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선택하라.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선택하라.
  • 정현욱
  • 승인 2017.09.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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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에머슨 ,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십자가와 보좌 사이 :요한계시록, 이레서원, 2017년
매튜 에머슨 ,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십자가와 보좌 사이 :요한계시록, 이레서원, 2017년

묵시(默示), 난 이 명사가 두렵다. 아니 두려웠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단어이고, ‘종말론적’이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주해야할 단어이다. 그런데 그 뜻을 알았을 때 피식 웃고 말았다. 묵시는 잠잠할 묵(默)에 보일 시(示)를 사용했지만 그냥 계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계시가 아닌 묵시라는 단어를 사용할까? 성경은 계시다. 계시는 벗겨내는 것이며, 밝히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묵시는 무슨 뜻일까? 성경적 의미도 그렇지만 원뜻 자체가 계시이고, 드러내 보이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시는 어두컴컴한 종말의 이미지를 자아낸다. 그것은 아마도 ‘묵’이라는 단어가 ‘검다’와 ‘고요한’을 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우리나라 성경은 요한계시록 1:1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시작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요한묵시록(默示錄)이란 단어로 대체 가능하며, 실제로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그렇게 부른다.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계시는 좀 더 밝고 드러난 상태를 떠오르게 하고, 묵시는 아직 분명하지 않는 감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헬라어 ‘아포칼립스’(ἀπōκάλυψις)는 ‘덮개로 덮여있다’는 뜻이니 묵시록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미해 보이는 ‘계시’와 ‘묵시’의 논쟁은 요한계시록이 가지는 독특성 때문에도 불가피하다. 좋다, 묵시록이든 계시록이든 이 책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 책은 이레서원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말씀’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첫 책이었던 욥기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에서 강한 도전을 받았던 터라 두 번째 책도 적지 않게 기대했다. 100쪽을 조금 넘기는 작은 분량이기에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내용도 집약적으로 서술하였기 때문에 집중하여 읽으면 두 시간 안에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이 그리 가볍지 않다는 점에서 웬만한 신학적 지식을 갖추지 않는 독자라면 두 시간은 이 책을 읽기에 짧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인 매튜 에머슨(Matthew Emerson)은 사우스이스턴 침례신학교(South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성경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복음주의신학회와 성서문학회 회원이며, 오클라호마 침례 대학교(Oklahoma Baptist University) 교수이다. <성경과 해석학 세미나> 운영 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안타깝게 한글로 번역된 것은 이 책이 유일하다.

소장학파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그에게 요한계시록은 어떤 의미를 줄까? 추천서를 쓴 크리스토퍼 모건은 ‘생생하고, 명확하고, 매력적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내용, 장르, 이미지, 내러티브, 신학, 메시지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이 책은 요한계시록 주석이 아니다. 또한 요한 계시록의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전체적인 해석을 시도한 것도 아니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이 책은 요한계시록을 읽도록 도와주는 ‘관점’을 제시한다. 여기서 책 제목을 주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제목은 ‘십자가와 보좌 사이’다. 잘 된 번역이지만, 영어가 주는 문장의 순서와 강조가 바뀌었다. 영어 제목은 ‘사이 십자가와 보좌’(Between the Cross and the Throne) 순이다. 제목에 토를 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사이’(Between)에 방점이 찍힌다. 마지막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책은 ‘지금’ ‘여기’에서 ‘미래’와 ‘종말’을 살아가라는 요청이다. 결론을 담은 마지막 8장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모든 적들에 대해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돌아오실 때까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변함없이 실실하게 행하라.”(117쪽)

즉 삶이다. ‘이미의 십자가’와 ‘아직의 보좌’ ‘사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 사이에서 ‘긴장’하며 살아가야 한다. 저자는 그 삶을 ‘하나님의 선물’(119쪽)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삶을 살아야 하는데, ‘대립’(105쪽) 된 두 나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삶은 바벨론이란 은유로 표현된 로마, 즉 이 세상의 영이 지배하는 나라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 중에서 선택하는 삶을 살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보좌 사이는 삶이며, 어느 편에 설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다시 묵시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묵시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 즉 계시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대부분의 이야기를 은유와 상징으로 풀어낸 것일까? 적지 않은 학자들은 ‘숨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즉 로마의 핍박을 피해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책인 것이다. 불신자들, 특히 로마의 공권력에게는 숨기고, 기독교인들에게는 드러내는 이중적 역할을 하기 위하여 상징을 사용한 것이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풀기 위한 장치로 ‘편지, 예언, 묵시’라는 안경을 소개한다. 편지와 예언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묵시는 무엇일까? 저자는 말하기를 “예언과 묵시적 표현들을 사용한 것은 자신의 메시지가 그때와 오늘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읽히고, 믿어지고, 추종되기를 바라고 있었음을 알려준다.”(27-28쪽) 필자가 원하는 정확한 답은 아니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묵시는 시대를 넘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읽혀야 한다는 어떤 문학적 장치인 셈이다.

요한계시록은 스토리가 없어 보인다. 아니 혼잡하다. 그러나 집요하게 줄거리를 찾아내고, 플롯을 읽어내는 독자라면 직선적 이야기 속에 무한 반복되는 소소한 테마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아마겟돈 전쟁을 후반부에 두고, 마지막 예루살렘의 하강과 천국의 이미지가 대미를 장식한다. 이 땅의 일곱 교회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갑자기 천상으로 올라가고, 천상에서 수많은 모호한 상징과 은유들이 난무한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들은 구약에 익숙한 독자라면 금세 구약의 어떤 사건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익숙한 상징들이다. 문제는 그러한 상징들이 구약의 역사를 초월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용, 뱀, 두 증인, 짐승, 여자의 아이 등은 창조부터 신약 교회로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역사의 이미지들이다. 3장 ‘구속의 드라마’는 요한계시록이 역사적 토대를 바탕으로 ‘반복적이고 서로 맞물리는 구조를 사용’(36쪽) 한다고 일러준다.

단편 일률적인 연대기적 서술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요한계시록이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산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문학 장치들과 저자의 의도를 분석함으로 난해한 요한계시록을 해체하고 다시 재정립한다. 4장에서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서술’이란 주제로, 5장에서 ‘하나님의 적들’에 대해서, 6장은 ‘어린 양의 전쟁’을 다룬다. 숲 속에서 길을 찾기를 쉽지 않다. 그래서 길을 잃었다면 방향을 먼저 잡기 위해 고도를 파악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주변 높은 고지로 올라가 방위를 재설정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책이다.

요한이 계시록을 쓴 이유는 간단하다. 핍박 속에서 변절하거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잘 견디라는 권면이다. 그렇다면 한다면 난해해 보이는 상징들은 무엇이겠는가? 교회를 공격하는 적들의 정체와 그들의 운명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종말을 알면 싸움은 쉬워진다. 싸움은 이미 이겼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승리는 도래하지 않았다. 이제 곧 역사의 주인이며, 어린 양이 신 ‘예수가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15쪽)는 것이다. 초림의 주님은 재림의 심판주로 오신다. 그동안 우리, 신자들은 주님께서 남겨놓은 교회의 전통을 ‘몸으로 반복해서 행’하며 살아가야 한다.(109쪽) 어린 양이 싸웠던 적들은 보이는 실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종 사회의 구조 속에 내재’(107쪽) 되어 있기에, ‘세계에 만연한 탄압과 방탕에 맞서라고 요구하는 명령’(107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구속의 드라마를 통해 역사의 종말을 계시한다. 그리고 독자에게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을 종용(慫慂) 한다. 로마의 핍박에 속아 넘어가 신앙을 팔아넘길 것인가? 아니면 공의와 정의에 편에서 서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적 삶을 살아갈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로마를 선택하면 자유와 함께 탐욕스러운 우상과 손을 잡을 것이다. 예수의 주되심을 선언한다면 고난과 함께 영광의 면류관이 준비될 것이다. 이미 전쟁의 결론은 계시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신자들이 삶으로서 ‘어린 양의 승리’를 살아내야 한다. 문제는 신자들의 삶의 여정이 미래라는 아직 드러나지는 시간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은 계시인 동시에 묵시(默示)인 것이다. 

 

글쓴이 정현욱 목사는, 책이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책벌레이며, 일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를 글로 표현하기 좋아하는 글쟁이다. <생명의 삶 플러스> 집필자이며, 여러 기독교 신문과 출판사 서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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