 빈곤, 가정, 노사 갈등)가 심해져 금주운동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회적 배경속에서 우리 나라에 들어 온 선교사들은 청교도적인 정신과 신학적 보수와 윤리의 엄격함을 바탕으로 선교를 하였다. 당시 그들의 나라에서 음주로 인해 발생한 여러 사회적 문제를 직접 겪은 그들이였기에 선교지에서 술로 인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그들이 보기에 해결해야 될 죄였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개종의 근거와 회심의 결과는 금주, 금연, 주일 성수 같은 기준이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교회 속에서 음주에 관해 죄라고 규정한 것은 역사적 금주 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과 배경 때문에 생긴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초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술과 가무를 즐기는 민족적 성향이 강하다보니 그것을 근절하기 위한 강경책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민족의 그런 성향을 뿌리 뽑기 위해 도덕적 아노미를 죄로 명한 것은 결과론적인 신앙관이고, 자신들의 선교 목적 달성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며 또한 그것을 회심의 여부로 삼은 것은 절대적이 될 수 없는 믿음의 기준이다.

 

아쉬움 점 책을 보며 고대 근동과 그리스-로마 시대의 술 문화에 대하여 아쉬운 점이 있었다. 저자는 고대 근동에서 포도주와 술이 국민 음료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도 귀족들과 상류층이 토할 때까지 먹고 마시는 문화를 설명하지만, 서민들의 삶까지 파헤치는 구체적인 설명이 조금 아쉬웠다. 예수님 시대에 술은 권력가의 상징이고 특권층의 문화였는데 서민들이 이것을 음료로 마시고 물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사회적 문화적 설명이 궁금했다.

그래서 필자는 성경속에 등장하는 술과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술이 같은 개념인지 궁금했다. 특권층의 문화가 평범한 이들에게 과연 가능한 것인지, 먹고 사는게 버거운 자들이 포도주를 물처럼 마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 사회적 정황을 알고 싶었다. 저자는 당시 음주가 로마 사회의 귀족층에서 행해진 심포지움과 연결시켜서 설명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이였던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자들에게 이 문화는 어떠했는지 설명이 되었다면 더 탄탄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결론 필자는 술 취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술 자체를 죄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본성이 타락하고 자기중심성이 강한 인간을 향해 마음껏 술을 마시라고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술은 좋은 것이니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권면하는 것도 아니다. 음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가정적 사회적 문제와 피해들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결코 술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성향이 본능을 따르기에 술에 대하여 처음부터 금기를 주입한다는 것은 너무 비인격적이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신앙의 양심과 믿음을 가지고 선택하며 살아가야 할 영역이다. 자신의 믿음이 술에 흔들리고 판단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다. 술, 그 정도가 우리의 믿음을 더럽힐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으며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크기와 수준을 평가할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술 취하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한다. 왜냐하면 술 취함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고능력과 이해력을 저하시키고 심하면 우리 인생마저 집어 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것과 비교하며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한다. 그래야 인생을 소비하고 방탕하지 않고 거룩을 위해 힘쓰며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술 취함은 몸과 영혼과 관계를 죽이는데 성령충만은 몸과 영과 관계를 살리기 때문이다.

끝으로 교회는 술 먹는 자를 향해 정죄하는 곳이 아니라 그가 왜 술로 인생을 살아가는지 들어주고 위로해 주어야하는 곳이다. 고통과 눈물과 한숨과 가슴에 응어리 때문에 술만 마시는 인생들이 잔을 아예 못드는게 아니라 기쁨과 관계의 회복과 협력과 축제 때문에 잔을 드는 이유가 변하도록 가르쳐 주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회심의 증거가 겨우 금주가 아니라 술 때문에 망가져 인생을 향해 같이 술잔을 들어주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눈물 쏟으며 타인의 아픔에 참여하는 순수한 믿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글쓴이 방영민 목사는, 열린교회 부목사/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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