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은 없다”(Race is Bogus) - (2)
“인종은 없다”(Race is Bogus) - (2)
  • 김영봉 목사
  • 승인 2017.08.29 05: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영봉목사, 마태복음 5:3-12를 바탕으로 인종주의를 말하다
샬러츠빌에서 발생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테러 사건은 충격적이다. 한국교회, 한인사회에도 크고 작은 인종차별주의가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영봉목사(사귐의 교회)는 두 차례에 걸쳐 로마서를 바탕으로 그 고민을 나눈다. 오늘은 그 두 번째로 지난 8월 27일 주일에 전한 메시지이다. - 편집자 주

 

2016년 8월 15일 뉴욕에서 진행된 혐오범죄 중지 요구 시위. (ⓒ 미국의 소리 VOA)

1.

지난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젠 인종 차별의 시대가 지나가는가 보다!” 하고 기대와 소망을 가졌더랬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것이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백인우월주의자인 대통령의 비호 아래서 그동안 억눌러 왔던 흉한 본성이 일부 백인들의 눈빛과 표정과 행동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왜곡된 신념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주로 숨어서 활동했습니다. 대중 앞에 나설 때는 가면을 썼습니다.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그러한 언행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혀 부끄러울 것 없다는 식입니다. 전국으로 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도 부끄럼 없이, 거칠 것 없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쏟아 냅니다. 대통령이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하니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금요일 저녁에 지독한 인종주의자 조 아르파이오(Joe Arpaio)를 사면했습니다. 이 사면을 통해 대통령은 소수 인종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검문하고 조사해도 된다는 허가증을 백인 경찰들에게 준 셈입니다.

대통령이 이대로 계속 말하고 행동하는 한, 미국의 인종주의적 상황은 계속 악화될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교양인으로 키우는 데에는 수 년 혹은 수 십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 안에 잠재되어 있는 야만성을 끄집어 내는 데에는 단지 며칠이면 충분합니다. 마찬가지로, 백인들의 마음에 잠재되어 있던 이기심과 비열함과 사악함이 폭발되고 그것이 일상화 되게 만드는 것은 순식간의 일입니다. 반면,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다시 바로 잡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이것은 소수민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백인의 갈등의 역사를 연구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백인우월주의적 행동은 백인 자신들에게도 결코 유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흑인이 당하는 차별을 몸소 겪어 보기 위해서 1959년에 흑인으로 변장하고 6주간 남부 도시들을 찾아다닌 경험을 적은 <블랙 라이크 미>라는 책으로 유명한 존 그리핀(John Griffin)이 자신의 체험과 연구를 통해 피를 토하듯 전하고 다닌 진실이 그것입니다. 백인우월주의는 백인 자신들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잘못입니다.

사실, 이것은 성경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그리고 모든 생명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해칠 때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마 22:3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와 이웃이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물리적으로는 두 사람이지만 보이지 않는 깊은 차원에서 나와 남은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렇게 살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못합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도 자주 망각합니다. 아니, 그 사실을 부정합니다. 우리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손을 잡았다가 불리하다 싶으면 등을 돌려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익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에게 있는 힘을 끌어 모으고 자신에게 동조할 사람들을 찾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아주 사악한 얼굴로 드러나고, 때로는 아주 큰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지금 우리는 그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저는 ‘인종’이라는 개념은 유럽의 백인들이 식민지 확장을 해 가는 중에 만들어 낸 허구의 개념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하나의 인종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인종 차별에 동의할 수 없고 적극적으로 반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우리는 인종주의가 더 악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2.

첫째,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인종 차별적 사고와 말과 행동에 대해 회개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인종주의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피해자 의식에 갖혀 있기 쉽습니다. 소수 민족으로 살아야 하는 미국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차별적인 사고 방식과 언행을 하고 살아 갑니다. 누구도 “나는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새빨간!

이번 기회에 우리는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엄정하게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는 인종문제에 대해 불평할 자격도, 무엇인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 민족처럼 차별 의식이 깊고 강한 민족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보다 나아 보이는 민족에게는 서슴 없이 비굴해지기를 택합니다. 그것을 ‘사대주의’(toadyism)라고 부릅니다. 과거에는 중국에게 그랬고, 근대에는 미국에 그랬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내려 온 사대주의적 성향에 백인들이 만든 인종적 편견이 합해져서 우리 안에 흰색에 대한 동경심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과거에 설교자들은 백인 우월주의를 설교했고, 학교에서도 백인들의 역사를 배우면서 부러워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우리는 백인들 앞에서는 약자가 되어 “Yes, Yes”하면서 친절을 떱니다.

반면, 우리보다 못 해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우월감을 가지고 차별적인 언사와 행동을 쏟아 냅니다. 거기에는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단일 혈통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야만의 시대에 우리 민족은 수 없는 전쟁을 겪었고 그 때마다 혈통이 뒤섞였습니다. 그것이 엄연한 역사적 진실임에도 우리는 눈 질끈 감고 단일 민족 신화를 붙들고 다른 민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일삼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우리만 못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주로 돈을 벌러 온 것입니다. 그들이 일하는 직장은 중소 기업이나 공장 혹은 농장입니다. 그들 중 많은 외국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모욕과 차별과 착취와 폭행을 당해 왔습니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지독한 갑질을 하는 형편이니, 약소 민족에게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우리 나라에 온 이주 노동자들은 을 중에도 을입니다. 그러니 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무참히 짓밟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이민자들에게도 인종주의는 심각합니다. 특별히 흑인에 대한 우리 민족의 차별 의식은 백인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네 살짜리 손주를 Nursery에 데리고 갔습니다. 개학 첫 날, 할머니는 조금 일찍 손주를 데리러 갑니다. 공부하는 손주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입니다. 손주가 있는 교실을 들여다 본 할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교실에 흑인 아이가 몇이 있는 겁니다. 학과가 끝나자 할머니는 사무실로 찾아가서 책임자에게 자기 손자를 흑인이 없는 반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아니, 지금도 어디선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 않다 해도, 많은 한인 이민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지 알지 못합니다.

미국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에게 있어서 라티노 형제 자매들에 대한 차별의식과 행동 역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개인 사업을 하는 분들은 라티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을 중의 을입니다. 신분에 있어서도 그렇고,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가지고 있는 기술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오직 힘과 시간 뿐입니다. 그렇기에 고용주가 갑질을 하기가 너무도 쉽습니다. 과연, 한인 고용주와 함께 일한 라티노 노동자들 중에 “한국 사람, 정말 좋은 사람들이다”라고 진심으로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런 사례를 말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은 한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요 또한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생각으로,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죄를 범해 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겉모습으로 사람들을 판단했던 죄, 나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었던 죄, 나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차별했던 죄, 이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사회의 인종 문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3.

둘째,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인종주의의 문제는 개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제도와 구조와 법률과 관습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것들을 만드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만든 사람들의 가치관이 반영 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힘 있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악용하여 차별하고 억압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돌아 보고 지켜 보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고 차별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된다고 여깁니다.

‘한 방울 법’(One-drop Rule)이라는 법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1800년대부터 미국에서 시행되다가 1900년대에 여러 주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흑인의 피가 한 방울만 섞여도 흑인종으로 분류한다는 법을 말합니다. 알고 보면 얼마나 어이 없는 법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도 미국인들은 그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흑인 피가 절반이고 백인 피가 절반입니다. 그럼에도 모두 다 그를 흑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를 흑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동일한 이유로 백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방울 법’이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지금도 인종주의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법과 제도와 구조와 관습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정의로운 법과 제도를 힘 있는 사람들이 악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The color of justice is green”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우리말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 상 가장 훌륭하다는 미국의 법도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오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The color of justice is white”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백인 권력자들이 정의로운 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왜곡시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수 년 동안 이어진 백인 경찰들의 과잉 대응으로 인해 일어난 총기 사고들이 그 예입니다. 물론, 백인 경찰의 조치가 언제나 과잉 진압에 해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흑인에 대한 편견이 원인이 되었습니다. “밤길을 걷는 흑인이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면 필경 무기를 소지한 강도일 것이다”라는 편견이 작용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에서는 자주 무죄 판결이 나오곤 합니다. 법은 공정한데, 그 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주 듣는 구호가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것입니다. 이 구호는 2013년에 트레이본 마틴(Trayvon Martin)이라는 흑인 청년을 사살한 조지 짐머만(George Zimmerman)이 무죄 평결을 받은 사건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구호를 보고는 “모든 생명이 다 중요하지 왜 흑인의 생명만 중요하다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All Lives Matter라는 구호로 맞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은 다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나라의 법률과 법 집행이 백인의 생명만 중요한 것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백인과 흑인의 생명을 동등한 무게로 취급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감추어진 인종주의’(Aversive Rac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종주의적인 관점에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이 분명할 때는 대다수의 백인들이 정당한 행동을 택합니다만,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을 때 혹은 인종적 차이 외에 다른 요소가 개입될 때에는 백인들이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을 차별하는 쪽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차별을 받을 때면 참으로 억울합니다. 인종차별이라는 사실이 느낌상 너무도 분명한데 따질만한 명백한 형식적 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 얼마 전에 교통 사고를 당했습니다. 물론 한인입니다. 뒤에서 오는 차가 운전석 쪽을 긁고 지나간 것입니다. 사고를 낸 사람은 자기가 잘 못 했으니 경찰에 신고하지 말고 합의를 보자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새 경찰차가 다가왔습니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누군가가 신고한 것입니다. 놀랄 일은 백인 경찰이 차에서 내려 사고를 낸 백인 운전자와 몇 마디를 나누고는 먼저 보내는 겁니다. 운전 면허증을 소지하고 있지 않은데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다가와서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캐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쌍방의 잘못이라고 리포트를 썼습니다. 억울하고 분하여 펄쩍 뛸 일을 당한 것입니다. 그분은 어쩔 수 없이 변호사를 통해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감춰진 인종주의’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차별을 당해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례들에 대해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 보아야 합니다. 주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노해야 합니다. 지난 8월 12일에 샬롯츠빌에서 테러로 인해 숨진 헤더 헤이어(Heather Heyer)가 자신의 페이스북 대문에 옮겨 놓은 리사 보어든(Lisa Borden)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If you aren’t outraged, then you just aren’t paying attention.
만일 당신이 분노하지 않고 있다면, 단지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절대적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작품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대상이며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믿는다면,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의 이웃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돌아 보아야 하는 것이며, 관심을 가지고 돌아 보면 때로 분노하게 만드는 일들이 보입니다.

4.

“분노하라”는 말씀에 놀란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서 ‘분노’는 여러 가지 죄들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4:31; 골 3:8). 그래서 “분노하라”는 말은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할 말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하나님의 감정은 분노입니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5)라는 말은 “나는 분노하는 하나님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과 정의와 진실과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정도 이상으로 침해 받을 때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이 분노하시는 장면을 자주 봅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이 인간의 탐욕으로 더럽혀진 것을 보시고 분노하셨고,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는 사도 바울이 베드로의 차별 행위에 대해 거세게 분노했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안디옥에 있을 때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 즈음에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문을 여셨다는 사실을 환상을 통해 확인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이미 로마인이었던 고넬료와 그 가족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이후에 이방 도시들을 다니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이방인과 접촉도 꺼렸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이 편견과 차별의 벽을 넘어섰습니다.

그런데 식사 중에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도착합니다. 이방인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믿었던 야고보 사도가 안디옥 교회의 실상을 조사하도록 대표를 보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자 베드로는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뜹니다. 그러자 그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는 줄줄이 일어나는 겁니다. 다혈질이었던 바울은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우리 대다수에게 있어서 자존심이 분노의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자신의 영역이나 이익이 침해 당할 때도 분노합니다. 이런 것은 ‘사적인 분노’입니다. 성경에서 경계하는 것은 이러한 사적 분노입니다. 반면,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정의를 침해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마땅히 분노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거룩한 분노’라고 부릅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사적인 분노에 대해서는 점점 무감각해지는 반면 거룩한 분노에 대해서는 점점 예민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 바울은 거룩한 분노를 표출한 것입니다.

사적인 분노는 증오로 이어집니다. 지금 미국에 수 많은 ‘증오 단체’가 생겨나고 있고 그들로 인해 ‘증오 범죄’(hate crime)가 점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적인 불의에 맞서 싸운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들의 사적 분노를 풀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서슴없이 폭력을 도모합니다. 지금같은 추세라면 앞으로 이런 증오 단체는 더 많아질 것이고 그 테러는 더 심해질 것입니다. 참으로 염려되는 상황입니다.

반면, 거룩한 분노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의 길을 찾아갑니다. 자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눈물이며 인내이며 희생이며 고난입니다.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해결책은 십자가입니다. 속속들이 죄에 물든 인간에 대한 그분의 진노는 결국 사랑을 통해 십자가라는 해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분노를 일으킨 당사자에게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그 분노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거룩한 분노를 느끼는 순간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내면에서 끓고 있던 분노는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길을 찾아 갑니다. 그래서 미국 민권 운동의 기수였던 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투쟁의 한 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마음에서 모든 증오심을 제거해 주시고 저의 길에 닥칠 어떤 재앙도 마주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God, remove all bitterness from my heart and give me the strength and courage to face any disaster that comes my way.

5.

셋째, 우리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절대적 가치에 따라 존중 받고 모든 차이를 넘어 서서 하나가 되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차별적 행동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제도와 구조와 법률 안에 배어 있는 차별적 요소들에 대해 분노하고 그 분노를 품고 기도하여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을 찾아 행해야 합니다.

지난 19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흑인들이 소수 인종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수 많은 희생을 치룰 때 중국계 미국인들과 일본계 미국인들은 대다수가 침묵했고 잠잠했습니다. 민권 운동의 역사에서 아시아계 이민자의 흔적은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민권 운동이 열매를 거두자 별다른 공헌도, 희생도 하지 않은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그 혜택을 더 많이 누리게 되었습니다. 대학의 ‘소수계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이 그 예입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이 받아야 할 몫이 대부분 아시아계에게 돌아갔습니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민권 운동에서 침묵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연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 논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제도와 권력과 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아시아적인 문화에 일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처럼 오래도록 착취와 억압을 당하지 않았다는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은 대부분 끌려 왔고,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는 차이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남의 땅에 몸 붙여 산다’는 생각이 차별적인 제도와 구조를 견디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백인들이 동양인들을 비교적 너그럽게 대해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백인들은, 아시아 사람들은 근면하고 똑똑하고 친절하다고 여깁니다. 그들에게 잘 해 주어도 자신들의 영역까지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또한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줄만한 좋은 협력자라고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고등학교의 일진 그룹이 공부 잘 하는 모범생 몇을 끼워 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범생들은 일진 아이들이 끼워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여 그들이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못 본 체하며 그들의 덕을 봅니다. 그 응답으로 모범생은 시험 때가 되면 일진에게 예상 문제를 뽑아 줍니다.

그래서 ‘Model Minority’라는 표현이 생겼습니다. ‘모범이 되는 소수 인종’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근면함과 성실함 그리고 검소한 삶의 방식을 칭찬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백인들이 소수 인종에게 불리한 제도와 구조와 법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표현이 흑인들에게 암묵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보라. 당신들은 제도와 구조와 법을 탓하는데, 아시아인들이 같은 상황에서도 성공하여 아메리칸 드림을 누리고 있지 않는가? 문제는 당신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Model Minority’라는 개념은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회피하고 동양계 이민자들을 협조자로 끌어 들이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한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70년대 이후 즉 민권 운동이 열매를 맺은 이후에 이 땅에 왔습니다. 그 이전에 이민자가 된 분들은 너무도 소수여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고 행동을 할만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소수 인종이 누리는 모든 혜택에 대해 공헌한 것이 거의 없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에 대해 늘 고마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백인들이 끼워 주는 것을 고마워할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흑인 편에 혹은 소수 인종 편에 설 줄 알아야 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힘으로 인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지금 이 설교를 하는 것은 목사로서 저의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입니다. 여러분이 교사라면 교사로서의 일로써, 직장인이면 그 자리에서, 법률가라면 그 일로써, 연구원이며 그 일로써, 개인 사업자라면 그 일로써, 가정 주부라면 그 일로써, 은퇴했다면 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야 합니다. 작은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대처하고 거대한 인종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때로는 손해 보는 일입니다. 때로는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라면 용기를 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를 원한다면 침묵하고 외면할 수 없습니다. 나의 침묵으로 인해 그 문제는 한 뼘 더 커지고 한 층 더 무거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회피한 그 문제는 부메랑처럼 흉한 모습이 되어 나에게 돌아 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아름다운 과수원은 우리보다 앞서서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뤄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과수원을 망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도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녀들도 이 과수원에서 맛있는 열매를 따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저는 리사 보어든의 말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고치고 싶습니다.

관심을 가지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고,
분노하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기도하면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If you pay attention, you can’t help but get outraged;
If you are outraged, you can’t help but pray;
If you pray, you can’t help but act.

6.

우리의 궁극적 이상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리와 새끼 양이 서로 어울려 놀고 어린 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안전한 그런 세상이 우리의 이상입니다. 그런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숨겨진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우리의 세상이 그 이상에 가까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먼저 믿는 이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가정에서, 그들의 교회에서 이 일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이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우리의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칼과 총을 들고 일어서서 응징하는 것으로는 결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인종주의적인 증오심으로 인해 칼과 총을 들고 공격해 오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십자가로 맞서야 합니다. 그것이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인들의 인종주의를 허물어뜨린 힘이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민권 운동을 성공시킨 힘입니다. 폭력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찌르는 가시를 품어 안아 녹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길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통해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예수님은 오늘 읽은 ‘팔복’(the Beatitudes)에서 말씀하십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코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가 구한 것이 바로 ‘팔복의 삶’이었습니다.

세상 물질과 권력에 대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의 죄악에 대해서는 슬피 우는 사람이 되기를!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를 사양하고,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사람이 되기를! 모든 이들을 자비하게 대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기를! 평화를 위해 일하기를 소망하고, 의를 위해 박해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그럼으로써 이 땅에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이렇게 소망하고 이렇게 살아갈 때 예수의 제자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기에 떳떳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예수의 제자로서 이렇게 살기를 소망하고 힘쓰기를 기대하십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매일 이 부름에 책임있게 응답하는 평화의 도구로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