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일)상] 인간!
[책(과일)상] 인간!
  • 김영웅
  • 승인 2017.08.29 07: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둥 수용소 | 랭던 길키 | 새물결플러스 | 2014
산둥 수용소 | 랭던 길키 | 새물결플러스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존재의 심연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익숙하지만 낯선 자신의 벌거벗은 실체를 대면하는 시기다. 우리가 고난이라고도, 환란이라고도 부르는 순간이다. 소스라쳐 뒤로 물러서거나, 없는 것처럼 무시해버리지 않고, 이를 정면으로 맞설 용기만 있다면, 반드시 그 심연으로부터 우리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을 편리하게 만든 문명의 발달과 사회에 팽만한 구조적 악은 불행히도 우리가 그 순간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가 숨을 수 있는 여유까지도 충만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우린 좀처럼 그런 순간을 기회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이 준비 없이 오는 것처럼, 고난 또한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어찌 보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시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우린 그 씀씀이를 관리할 수 있을 뿐, 정작 그 시간 자체를 조작할 수는 없다.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나는 그 경이로운 순간에도, 육신의 끝을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에도, 시계의 초침은 매정할 만큼 미동도 하지 않고 동일한 속도로 무한을 향하여 째깍째깍 달려간다. 시간 안에서 살고, 시간 안에서 죽는, 결국 우리 인간은 시간의 굴레 안에 묶여 있는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말, 이십 대 중반의 랭던 길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도 타지인 중국 산둥 (위현으로 적는 경우가 있으나, 웨이시안 Weixian으로 발음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 편집자주)에 위치한 수용소에서 일본인의 감시 하에 자칫하다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2년 반을 살아야만 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미국 중산층에서 엘리트로 자란 그에게 있어선 인생에서 가장 험난한 시기일지도 모를 시간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그 곳에서 그는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가 믿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민낯과 미래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 깊이 고찰할 수 있었다.

산둥수용소(옛 이름은 Weixian Internment Camp)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오래되고 낡아빠진 수용소에는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각계각층의 서구인 남녀노소들이 천 명이 넘게 모이게 되었고, 그들은 제한된 좁은 공간 안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의 종결을 기다리며 자신의 미래와 생명을 함께 공유해야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만 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불편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용소에 집결한 모든 사람은 각자가 스스로 자신도 인간임을 직시해야만 했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수용소라는 한 배를 탄 구성원은 모두 동일한 계급장을, 아니 계급장을 모두 뗀 체로 맨 몸으로, 맨 인간으로만 존재하며 대우받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사람은 물론이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버튼을 누르거나 레버를 당기거나 돌리기만 하면 물이 쏴하고 나오는 화장실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변을 보고 난 후 배설물을 치워주는 사람도 없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도 없었으며, 권위로 다른 사람들에게 허드렛일을 시킬 수도 없었다. 더 앞서 있거나 더 위에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더 뒤쳐지거나 더 아래에 있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원점에 덩그러니 놓여 졌던 것이다.

수용소 생활 전의 재력과 권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원점에 놓여 졌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전쟁으로 인한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된 입장 덕분에, 수용소 사람들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더욱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룰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인본주의자들이 주구장창 얘기하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진보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같은 고난을 받는 상황에서 생기는 특별한 공감능력과 인간이 가진 도덕성과 합리성만으로는 문제의 발생을 모면하기엔 부족했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넘어서는 보다 강력한 힘이자 인간 존재의 심연에 각인된 ‘이기심’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표현형이기도 하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자기의 유익에 의거해서 판단해 버리는 이기심. 랭던 길키 역시 이렇게 고백한다. 이 책을 통해 죄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죄’야말로 본질적으로 이 책의 주제라고 말이다. 그는 또 말한다. 수용소 경험을 통해 배운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회에서 통용되던 거짓된 가치관을 버리고 공통의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말이다. 마침내 서로 이웃을 보면서 그가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인간인지와 관련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책은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고찰을 수용소 생활 초기부터 했던 것은 아니다.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중국에 왔었고, 철학이나 종교적인 믿음에 관련된 영적인 삶이라는 것의 우월성을 신뢰하고 있었던 그는 수용소 초창기 삶의 실제적인 문제들이 물질적이고 정치적임을 간파했고,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철학이나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경험과 기술이라는 결론을 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적이고 무한한 문제 해결 능력이야말로 인간에게 진짜로 필요한 도움이며, 종교나 철학은 오직 선호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할 뿐,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간 낭비라는 확신도 그는 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기술적인 지식과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결국은 도덕적이거나 영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위기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인격의 실패로 인해 야기되었다. 도덕적인 건강함이 없다면, 물질적인 공급이나 혜택이 결여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 랭던 길키에게는 수용소 생활에서 배운 가장 깊은 깨달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점철된 행동을 과감하게 하게 되며, 이후에 그 행동을 하게 만든 실체인 이기심을 합리화한다. 교육을 많이 받고 존경을 받던 사람이라면, 혹은 선교사나 목사와 같은 사람이라면 다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랭던 길키가 목격한 바로는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더 그럴듯한 말로 자신의 이기심을 합리화했다고 한다. 위선을 행해서라도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까지도 인간은 비밀스럽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그 무엇보다도 자기와 자기 소유를 사랑하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과 그 이기심을 치장하려는 위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실재를 전제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 아니면 의지를 이용한 스스로의 힘으로 선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인간 내면에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며 선한 모습, 즉 희망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발현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인간의 이기적인 본 모습, 즉 끊임없는 자기 사랑을 사실로 인정하는 대신, 그러한 자기중심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생명과 지위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반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모습일 것이다. 진짜 신앙은 자신이나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됨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랭던 길키의 머리를 어지럽혔던 문제, 인간의 도덕적 삶의 딜레마를 풀어준 가장 심오한 해답이기도 했다.

산둥수용소 원서 Shantung Compound | Langdon Gilkey | Harper Collins | 2012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옷으로 우리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가 입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옷은 그 무게가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무게를 자각하고 있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옷이 몸과 하나가 되어 분리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정작 인간이란, 외압에 의해 억눌려진 상태가 되어야만 껍질을 벗고 실체를 드러내는 존재인 것일까? 그러나 그래서 그 외압도 결국에는 인생의 필요악임을 깨닫고 또 다시 불분명한 미래로 겁 없이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닐까?

책을 덮고도 여전히 많은 생각이 내 마음과 생각에 충만하다. 인간으로서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칼빈이 그의 5대 강령에서 말한 인간의 전적 타락을 거짓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수용소라는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되게 된다면, 아니 수용소가 아닌 나의 일상적 삶에서도 자주 드러나는 나의 이기심과 위선의 모습에서도, 나도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말문이 막히고 무릎이 꿇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래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은혜를 더욱 감사함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귀한 경험이기도 했다. 인간의 실존적 자아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해 알고 싶어 액면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난 이 책을 서슴없이 추천하고 싶다.
 

글쓴이 김영웅은, 하나님나라에 뿌리를 두고, 문학/철학/신학 분야에서 읽고/쓰고/묵상하고/나누고/배우는 것을 좋아하며, 분자생물학/마우스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가난한 선비/과학자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