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는 목숨을 걸고 마지막 강단에 서는 자세로 설교를 하는가?
설교자는 목숨을 걸고 마지막 강단에 서는 자세로 설교를 하는가?
  • 이계윤
  • 승인 2017.09.15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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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당당뉴스

여러해 전 7080 프로그램에 등장한 윤복희 권사의 말이 생각이 난다.

“어렸을 때부터 큰 무대에 선 경험이 계신 선배님. 그런데 오늘 이 무대가 떨리십니까?” 진행자 배철수의 질문에 윤 권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대에 설 때 마다 내 생애의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하니 어찌 떨리지 않겠어요?” 이 대답에 진정 프로페셔녈의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가수 패티 김. 데뷔 60년 콘서트를 준비하는 모습이 TV에 비쳐졌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수천 번 불렀을 것 같은 “서울의 찬가”. 리허설을 하기 전부터 가사를 되뇌이며 준비를 한다. “내가 가수인데...가사를 까먹으면 안되잖아요. 저를 보러 오신 팬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노래를 선물해야지요.” 일생동안 노래를 하는 이 분들을 나는 진정한 장인(丈人)이라고 생각한다.

이분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설교 단상에 서서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들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말씀을 전하는가? 설교를 하는 목회자로서 나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대중가요도 아니고, 강의도 아니고 물건을 파는 일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이다. 얼마나 무겁고 장엄한 순간인가? 그런데 그러한 순간이 너무 많이 주어진다.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주일 예배, 심방예배, 돌잔치나 장례예배, 추모예배 그리고 개업축하예배... 설교를 해야 하는 많은 시간들. 때로는 준비 없이 단상에 서고, 전에 했던 설교 꺼내어 반복하고,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의 설교를 내 설교인양 읊조리고... 이러한 모습이 없었는가?

주제설교란 미명하에 먼저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맞는 성경본문을 찾아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설교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생 경험이란 설교한 경험 밖에 없어서 마치 자신을 설교의 달인처럼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설교를 가장 가벼운 것으로, 하기 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설교에 있어서 두드러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혹 설교자의 유머, 설교 도중의 예화나 간증 사례, 설교자의 시선, 설교자의 의상, 설교자의 테크닉, 설교자의 인간적인 화려함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목사 설교 잘해.” “우리 목사님 설교 들으러 가자.” 이런 표현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오늘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라고 성도들이 생각하도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다시 한 번 깊이 물어보자. “그대는 설교자로서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는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설교가 많은 홍수 시대에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설교는 찾기가 힘들다.”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Nothing in all creation is hidden from God's sight. Everything is uncovered and laid bare before the eyes of him to whom we must give account.)” (히4:12~13)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한다. 여기에서 회개가 있고, 용서의 은혜가 있고, 거듭남의 축복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의 설교가 선포되는 강단에서는 “소위 축복이나 은혜라는 이름 하에 듣기 좋은 말”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상실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설교자는 자신의 이야기, 경험, 책에서 읽은 이야기, 간증, 예화를 전하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러나 종종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우는 수단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무엇을 기억할까? 하나님의 말씀일까? 아니면 예화와 같은 수단일까?

또 한 가지. 성탄절이나 부활절 등 절기에 설교시간이 단축되고 찬양대의 칸타타로 대체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올바른 것인가? 물론 찬양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다. 찬양대의 찬양 혹은 칸타타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할 수 없다. 만일 대체하는 경우라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시간을 중엄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 긴장감을 가지고 공포와 전율 속에서 전하려 고 한다면, 마치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이 있는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는 각오와 자세로 임한다면, 오늘의 설교시간은 줄여할 것이다. 어쩌다가 한 번 히트치는 설교가 아니라 매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룩한 심정으로 단 한 번의 기회라도 인생의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임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나 자신을 제외한 불특정한 누구를 향한 이야기는 아니다. 먼저 설교자로서 나 자신을 향한 이야기이다. 동시에 함께 공유하므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아멘”은 커녕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더 많았다. 그는 하나님 말씀 전하는 일을 중단하려고 했다. 중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20:9)

이 말씀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이계윤 목사 / 지체장애인선교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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