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마는 드라마다
도그마는 드라마다
  • 민현필
  • 승인 2017.09.01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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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세이어즈 | 도그마는 드라마다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 2017년
도로시 세이어즈 | 도그마는 드라마다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 2017년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 1893~1957). 그녀는 1~2차 세계대전 어간에 탐정소설 “피터 윔지 경(Lord Peter Wimsey) 시리즈“의 작가이자 기독교 극작가와 변증가로 영,미권에서 널리 알려진 여류 작가다. 우리나라에도 그녀의 추리소설들이 이미 번역되어 있지만, 한국 기독교 출판계나 문학계에 그녀의 작품들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문에 아직도 그녀는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다.

내가 도로시 세이어즈를 만난 건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자의 정신'( IVP : 2007년)이 막 번역되었던 무렵인 신학교 2학교 때 쯤 이었다. 사역 초년생으로서 나 자신의 한계와 이런 저런 사역의 난관에 봉착해 있었을 때, 그녀의 명쾌하고 창의적인 작품을 통해 사역에 대한 상당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다시금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사실 ‘내 인생의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의 책 '창조자의 정신'을 꼽고 싶다. 사실 책 이란 게 내용도 중요하지만 언제 그 책을 만났느냐가 더 중요할 때도 많다. 이 책은 정말 시기적절하게 내게 ‘구원의 빛’을 비춰준 책 중 하나였다.

창조자의 정신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 2007년

이번에 번역 출간된 '도그마는 드라마다'는 이미 번역 출판된 '기독교 교리를 다시 생각한다'(2009년)를 재간행한 것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교회 안에 불고 있는 ‘교리교육 열풍’이나 ‘드라마로서의 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시점과 맞물려 좀 더 시의성을 갖춘 제목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이 책 '도그마는 드라마다'는 도로시 세이어즈가 이미 발표했던 에세이들을 편집 출간한 책이다. 즉, 성육신, 부활, 7대죄, 악의 기원 문제 등의 교리적 내용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미학, 문학 형식의 가치, 노동 문제 등등의 다양한 주제들을 망라하고 있다. 때문에 그녀의 다양한 관심사들을 한권의 요약된 형태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이 다양한 주제들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그녀만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창조자의 정신'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도로시 세이어즈의 대표작 피터 윔지 경(Lord Peter Wimsey) 시리즈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자신의 저서들에서 당시 영국 국교회와 영국 사회를 향해 예견했던 선지자적 통찰과 조언들이 그녀의 세상을 떠난 직후에 본격적으로 그 진가를 발휘했던 것처럼 2009년에 출간된 '기독교 교리를 다시 생각한다'도 지금 되돌아보면 기독교 출판 시장의 흐름을 한 걸음 앞선 기획은 아니었던가 싶다. 도로시는 이 책에서 기독교 교리(특히 삼위일체론)를 신학적 관점에서 기술하거나 변증하기 보다는 자신이 속했던 전문 분야인 극예술 및 문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창작 과정에 빗대면서 그것의 보편성과 타당성을 논증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교리의 필요성에 대한 신학적인 논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해 이 책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아쉬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과 신학 사이의 학제간 연구와 협력을 통해 현대인들의 언어와 감성에 부합하는 교리 해설의 필요성을 이보다 더 설득력 있게 논증한 책은 쉽게 만나기보 어려울 것이다. 또한 아직도 연구가 미흡한 기독교 미학과 예술론 분야에서 그녀만큼 선구적인 통찰과 설득력 있는 논증을 이처럼 세련된 언어로 전개한 이도 드물다.

이번 번역본 이전에 기독교의 교리를 다시 생각한다(2009년)로 출판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또한 탐욕적인 자본주의 문명 의 맹점과 그 속에서 왜곡된 노동관과 바른 소명 의식의 상실에 대한 그녀의 통렬한 지적은 지금도 여전히 적실하며 귀담아 들을 만하다. 그래서 본격적인 소개에 앞서 필자의 작은 바람이 있다면, 그녀의 이 탁월한 통찰이 아직도 ‘시대를 앞서간’ 논의에 그친 것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2편 삼위일체론적 미학(예술론)

도로시가 기독교 변증가로서 활동하게 된 계기는 1938년 영국의 <선데이타임즈> 편집장이 그녀에게 수난 주일을 맞아 특별 기고문을 요청한 일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는 “이제껏 공연된 가장 위대한 드라마는 기독교의 공식 교리(신경)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작성했다. 같은 시기 다른 한 잡지를 통해 “도그마는 드라마다”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기독교 변증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도그마는 드라마다'라는 책 제목은 바로 이 때 발표된 에세이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1장 서두에서 도로시는 당시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나쁜 평판을 얻고 점점 텅 비어가는 현상 지적한다. 그녀는 그 원인을 분석하면서 그것은 교회가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발생한 ‘지루함’에 그 원인이 있음을 지적한다. 즉 교리가 지루한 것이 아니라 교리에 대한 무시가 교회를 지루한 공간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그 지루함의 원인을 두 가지 차원에서 지적한다. 첫째로,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혹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암송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장에서도 그녀는 ‘현대교회가 신뢰를 잃은 이유’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은 교회가 신학을 고집해서가 아니라 ‘신학으로부터 도망쳤기 때문’임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더 나아가 도로시는 교회를 초월하여 위기에 처한 현대 사회는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교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내는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도로시는 왜 이렇게 확신에 차 있을까? 도로시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인류) 역사상 인간의 상상력을 가장 크게 뒤흔든 흥미 진지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한 편지에서도 그녀는 ‘성육신 사건’을 기독교의 가장 극적인 요소요, 인간 정신이 접한 그 어떤 것보다 극적’이라고 쓴 바 있다. 이러한 도로시의 견해는 그녀가 삼위일체 교리를 어떤 관점으로 이해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녀에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최고의 창조적인 예술가이시다. 2부 1장에서 도로시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을 설명하는데,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있어서 특별히 그분의 말씀, 아들에 의해 혹은 그를 통해 창조하시고, 그 아들은 아버지 곧 첫째 위격의 영원한 창조 활동을 통해 계속해서 생성된다고 설명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그녀의 독창적인 변증서인 '창조자의 정신'에서도 그녀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성을 자신만의 독특한 유비로서 묘사 하는데 성부 하나님은 아이디어,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아이디어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발현된 창조적 에너지, 성령은 그 아들을 증거하는 창조적인 힘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도로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됨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인간의 ‘창조성’ 혹은 ‘창조적 정신’이다. 2부 7장에서 도로시는 이 ‘창조적 정신’을 ‘우주의 나무결’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마치 나무에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나무의 나이테로 남겨지듯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적 정신’이 그분의 형상된 인간에게 고스란히 새겨져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사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 399-421)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녀만의 독창적인 교리론과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력적 사역을 주목하면서 도로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정신 구조’가 그분의 창조물 가운데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창조자의 정신’에서 그녀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인용하는데, 이 책에서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개념이 인간의 상상의 세계 속에서 충분히 이해 가능한 개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사실 어거스틴은 이미 자신의 '고백록'(397-400, 13.11.12) 중 '인간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해 논하면서 후대 학자들이 소위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르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어쨌든 이러한 어거스틴의 주장을 근거로 도로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허무맹랑한 교리가 아님을 밝힌다. 그것은 인간이 이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험 속에서도 늘 존재하는 어떤 구조와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소위 ‘행동의 삼위일체 구조'를 제안한다. 따라서 최고의 예술가이신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사역하신 것처럼, 그분의 형상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창조성 혹은 창조적 지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경험 속에서도 이 삼중구조(도로시가 창조자의 정신 8장에서 얘기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신구조')를 발견하며,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성과 타당성을 갖는 개념임을 주장한다. 결국 도로시에게 있어서 교리란 '우주에 대한 사실의 진술'이며, '창조 정신 그 자체에 대한 사실적 관찰'을 의미한다.

3편(교리론)

서론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최근 몇 년간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교리 교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안의 각종 치부들의 드러나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 일들이 잦아지면서 기성 제도권 교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아울러 교리 무용론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교리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리가 ‘삶이 없는 앙상한 교조주의’조장한다거나, 심지어 예수와 같은 타자에 대한 환대는커녕 오히려 ‘정신적 폭력’을 가하기 일쑤이다. ‘답이 없는 길’을 걷는 것이 신앙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특정 교단이나 신학 전통이 신앙과 삶에 대한 정답이라도 소유하고 있는 것인 냥 독선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비판한다. 또 성경의 내러티브를 약화시키는 것을 우려하거나,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이후로 꾸준히 제기되어 온 비판처럼 ‘하나님을 객관적 언어로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를 경계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저마다의 비판들이 그 나름의 맥락들이 있고, 분명히 새겨들을 만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교리적 토대 위에 서 있는 신앙인들이 모두 다 타자에 대해서 폭력적이고, 교조주의에 빠진 삶을 살고 있다는 식의 섣부른 일반화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기독교 교리가 인간의 삶의 깊이와 다양성을 다 담아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삶의 결이 다르고 감수성이 다르다. 똑 기독교라는 범주가 아니더라도 그로 인한 갈등과 반목은 일상다반사다. 다만 교리는 우리 순례의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붙들어 주는 잠정적인 이정표 정도로 느슨하게 바라보는 태도가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도로시가 표현한 것처럼 그것은 그저 ‘드라마’의 대본 정도인 것이고, 이마저도 우리가 채워가야 할 여백을 가진 미완의 대본이다. 그러나 결론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이 위대한 드라마가 마침내 승리의 마침표를 찍게 되리라는 궁극적인 소망을 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교리 자체를 불온시 여기는 태도의 이면에는 다 그 나름의 진정성 있기에 전적으로 틀렸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리 현명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교리 없는 기독교’라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하겠는가? ‘창조자의 정신’에서 도로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현재의 우주는 작품을 하나씩 탄생시키는 ‘거대한 연작’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연작을 이루는 모든 부분이 중심 사상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 중심 사상이 독자에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도로시에게 있어서 ‘그 중심 사상’이란 창조자의 정신, 즉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다. 그런데 그녀가 보기에 ‘그 중심 사상’은 창조물 가운데 삼위일체적 구조로 새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다만 부분적으로만 알고 이해할 뿐인 것이다.

한편 2부 7장에서 도로시는, 창조자의 정신을 가리켜 ‘우주의 나무결’이자 참’된 본성의 법칙을 인식하게 해주는 어떤 패턴(pattern)’이며, 우리의 경험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이의 행위가 그 패턴을 따르는 동안에 그 경험을 힘 있게 해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가 보기에 삶과 일의 패턴은 이 우주의 패턴과 부합하지 않을 때 ‘껄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본성의 법칙을 거스르게 된다는 것이다. 또 이 패턴은 살아 있는 우주의 실재 구조에 부합하고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속에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창조자의 정신’에서 그녀가 얘기한 ‘행동의 삼위일체 구조’ 혹은 ‘삼중구조’다. 따라서 신학자가 하나님께 부여하는 그 존재의 패턴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발견하는 패턴과 세세한 점에서 정확히 일치한다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도로시에게 교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의적 규범이 아니라 그 동안 논증해 온 우주의 삼위일체 구조와 그 속에 어렴풋이 드러난 ‘창조자의 정신’과 ‘자연법에 대한 확증’이며 ’우주에 대한 사실의 진술’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로시는 교리가 ‘진리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이며, 우리는 본성상 반응을 요구받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특히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는 이성과 자연법의 견지에서 판단할 때 인간의 경험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결코 신화적인 부분이 없으며, 철저히 유비적이다(왜냐하면 그 교리를 표현하는 인간의 언어적 속성 자체가 유비적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논점들을 제시하면서 그녀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 동안 예술가들은 교리가 창조적 정신 그 자체에 대한 ‘사실적 관찰’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학자들은 교리들을 적용할 때 신성한 창조주만 의지할 뿐, 예술가들이 나름대로 이해한 진리로 교리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예술가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옛 선배들의 교리적 언어들은 우리 시대의 창조적 상상력을 가진 예술가들에 의해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왜 도그마는 드라마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관한 위대한 드라마를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이 바로 도그마(교리, 신조)이기 때문이고, 그 도그마는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얘기했던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영감과 창조적 정신이 반영된 온 우주 만물이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는 극장임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편 성례전 신학

도로시 세이어즈의 사상 중에서 필자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은 ‘일과 소명’(노동)에 관한 부분이다. 이 소명론은 그녀의 독특한 성례전 신학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로시는 온 우주가 ‘창조자의 정신’에 의해 설계되고 만들어졌으므로 당연히 ‘그분의 존재의 패턴’을 띌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 창조자’ 역시 창조주의 지성과 동일한 패턴을 띌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나님-인간-우주는 마치 나침반이 북극을 가리키듯 서로 조화롭게 한 방향 정렬을 이룬다. 그녀는 그 일관된 패턴을 ‘우주의 나무결’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곧 우리의 양심과 이성이 참이라고 긍정할 만한 참된 본성의 법칙과도 부합하는 자연법을 지칭한다. 때문에 <도그마는 드라마다> 2부 7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이 패턴이 살아 있는 우주의 실제 구조에 부합한다고, 또 그것이 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 속에도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따라서 다른 이들이 우주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우주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다고 느낀다면, 그들의 삶과 일의 패턴이 비뚤어져서 우주의 패턴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요컨대, 그들은 자기 본성의 법칙에 거슬러 산다는 말이다”(p.348)

잠시 곁길로 빠져본다. 이러한 도로시의 변증적 논법은 범인들이 부정하기 힘든 자연법을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지혜로운 것이다.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그 자연법과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삼중구조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그녀만의 설득력 있고 독창적인 변증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듯 보인다. 그러나 과연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녀가 주장하듯 삼중구조를 이루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고, 비록 그녀가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의 가능성을 제시하긴 하지만, 주로는 작가들의 세계에 한정된 사례들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은 어떤 면에서 도로시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서 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녀는 극작가의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신학을 재구성하려 한 것이 아니라 신학자들과 함께 협업적인 차원에서 기독교가 설득력 있는 종교임을 당대의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언어로 변증하려 했기 때문이다. 공동체적 성경 읽기의 진정한 원조라고 할까.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신학자들의 약점도 꼬집는데, 신학자들은 교리를 설명할 때 ‘인간 창조자’에 빗대어 설명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그저 아버지의 상징이나 창조자의 상징을 사용하더라도 피조물과는 다른 전적 타자로서의 창조주만을 강조해 왔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도로시 세이어즈의 책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녀는 1부 4장에서 죄란 유비적인 의미에서 우주의 패턴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심판 또한 ‘참된 인간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른 결과 맞닥뜨리게 된 ‘불가피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의 현재적 심판인 셈이다. 그녀는 이를 물리적 현상에 빗대어 설명하는데, 예를 들어 ’발진티푸스와 콜레라’는 ‘더러운 생활방식’에 대한 심판이며, ‘우주의 물리적 구조’가 가진 본질적 특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물리적 구조’에 대한 도로시의 이러한 특별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성례전( 라틴어 sacramentum, 영어 sacrament) 신학과 연결된다. 예수의 성육신을 가리켜 ‘기독교의 가장 극적인 요소이자, 인간 정신이 접한 그 어떤 것보다 극적’ 사건이라고 보았던 도로시는 이 위대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인간다우심’(manhood)이 갖는 적극적 함의에 주목한다. 성육신은 인간을 포함한 물리적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다. 그녀는 1부 4장 ‘신조인가, 무질서인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물리적 우주를 선하고 창조적으로 다루는 일은 모두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을 남용하는 행위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는 짓이다…이 때문에 상업적 목적으로 사람이나 물질을 착취하는 행위는 온갖 종류의 예술의 타락과 지성의 악용과 더불어 심판대 아래 서게 된다”

이와 같이 도로시는 ‘하나님의 인간다우심’ 안에서 물질성과 신체성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을 읽어냈고, 이것들을 악하게 여기거나 특정 주체의 욕망을 위해 상업적으로 착취하는 행위를 거부한다. 그런데 그녀가 보기에 탐욕적인 서구의 자본주의 문명은 인위적인 소비의 자극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쓰레기 더미 위에 세워진 사회’요 ‘모래 위에 지은 집’ 그 자체였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과잉생산, 과잉설비’의 문제를 지적하곤 하는데, 도로시는 그 현상의 이면에 인간의 참된 본성을 거스르는 탐욕과 그로 말미암은 왜곡된 노동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녀의 관점에서 볼 때, 2차 세계대전은 그로 말미암은 ‘심판’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일에 관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전쟁 이후의 서구 문명의 미래 역시도 장담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질문한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일과 일의 열매에 대한 이런 태도를 계속 견지하고 싶은가, 아니면 옛 사고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응답에 우리의 경제적 미래가 달려 있다고 믿는다”

이 질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글쓴이 민현필 목사는, 경기도 군포시에 자리한 산울교회 부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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