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교회에 구원이 있을까?
대형교회에 구원이 있을까?
  • 조경윤
  • 승인 2017.09.06 10:1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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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il.co.uk

결론부터 말하면 대형교회에 구원은 없다. 이 말은 단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무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형교회에도 구원은 있겠지만 정치에서 여론조사를 사용하는 것처럼 퍼센트(%)로 볼 때에 압도적으로 구원받지 못할 성도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인데 우리는 그동안 왜 몰랐을까? 왜 속았을까? 억울하고 분하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위기에 처한 기독교가 십자가의 정신과 능력으로 문제를 정면돌파하지 않고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대형교회라는 우상으로 하향평준화를 이루었다. 마치 초대교회가 모진 픽밥과 박해 속에서도 순교하고 카타콤으로 들으가면서도 십자가의 정신과 능력으로 승리했지만 콘스탄틴 노플에 의해서 기독교가 국교화가 되고 대형화가 되면서 변질되고 타락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단은 지금 그 때와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속지 말라. 속으면 안 된다. 속으면 그 결과는 비극이고 비참함이다. 깨어 기도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의 여정을 한걸음씩 걸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 확실한 영분별은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은 분명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과 삯꾼들이 넘쳐날 것이고, 사단은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교회 안에 사단의 종들과 사단을 숭배하는 사단에게 속아 넘어간 성도들이 많다는 것이다. 예수 이름을 이용해서 자신의 야망과 욕망을 채우고 성경을 영적인 사기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거짓 선지자이고 삯꾼이다. 이러한 자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무당의 굿판에서 같이 놀아나는 것처럼 일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만을 원하며 복 받기만을 간구 한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마 7:13-14)고 말씀해 주셨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고 강조해 주셨다.

과연 대형교회를 다니는 절대 다수의 무리들에게 좁은 문과 좁은 길의 영성이 있을까? 그들은 과연 좁은 문을 열고 좁은 길을 걸어 가고 있는 것일까? 의심하게 된다. 거의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은 수평이동으로 성장했고 부흥했다. 예수 안 믿는 불신자들을 전도하여 구원한 것이 아니라 중소형 교회를 다녔던 성도들이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목회자 및 교회 리더쉽과 갈등이 생길 때 대형교회로 이동한 것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고난이 싫고, 고통이 싫고, 어려움과 힘듬이 싫고, 헌신하기 싫고, 충성하기 싫어서 대형교회로 도망간 것이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한 때는 400%의 성장을 이루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부흥이 멈춘시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마이너스 성장의 시대이다. 그것도 아주 심각할 정도로 말이다. 30% 한국교회에 아동부가 아예 없다. 김동호 목사의 말에 의하면 1,200만 성도를 자랑했던 한국교회가 지금은 650만 정도라고 한다. 청소년 사역자로 유명한 다니엘 김 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청소년 그리스도인의 인구가 지난 10년 동안 5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한국교회 전체의 숫자는 절반이 날라간 것이고 청소년만 본다면 5분의 4가 사라진 것이다. 위기이다. 긴장해야 한다.

말세는 부흥과 성장의 시대가 아니다. 환란과 핍박이 예고된 시대이다. 과연 개척교회와 중소형의 교회가 싫어서 대형교회로 피난간 성도들이 환란과 핍박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제 시대 때에 수많은 목사들과 성도들이 천황을 숭배하면서 신사를 참배했던 것처럼 배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십자가의 정신과 능력으로 무장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걷고 있지 않는 자라면 불시험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대형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는 그 수가 날마다 더해졌던 교회였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부흥은 예수를 안 믿던 불신자들이 회심하여 회개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결코 수평이동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다. 대형교회라 하더라도 다른 교회에서 이동해 오는 것은 막고, 불신자들과 교회 안 다니는 상처받고 시험에 든 성도들만을 대상으로 전도하여 수가 늘어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과거에는 수평이동으로 성장도 하고 부흥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새신자의 구원은 없고 더욱이 그나마 수평이동의 성장도 둔화되고 또 퇴화 되었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기에 성도들의 헌신과 충성도 없다면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큰 교회라고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일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전체 교인 수에서 20% 정도가 열심이 있어도 건강한 교회라고 평가한다. 30%가 열심을 내고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대단히 건강한 교회라고 말한다. 이 말이 무엇인가? 한국교회 스스로가 대형교회의 70-80%의 성도들은 아무런 봉사나 섬김 없이 주일예배만 딸랑 출석하고 만다는 것 아닌가? 교회 의자만 따뜻하게 달구고 나가는 벤치 워머들이다.

사람들이 대형교회를 가는 이유를 보면 그 안에서 좁은 문과 좁은 길의 영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거의 대부분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이고, 물량주의적인 이유이다. 교회에서 제공해 주는 프로그램이 좋고, 아이들 교육을 위한 시스템이 좋고, 성가대가 좋고, 찬양팀이 좋고, 화려하고 멋지고 웅장하고 세련된 예배가 좋고 예배당 건물이 좋고 대충 이런 이유들이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교육 시스템이 좋은 대형교회의 교회학교가 배출해 낸 아이들이 교회를 떠난다. 신앙을 떠난다. 지금 한국교회는 대학 청년부, 중고등부, 아동부의 급격한 몰락을 경험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다음 세대가 없다. 다다음 세대는 캄캄하다. 심각한 위기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인 것이다. 이것을 느끼지 못하고 지금이라도 해결하지 않는다면 교회 성장학이라는 헛된 우상을 섬긴 결과로 한국교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유럽의 교회들이 문을 닫고 술집으로 바뀌게 된 것처럼 말이다.

미디어의 발전으로 전파를 통해 설교가 넘쳐나고 있다. 예배의 홍수이다. 그런데 과연 생수는 얼마나 될까? 물은 많은데 마실 물이 적다. 대형교회 강단에서 전파되는 설교의 대부분은 기복주의 설교이다. 예수 믿고 잘 먹고 잘 살고 복 받으라는 것이다. 무당이 하는 말과 별반 차이가 없다. 회개의 멧세지가 없다. 찾아보기 힘들다. 복음은 그 자체가 회개의 복음이다. 회개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개없는 복음은 복음이라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다. 이 말은 신령과 진정으로 참으로 예배하는 자가 찾고 찾아야 할말큼 적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믿음 있는 자를 보겠느냐고까지 언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형식적인 예배, 탐욕스런 예배, 이기적인 예배, 가증스런 예배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리신다. 한국교회(대형교회)가 드리는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 받으시는 예배였다면 오늘날 이와 같은 심각한 결과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맺은 열매이고 한국교회의 상태를 나타내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썩었다. 썩어도 너무 썩었다. 변질되고 타락했다. 악취가 진동한다.

천국은 입술로 주여! 주여! 한다고 다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다. 내 삶의 운전대를 누가 잡고 있는가? 내 삶의 브레이크와 악셀을 누가 밟고 있는가 말이다. 내가 잡고 내가 운전한다면 내가 주인이지 예수님은 없는 것이다. 주님이 잡고 주님의 뜻대로 인도하고 이끌어 가시게끔 내 삶을 맡겨 드려야 한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좁은 길이시다. 길이 협착하고 좁아서 찾는 이가 심히 적은 갈보리 십자가의 생명의 길이다. 결코 문이 크고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은 사망의 길이 아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이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이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했다.(마 7:15) 그래서 열매를 보고 분별하고 판단하라고 하신 것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열매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판단치 못한다면 이미 그 자신 역시 지옥 백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석이 아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인간인 것이다. 소경된 자가 소경을 인도하는데 소경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이다. 십자가의 능력이다. 대형교회에 무슨 능력이 있는가? 어떤 십자가의 능력을 갖고 있는가? 열매로 보여주어야 한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채찍질 당하시고 못박히시고 창에 찔리시며 수모와 조롱 속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이 없다. 가축의 똥냄새가 나고 더러운 베들레헴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없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낮고 천한 이 땅으로 성육신 하여 가난한 심령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 없다. 겸손하시고 온유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이 없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섬김의 본이 되신 예수님이 없다. 부자의 큰 돈을 외면하시고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시며 기뻐하셨던 예수님이 없다.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의 열매들은 얼마나 많은가? 차고 넘친다. 풍성하고도 흘러 넘친다. 대접받고 높임받고 헤롯의 궁전과 같이 화려하고 웅장하고 최고급 승용차에 부자들의 큰 돈에 기뻐하며 장로직을 매매하고, 상상도 하지 못할 연봉과 Benefit(혜택, 이득), 영수증 없이 마음대로 쓸수 있는 검은 돈 비자금, 돈을 뿌려서 총회장 되고, 교회의 재산과 각종의 유관기관들의 자리를 자신의 이름으로 등재하고 친인척들이 진을 치고, 이사진을 장악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횡령, 배임하고도 대법원에서 죄질이 나쁘다고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원래의 그자리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복직하는 기괴한 일들이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계셨다면 채찍을 들고 휘두르시며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다 뒤집어 엎으셨을 것이다.

예수 믿는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가는 자들이다. 대형교회 성도들에게 이것이 있는가? 무엇을 부인했고, 무슨 십자가를 지고 있는지 열매로 보여 주어야 한다. 무엇을 부인하고 무슨 십자가를 졌단 말인가? 대형교회에 구원이 없다. 구원이 있다면 대형교회 안에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들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대형교회 안에서도 길이 협착하고 좁아서 찾는 이가 심히 적은 좁은 문을 열고, 좁은 길은 걸어가는 소수에게만 이루어질 것이다. 대형교회에 구원이 있을까? 글쎄…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절대 다수는 구원받지 못할걸…

조경윤 목사 <푸른초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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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진 2017-09-06 17:24:42
대형교회에 구원은 없다! VS 대형교회에도 구원은 있겠지만... ???????

나그네 2017-09-07 09:40:47
칭의는 믿음으로, 성화는 순종으로 아닌가요? 교회는 구원을 담보하는 그 어떤 단위도 아닙니다. 반대로 미자립교회나 소형교회에는 구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나그네 2017-09-07 09:46:34
아래 제 설명이 너무 짧았습니다. 대형교회 무용론을 지지합니다. 그렇다고 대형교회이기 때문에 구원이 없다는 식의 접근은, 매우 큰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구원문제는 교회공동체의 크기와 아무 관계없지요. 자칫 신학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