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일을 하러가자!!
아픔의 일을 하러가자!!
  • 방영민
  • 승인 2017.09.16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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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모리 가조 (北森嘉蔵),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새물결플러스, 2017년
기타모리 가조 (北森嘉蔵),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새물결플러스, 2017년

필자는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복음의 정신과 예수님의 마음이 잘 담겨진 고난의 신학을 기대했다. 일본이 전쟁의 패배 후 그 고통과 눈물과 비극의 한 복판에서 상처를 만지시는 예수님과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부푼 마음으로 책을 접했다. 그러나 저자는 나의 기대를 빗겨갔고 전범국이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처럼 행사하였고 많은 일본인들은 여기에 마음을 실었다.

책의 해설을 보니 <기타모리 붐>이 일어났을 정도로 그는 전쟁 이후 망가진 일본에서 위로의 존재가 되었고 그의 신학과 사상은 대중의 슬픔을 치료하였다. 저자는 그의 신학을 훌륭하게 펼쳐간다. 칼 바르트가 너무 토착화되고 일본화된 그의 신학의 한계와 위험성을 지적하였지만 그는 독일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일본의 불교와 사상과 문화를 녹여내어 일본인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신학을 전개한다. 아마 전쟁으로 구멍 난 일본인들에게 그는 치유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분명히 세계 신학에 큰 기여를 하고 아시아 신학의 위상을 높였으며 각 나라에 맞는 신학을 펼쳐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실제 그의 책은 초판이 나온 이후 유럽과 북미의 여러 언어로 번역 되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신학 선진국에 이 책이 소개가 되고 유럽 전역에 퍼졌을 때 그 대륙 역시 전쟁의 비극과 쓰라림을 안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필자와 같은 심정(전쟁 속에 치유와 회복과 신학을 세워 가시는 하나님)으로 읽어나갔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그동안 이해되었던 사랑과 승리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큰 역할을 한다. 서구 신학으로 인식되고 편성되었던 신관을 동양적으로 바꾸고 조화를 이루는 전환점이 된다. 영광과 승리의 신관과 상승과 확대의 신학에 비수를 꽂는 느낌마저 든다. 아마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과학과 이성의 실망과 인간의 죄성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이런 아픔과 좌절과 고통의 신학에 큰 망치로 맞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동양인의 입에서 나온 신학이라니...

저자는 예레미야 31장 20절을 근거로 ‘아픔의 신학’을 조직신학적으로 그리고 일본식으로 풀어간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만 하는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픔의 신학이다. 그냥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발생하는 인간사의 상처와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특별히 가족과 부모와 자식사이에서 발생하는 아픔이다. 즉 하나님께서 죄로 가득한 이 땅과 죄 덩어리인 인간을 위해 아들을 보내셔야만 하는 그 아픔과 마음을 아는 사랑이다.

저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한다. 이 아픔을 상실한 채 신학은 기울어질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인들도 이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라 하기에는 부족하다. 실제 우리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자는 십자가와 제자도가 무엇인지 복음적이고 성경적으로 제시한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선포하고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는 무엇을 섬기며 따라야하는지 가르친다.

전쟁이라는 무덤 위에서 어쩌면 기복과 치유와 성공, 현세적인 말씀과 번영이 더 필요하고 어울릴 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교회가 그런 정신으로 살아왔고 왜곡된 신관과 신앙으로 유지되었기에 이렇게 비대해지고 무능해졌노라 진단하는 것 같다.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아픔에 관심 없고 자신의 십자가를 내팽개쳐 치고 산업화 근대화된 시대를 따라가다 보니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이라 질책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본질은 아픔이고 십자가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사랑과 성공으로 변질시켰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처절함이 있고 그것을 뛰어넘는 신비한 사랑을 알아야 하는데 후자만 기억하니 신앙이 세상적이고 신학이 왜곡되고 삶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시는 분이지만 죽게 해야만 하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니 본질에 어긋난다.

저자는 30세에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어떻게 신학의 노선을 바꾸는 배의 키 같은 책을 지었을까? 저자의 뛰어난 능력도 있겠지만 전쟁을 허락해도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는 신학계를 향한 하나님의 애달픔이 아닐까? 하나님이 죽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놀라운 소식에 더 이상 놀라지 못하는 교회를 향한 경고이지 않았을까? 필자는 감히 생각해보건대 사랑만 알지 아픔을 통한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나팔이었을 것이다.

성경을 보면 사사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막히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시대에 눈물을 흘리는 여인 한나가 있다. 자기에게 아들이 없어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아픔을 전혀 모르고 말씀은 희귀하고 비전이 하늘에서 땅에 도달하지 못하는데도 그것을 해결할 하나님의 사람이 없어서 우는 것이다. 한나가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는 것이다. 자기의 아들 없음으로 울었지만 하나님의 아픔을 모르는 아들이 없음으로 우는 하나님의 액체이다.

남자가 아니라 제사장이 아니라 그것도 비천한 여인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한숨이 느껴진다. 비록 저자가 한나라는 것은 아니지만 서구의 유명한 신학자가 아니라 그 유구한 역사에 비해 초라한 역사를 지닌 동양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본질과 심정을 드러내는 귀한 책이 쓰여 하나님과 신학의 본질을 세우는 책이 나왔다는 것은 저자의 유능함보다 이렇게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한숨이지 않을까?

이렇듯 저자가 강조하는 이 아픔의 신학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학이다. 우선 아픔이라는 것은 피하고 싶고 마주하기 싫은 현실인데 이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약자와 소외된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사회를 향해 공동체가 가져야 될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여전히 가난과 병듦과 차별이 존재하는 비인격적인 구조는 아픔을 공감하는 정신이 회복될 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신학은 교회를 향해서도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진노의 하나님만 느껴지고 사랑의 하나님만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진노와 사랑이 충돌하여 제 3의 길을 보여주는데 진노될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 아픔의 하나님이다. 교회가 십자가에서의 진노만을 외친다면 율법적이고 사랑만을 전한다면 이상적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픔을 알아 온전한 복음을 선포하고 왜 그 복음이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지 그 구원을 증거하여야 한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아픔의 공동체다. 아픔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내재적 삼위일체로 인해 사랑이라는 것과 조나단 에드워즈를 기반으로 하는 신학과 발전하는 창조신학으로 인해 ‘사랑’이라는 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로 강조되어 왔다. 인정하고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은 ‘아픔’이라는 것이 새롭게 인식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픔을 지니신 분이기에 교회는 아픔의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다.

교회는 아들을 보내셔서 진노를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곳이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지체들이 수많은 아픔을 가지고 한 몸이 되어 있는 곳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플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아픔이라는 것이 우울과 절망과 비참함을 심어주는 게 아니다. 교회는 이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본질을 알아 서로 하나되어 용서와 화해의 일을 실현할 수 있다. 즉 아픔의 신학은 아픔의 교회를 낳고 아픔의 윤리를 이루어간다. 사회와 연대하여 회복의 꿈도 펼쳐간다.

이렇게 저자는 그동안의 이해와는 다른 하나님의 본질을 보여준다. 아픔의 하나님.... 그렇다고 저자의 한계와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신학은 세계적으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불교와 문학과 문화에 기반을 둔 것이 분명하다. 군국주의적이고 국가론적인 사상과 불교의 슬픔 정신과 일본 비극인 가부키(그 속에 녹아있는 일본인 고유의 ‘쓰라림’)은 그의 신학을 일본적으로 만들었고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게다가 그의 책을 보면 기독교를 세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는데, 그리스-로마적인 기독교가 게르만(독일) 기독교가 되고 마침내 일본적 기독교가 된다는 논리로 복음사를 설명한다. 그리고 두 단계에서는 기독교가 하나님의 아픔이라는 결정적인 것을 상실했기에 전체 교회가 불행해졌고 쓰라림과 슬픔을 지닌 일본이 기독교를 회복하고 이어가야한다고 한다. 이 하나님의 아픔은 일본인의 마음에 의해서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필자는 저자의 이런 논리가 조금 황당하였고 보편교회와 진리가 지니는 영속성을 무시하는 듯 했다. 자기민족의 역사와 배경을 잘 이해하여 민족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신학을 만든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렇지만 신학의 고유성이 희미해지는 듯한 인상은 조금 불편하였다. 저자도 20세기까지는 신관이 치우쳐 있다고 했는데 그 또한 자신의 신학을 펼치며 민족으로 기운듯했다. 아마 독자들도 그의 기독교 복음사를 볼 때 잘못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저자가 예레미야 31장 20절에서 발견한 신학은 아픔이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노라” 구체적으로 후반부 “내 창자가 들끓으니”라는 부분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아픔을 읽어내어 조직신학적으로 풀어낸다.

각 민족마다 영혼과 인생의 중심이 되는 자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심장을 그 중심으로 보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창자를 그 ‘영혼의 좌소’로 보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을 떠나는 자기 백성을 향한 마음이 창자가 들끓는다는 것이다. 창자가 끊어진다는 것이고 내장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심장이 잘려나가도록 너무 아픈 마음이다. 마치 부모나 자식의 죽음 앞에 느껴지는 극심하고 처절한 고통이다.

이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에도 나타나고, 유리하고 방황하는 영혼을 바라보며 민망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도 드러난다. 즉 이 하나님의 아픔은 신앙의 기본이다. 아브라함이 이 아픔(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아비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인정받은 것처럼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이다. 이것을 아는 자가 전쟁과 핍박과 가난 등 인생에 서 있는 모든 아픔을 극복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아픔의 신학’ 이것이 얼마나 우리 교회의 신정론과 우리 사회의 정의 회복에 발전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모든 사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기 마련인데 피해자만 고통받는 것 같은 현실에서 이 신학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될까? 강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약자들의 눈물의 강은 멈추지 않을텐데...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 신학을 통해 하나님이 머무시고 손 잡아주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신학이 교회에 무슨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인가? 권력과 손잡고 기득권과 교회주의를 위해 존재해 왔던 우리의 신앙을 반성하고 아픔을 기반으로 한 사랑으로 나가길 소망해본다. 죄의 원인과 영향과 역사를 분명히 이해하고 정의와 공의를 위한 걸음을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픔이 있는 곳, 인간성이 파괴되고 인권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샬롬’이 무너지는 곳으로 교회가 나가게 되지 않을까!!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전쟁의 폐허 위에 쓰인 신학이 어떤 꽃을 피웠고 그리고 어떤 꽃을 피우게 될 것인지 그려본다.

 

글쓴이 방영민 목사는, 열린교회 부목사/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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