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DACA) 폐지에 직면해서"
"다카(DACA) 폐지에 직면해서"
  • 이진영
  • 승인 2017.09.10 0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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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사랑의 언어가 당장 절실한 지금
ⓒsojo.net

지난 5일, 트럼프 대통령은 다카(DACA)라고 알려진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 프로그램(the Deferred Action for Childhood Arrivals)의 시행을 폐지하겠다고 고지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안타까움과 분노와 염려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다카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입안하여 시행한 행정명령입니다.

부모와 함께 어린 나이에 이민을 와서 아직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한 청소년과 청년들이 미국사회의 일원으로서 합법적인 체류와 학생의 신분을 유지하고 또 직장에 취직할 수 있는 자격을 제공했던 한시적 프로그램입니다. 다카의 수혜를 통해 합법적 신분과 삶을 살게 된 청소년들은 어린 시절 미국에 입국해서 부모가 사용하는 모국어 외에는 모국의 문화에 전혀 노출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미국 말고는 고향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함께 자라고, 교육을 받고, 정당한 (혹은 불공평한 환경 속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경쟁에 임하면서 정직하고 건전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들에게 부모의 모국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아니고 그저 가족의 역사일 뿐입니다. 다카는 이들을 보호하고 사회에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 더 이상 이 프로그램의 시한을 연장하지 않고 폐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비인도적인 발언과 행동을 일삼는 데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미국 자국민의 취업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는 엉뚱한 대의에 가장 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대선 경선 과정에서 백인 중산층과 저소득층에게 그들이 경제적/문화적 손해를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민 인구의 유입과 그들의 사회진출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트럼프는 지속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백인들의 정서적 불만을 대변하는 정책과 주장들을 계속해서 펴오고 있습니다.

이번 다카 폐지 결정도 미국 백인 사회에 팽배해 있는 유색인종 이민자들을 향한 불만과 분노와 미움을 자극하고 심지어 이를 대변함으로써 계층간의 갈등을 자초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장 80만 명에 해당하는 다카의 수혜를 입고 있던 청소년, 청년들의 삶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그중에 한인들도 1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소수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인 사회에 다카 폐지는 커다란 재난의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이웃의 일이고, 우리 가족의 일입니다. 마음이 무겁고 슬픔이 차오릅니다.

정말로 트럼프 대통령이 말하는 것처럼 다카와 한국과 주변 국가들과의 FTA 조약 때문에 미국 내 백인들의 일자리가 위축되고 그들의 삶에 어려움이 찾아온 걸까요? 그럴리가요! 당장 이번 폐지 발표가 난 후부터 큰 경제적 손실에 직면하게 된 여러 대학들은 발 빠르게 수혜 청년들에 대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심지어 어떤 단체에서는 다카 폐지가 가져올 경제적 손실이 얼마나 큰지 계산해서 발표하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민자의 비중이 높은 주들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 같은 조치에 법적으로 대응하고 나서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경계해야 할 것은 다카 프로그램이, 다카의 폐지가 가져올 경제적 손익의 격차를 따지는 일은 아닐 겁니다. 정말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근간에 팽배해진 계층간 갈등의 원인이라 할 “분쟁의 화법”입니다. 누군가의 동의와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가장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 그들이 처한 현실적 어려움을 들추며 그것이 누군가 다른 이들의 불의한 행동으로 인한 것이라고 이간질을 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게 하고, 가해자 그룹에 대한 분노를 유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피해자가 된 이들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는 것이죠. 이러한 미움과 분쟁의 화법으로 사람의 지지를 얻은 선동가는 그 지지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계속해서 더 자극적이고, 현저한 분쟁의 소지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메사추세스 주의 상원의원인 에드 마키(Ed Markey)는 이러한 트럼프 대통령의 언사를 복음서의 본디오 빌라도가 한 짓과 닮았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준 후에 빌라도는 자신의 손을 물에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고 책임회피를 합니다 (마 27:24). 그러나 오늘날 사도의 신앙을 이어받은 모든 교회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공의와 불의를 가늠하시는 주님의 저울은 이 일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어려움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더욱 상처를 입고 낙심한 이웃을 돌아보고, 혹여 우리 안에는 이 미움과 분쟁의 화법이 사용되고 있지 않은지에 마음의 무게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정치가의 입이든, 이러 저러한 사회단체의 지도자들의 생각이든, 심지어 우리의 일터와 가정과 이웃과의 관계에서든 이 분쟁의 언어는 사랑의 복음의 연결고리를 삭아 끊어지게 하는 강렬한 독극물입니다. 그 옛날 오순절에 임한 성령께서 각 나라와 민족과 지방의 막혀있던 미움과 이기적인 언어의 담을 허물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전했던 것처럼, 복음의 사랑의 언어가 당장 절실한 지금입니다.
 

글쓴이 이진영 목사는, 메릴랜드 복음의빛 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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