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오솔길 2]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독서의 오솔길 2]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 정현욱
  • 승인 2017.08.28 23: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리고 가는 길 | 팀 켈러 지음 | 이지혜 옮김 | 비아토르 | 2017년
여리고 가는 길 | 팀 켈러 지음 | 이지혜 옮김 | 비아토르 | 2017년

부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배우는 자비 사역’이다. 무심코 읽어 내려가는 동안 강해 설교나 성경 해설집을 생각했던 나의 짐작이 틀렸음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책의 절반 이상을 읽은 뒤였다. 왜냐하면 모두 2부로 나누어진 책의 제1부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무엇인지 교회적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투자하기 때문이다. 제2부는 ‘우리는 어떻게 선한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1부가 자비 사역에 대한 성경적 원리라면, 2부는 ‘자비 사역의 실천’ 방법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즉 이 책은 교회가 실천해야 할 자비 사역의 성경적 이론과 가이드라인과 같은 책이다.

1988년 미국 장로교회의 연구 프로젝트 일환으로 쓴 책임에도 가장 최근의 시대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책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가 사회적 자비 사역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거나, 있어도 교회 성장을 목적으로 한 접근에 그친 적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교회 내에서 단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향력이 미미하기는 하지만 적지 않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사회적 자비 사역에 투신했고, 하려고 하고 있다. 한 예로 고인이 된 대천덕 신부의 예수원 운동은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구제와 돌봄 사역에 전생을 투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 이제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첫 번째 질문 : 자비 사역 교회가 꼭 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경신학적 답변이 필요하다. 저자는 제1부에서 ‘자비 사역의 성경적 원리’를 다룬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해석하며 네 가지 질문은 던진다.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자비가 꼭 필요하냐는 질문이 생긴다.(12쪽)

둘째로 자비 사역의 범위와 차원을 묻는 질문이 있다.(13쪽)
셋째, 자비 사역의 동기를 묻는 질문이 있다.(14쪽)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결말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이다. 이 대화가 율법사와의 대화의 결말이라면, 율법사에게 한 말은 곧 교회에 한 말이다. 저자는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그리스도인 존재의 핵심으로 보신 것 같다고’(13쪽)고 말한다.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의 내용은 구제와 돌봄 사역이 구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천명한다. 저자는 다음 문단에서 좀 더 명징하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그리스도인 됨의 핵심’이라고 명징하게 선언한다. 이것으로 첫 번째 질문은 답이 되었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리적 정의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은 개념적 교회 정의를 넘어 행위를 요구하고 계신다. 저자는 1장 ‘자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에서 자세하게 다룬다. 저자는 이곳에서 자비 사역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통찰한다.

먼저 자비 사역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교인들은 자비 사역을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이며 선택적이다. 교회는 잉여 시간이나 잉여 재산이 있을 때 선택적으로 자비 사역을 형식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자비 사역은 ‘의의 정수’이자, ‘그리스도인 됨의 근본’(45쪽)이다. 더 나아가 자비 사역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약한 사람들, 즉 이웃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을 시험한다.’(47쪽) 그들을 보고도 긍휼을 베풀지 않는 것은 악이다. 누가가 구제와 구원을 치환 시키는 것은 다른 둘이 아닌 하나였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의 결론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만의 자비 사역을 가져야 한다는 성경의 명령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은 자비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54쪽)

첫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하면 자비 사역은 교회의 존재론적 소명이자, 구원과 긴밀하게 연결된 그리스도인 됨의 표지인 것이다.

 

2, 두 번째 질문 :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두 번째 질문은 자비 사역의 범위와 차원이다. 이것은 율법사가 물었던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에 대한 답이다.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웃의 범주를 탈피했을 뿐 아니라 이웃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 원수일지라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며, 이웃의 범주가 아닌 자비를 베푸는 것 자체에 비유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려고 했을 때 소외 현상이 일어난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신학적 소외’가 일어나고, 다음으론 자신과 분리되는 ‘심리적 소외’가 일어난다. 세 번째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깨지는 ‘사회적 소외’로 확장된다. 마지막 소외는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지 못하는 ‘물리적 소외’가 일어난다.(57쪽) 소외를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는 가장 본질적인 사역에 몰입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신학적 소외이다. 그런데 신학적 소외에 머무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저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죄의 모든 결과를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라면, 교회는 계획적으로 그 자원을 활용하여 모든 ‘차원’에서 사역해야 한다.(67쪽)고 조언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 세상과 인생의 모든 차원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도구’(67쪽)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거룩한 나라이고, 기존 사회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71쪽)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웃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삶의 영역까지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주님은 제자를 자비를 베풀라고 하셨고, 자비를 베풀어야 할 모든 곳은 ‘이웃’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

 

3. 세 번째 질문 : 자비 사역의 동기는 무엇인가?

세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직결된다. 자비 사역이 교회의 소명이라면 동기는 무엇일까? 사도바울은 사랑을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고 역설한다. 구약의 율법들은 이웃 사랑의 방법이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자비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데서 비롯된 자발적이고 넘치는 사랑’(85쪽)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비 사역의 동기가 중요한 이유는 종종 ‘교회 성장’이라는 왜곡된 목적이 침범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동기는 진실하다고 할지라도 모호하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깊은 내면을 투명하게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비를 실천하는 네 가지 통로를 지적한다. 첫 번째 통로는 가정이고, 두 번째 통로는 지역 교회이다. 세 번째는 자원봉사 단체나 선교 단체이다. 마지막 네 번째 통로는 국가이다. 통로는 자비를 베풀어야 할 사람에 대한 책임의 영역이다. 가장 먼저 가족이 책임지고, 그다음은 그가 속한 교회이거나 가까운 교회이다. 더 나아가 선교 단체와 국가도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자비 사역의 동기 자체가 개인의 긍휼에 머물지 않고 사회정의 문제라는 것을 말한다.

1부가 성경적 근거에 천착한다면, 2부는 실천적 방법론에 몰입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이웃 공동체에서 사비 사역을 준비하고, 시작하고, 실천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11장 ‘시야 확장’에서 저자는 자비 사역이 어느 정도 확장하다 멈추는 이유를 ‘개인주의’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대체로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의 문제에 둔감할 뿐 아니라 ‘사회 체제에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 모’(243쪽)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자비 사역을 전도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의 악이나 악한 체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경제나 정치, 정의 체제는 그 체제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영향력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할 때 이기적이고 억압적이 될 수 있다.”(245쪽)

결국 자비 사역의 동기는 악의 체제에 대한 변혁적이고 혁명적 동기이어야 한다. 그것은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태곳적 사회체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프랭크 킬라파우가 말한 것처럼 ‘요새 교회’로 남아서는 안 된다. 그곳에 들어가면 누구나 안전한 곳이 아니다. 자비 사역은 요새에서 나와 적진으로 들어가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찾아내고, 필요를 채우고, 사회의 악을 제거하려는 열정이어야 한다.

 

나가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참 계명이 무엇인가로 시작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랑의 범위와 대상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그러나 결론은 의외이다. 주님은 율법사에게 ‘너고 가서 행하라’라고 했다. 이것은 계명은 아는 만큼 행하는 것이고, 실천은 결국 자비 사역의 행위라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웃은 혈통에 따른 동족의 개념을 훨씬 뛰어넘었고, 방법 역시 적극적인 자기 헌신으로 나타났다. 저자는 3장 자비 사역 동기의 결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라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자비의 모범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 모범에서 반드시 그리스도가 드러나기 마련’(91쪽)이라고 천명(闡明) 한다. 그러므로 자비 사역은 교회의 본질이며 소명임이 확실하다. 지역 교회로서 사회에 소금과 빛의 소명을 감당하기 원하는 목회자나 교회라면 이 책을 꼭 읽을 필요가 있다.

글쓴이 정현욱 목사는, 책이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책벌레이며, 일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를 글로 표현하기 좋아하는 글쟁이다. <생명의 삶 플러스> 집필자이며, 여러 기독교 신문과 출판사 서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