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한 복음서 여행
예수와 함께한 복음서 여행
  • 정현욱
  • 승인 2017.09.1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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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그레고리 | 예수와 함께한 복음서 여행 내 깊은 갈망의 답을 찾아서 |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7년
데이비드 그레고리 | 예수와 함께한 복음서 여행 내 깊은 갈망의 답을 찾아서 |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7년

점입가경(漸入佳境)!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나도 모르게 생각났던 사자성어다. 초반의 뻔해 보이는 시작에 비해 본론은 그런대로 읽어줄만했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자 ‘위대한 데비이드 그레고리’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사진사는 카메라 뒤에 자신을 숨기고, 작가는 글 속에 자신의 영혼을 버무린다고 한다. 이미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포이에마, 2008년) 등으로 수많은 크리스천들의 사랑을 받았다. 데이비드 그레고리는 비단 크리스천들뿐 아니라 교회 밖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사랑을 받은 작가다. 그의 특징은 쉽고, 단순하고, 명료하다는 것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은 고개지라는 중국 동진 시대의 유명한 화가에 얽힌 이야기다. 그는 사탕수수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반대로 단 맛이 가장 많은 밑동부터 먹지 않고 항상 단 맛이 적은 가느다란 줄기 부분부터 먹었다고 한다. 이를 본 친구들이 고개지의 특이한 행동이 궁금해 물었다. 고개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갈수록 더 맛이 나기 때문(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처음 씹히는 사탕수수는 텁텁하고 칼칼하다.

데이비드 그레고리 |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서소울 옮김 | 포이에마 | 2008년

그러나 깨물면 터쳐 나오는 사탕수수의 단물은 원시의 가공되지 않는 원초적 행복을 선물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러나 텁텁함으로 시작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고개지는 사탕수수를 먹는 것조차 인생으로 은유(隱喩) 시킨다. 나는 데이비드 그레고리의 책이 고개지가 사용했던 은유라고 생각한다. 한 장 한 장 읽은 것이 많아지고, 읽을 양이 적어지면서 쉬웠던 서술이 단단해지고 숙성되어간다. 그야말로 점임 가경이다. 옮긴이 최종훈은 책의 말미에 자신의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 ‘쉽게’를 향한 지은이의 집착은 용어와 표현에서도 여실하다. 신론, 기독론, 성령론으로 이어지는 조직신학 교과서의 말본새로 윽박지르는 대신, 함께 먹고 자는(그리고 죄송하지만 싸기도 했을) 친밀한 동반자 예수의 말투를 동원한다.”

그렇다. 데이비드 그레고리의 책은 쉽다. 아니 살살 어르고 달랜다. 약 먹기 싫은 아이를 위해 약에 꿀물을 넣어 준다. 그러나 가볍지 않다. 초반의 뻔해 보이는 이야기가 갈수록 흥미진진해진다. 한 장 한 장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책 끄트머리에 닿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문장은 강렬하다.

“세상이 끝나버린 건 아니었다. 끝난 건 내 세상뿐이었다.”

이렇게 이 책은 그동안 사랑해온 남자와 헤어진 후 한 여인의 삶이 무너지는 순간 시작된다. 그녀에게 상실(喪失)은 수많은 연인들의 통계학적 높은 수치의 평범한 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세상이 끝나 버린’ 것이었다. 다만 그것 세상이 ‘내 세상뿐’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연인이 떠나버린 주말은 외로웠고, 흥미진진하고 화려했던 주말은 온통 잿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오래된 흑백 무성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순간 누군가로부터 한 장의 카드가 날아온다.

가장 가까이에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가세요
예수님과 함께하는 진짜 모험이 시작됩니다.

상실 그리고 결핍, 그 순간에 찾아온 ‘모험’으로의 초대는 그녀를 2천 년 전 복음서의 시대로 이끌어 간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파도가 들이닥친다. 요동치는 배에서 떨어져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렇게 모험은 시작되고, 복음서에서 나오는 많은 장면들 속을 거닐기 시작한다. 풍랑치는 바다에서 겨우 살아남은 엠마는 사마리아 우물가로 인도된다. 그녀는 ‘그녀와 내가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속단한다. 엠마는 다섯 명의 남자를 사귄 적도 없고, 누군가로부터 외면당한 적도 없다. 제이슨이 자신을 버렸을 때 수많은 친구들이 위로해 주었다. 다만 그것이 무의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속삭인다. “그 여인이 바로 당신이에요. 엠마.”

부자 청년을 만난다. 그는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시 엠마와 부자 청년은 공통분모가 없는 듯하다. 예수는 다시 속삭인다. 삶은 실망의 연속이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행복하지 않다. '비참'이란 과한 단어가 청년을 수식한다. 왜일까? ‘피조물의 세계에 속한 그 무엇도 가장 깊은 인간의 갈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엠마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진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녀는 다시 예수와 걷는다. 니고데모를 만나고, 갈릴리 호수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결핍된 군중을 만난다. 정신없이 음식을 만나는 마르다를 곁에서 보고, 게을러 보이는 마리아도 만난다. 그러나 예수의 머리에 자신의 전부를 드렸던 여인은 마르다가 아닌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범접(犯接) 하기 힘든 경건의 수준을 보여 주었다. 그녀도 자신과는 너무 멀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는 말씀하신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법이에요.”

누구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베드로이고, 누군가는 니고데모이고, 누군가는 마리아다. 그러나 가끔 유다가 되기도 한다. 한 삶 속에 여러 이야기가 중첩되고 섞여 있지만, 큰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다. 삶으로 써 내려가는 이야기다. 문득 며칠 전 아내가 물었던 질문하나가 마음을 짓누른다.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모든 마음을 쏟아 헌신해 본 적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없었다. 그저 목사로서 정직하고 바르게, 기능적인 직무만을 기계적으로 반복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 해주신 일이 너무나 감사해서 어디를 가든 삶이 고스란히 담긴 옥합을 깨뜨려 사랑을 쏟아 붓는 거예요. ... 하나님의 사랑이 그녀의 삶을 몰아가는 거죠.”

탁월함은 좀 더 하는 것이다. 이제 됐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 한 시간 더 일하고, 조금 더 노력하고, 조금 더 집중하고, 조금 더 공부하는 것이다. 그녀의 탁월함은 전부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제자들보다 조금 더 헌신했다. 좋은 목사, 실력 있는 설교자로 만족하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은 썰물처럼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나의 마음속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좋은 목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성도로 치환될 수 없다. 실력 있는 설교자는 자신의 삶을 전부 드린 헌신된 신자로 대체될 수 없다. 거짓된 목사와 가식적인 목사는 하나님을 삶에서 축출했음에도 여전히 ‘좋음’과 ‘실력 있는’ 이란 언어에 속아 넘어간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아니 몇 달 사이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났다. 누군가는 육신적으로, 누군가는 정신적으로, 누군가는 관계적으로 떠났다. 내 스스로 누군가를 비판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관계에 유독 약한 나에게 누군가 나를 멀리할까 봐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없는데도 그들은 이유를 말하지 않은 체 떠나갔다. 그랬다. 떠날 때는 말없이. 엠마와 같은 심정으로 복음서의 한 사건 한 사건 경험해 나갔다. 마지막 만찬을 행하신다. 엠마는 알고 있다. 지금 목숨을 바쳐 따르겠다는 헌신의 다짐도,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잠시 후 속절없이 무너져 버릴 것을 안다. 그녀는 전에 읽었던 복음서를 복기(復期) 한다.

“머잖아 등을 돌리고 도망갈 열한 제자, 그리고 그를 팔아넘기기까지 할 한 제자를 위해 자기를 한없이 낮추고 가장 더럽고 천한 일을 몸소 감당한 하나님의 아들이 여기에 있다.”

십자가, 그리고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 예수는 ‘내 안에 머물라.’하신다. ‘머문다는 말은 자신을 통째로 내게 맡긴다는 소리예요.’ 엠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 예수는 말씀하신다.

“난 반드시 살아야 할 삶을 엠마를 통해 살아갈 거예요. 다름 아닌 내 삶을 말이에요.”

더 비우고, 더 낮아지자. 더 겸손해지고, 더 가난해지자. 책을 덮자 난 책상에 있었고, 가을바람이 창문을 넘어 솔솔 불어온다. 상실은 여전하고, 상처받은 마음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지만 가을이 왔다. 그리고 집이다. 아내가 갓 로스팅한 과테말라 안티구아를 한 잔 내려왔다. 오늘부터 좀 더 주님을 묵상하고 실천하는데 시간을 쏟아야겠다.

 

글쓴이 정현욱 목사는, 책이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책벌레이며, 일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를 글로 표현하기 좋아하는 글쟁이다. <생명의 삶 플러스> 집필자이며, 여러 기독교 신문과 출판사 서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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