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있는 신앙인, 선비 같은 목회자
양심 있는 신앙인, 선비 같은 목회자
  • 최주훈
  • 승인 2017.09.15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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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양심의 소유자, 선비 같은 목회자가 그리운 시대
마틴 루터

나는 신학 공부하는 후배에게 두 가지를 꼭 조언한다. 첫째는 양심 있는 신앙인이 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선비 같은 목회자가 되어달라는 부탁이다.

양심이란 말은 보통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이란 뜻으로 쓰이지만, 내가 말하는 양심은 좀 다르다. ‘양심’은 윤리의식의 범주가 아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자리’, ‘하나님 앞에 선 존재’라는 뜻이다. 이것은 루터에게서 배운 것이다. 양심 있는 목사가 되라고 조언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 가슴 팍 바닥에서 부터 들려오는 성령의 소리, 즉 소명의 소리에 집중해서 살라는 것이다.

양심이 성령의 자리라면, 양심의 소리에 집중한다는 뜻은 성령이 외치는 소리에 집중한다는 뜻이 된다. 성령은 힘이 세다. 세미한 성령의 소리라 할지라도 그 힘은 강하고 폭발력이 있다. 고로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는 강하다. 왜냐하면 안에서 밖으로 폭발하는 성령의 힘이 그를 이끌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두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돕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이렇게 양심 가진 목사, 양심을 가진 신앙인은 자연스레 절개 있는 선비의 삶을 살게 된다. 올곧은 진리의 일이라면 서슬 퍼런 칼이 목에 드리워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되레 하늘을 향해 가슴과 목을 내놓는 선비, 그것이 바로 양심 있는 목사, 양심 있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이런 양심을 가지고 신앙고백의 삶을 실천하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받은 자’의 삶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원하시는 삶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 양심을 가지고 신앙고백의 삶을 사는 것!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신앙고백은 고사하고 양심도 팔아먹을 기세로 사는 것이 오늘 우리 모습 같아 심히 아프다. 교회는 사유화되어가고, 설교는 약장수의 선전이 되 버렸고, 좀 깨어 있다는 목회자들마저도 반쪽짜리 진리의 경계선에서 전전긍긍하거나, ‘십자가 죽음의 지혜’는 숨겨 놓고, 값싼 설교, 만담처럼 재미난 설교에 몰입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변명도 구차하다. 교인들도 이런 설교 좋아하니 입맛에 맞추어야 한단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히 말 할 수 있어야 할텐데.., 어디 가서 드러내놓고 말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양심 없는 목사, 양심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는 그저 ‘예수 잡아먹은 허깨비들의 모임’ 일 뿐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는 양심의 종교이며, 교회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

마음, 입, 행동이 하나 되어 움직이며, 예수를 따라 사는 교회, 양심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실천하는 교회, 그곳이 바로 루터가 평생 꿈꾸고 소망했던 복음이 가득한 교회, 개신교회이다.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 선비 같은 목회자가 요즘 들어 더욱 그립다. 양심을 회복하자. 그리고 선비처럼 기개를 가지고 살자! 개신교회의 개신교인답게!

최주훈 | 루터의 재발견 | 복있는사람 | 2017

덧)

“지금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어떤 것도 철회하거나 거스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불편하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1521.4.18.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모든 글과 주장을 철회하면 목숨만큼은 살려 주겠다'는 황제의 위협에 맞선 루터의 최종 진술)

 

글쓴이 최주훈 목사는 중앙루터교회 담임 목사입니다. 아주 최근에 '루터의 재발견'(복있는사람)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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