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작은교회, 한국교회의 적폐를 재편하는 힘?
건강한작은교회, 한국교회의 적폐를 재편하는 힘?
  • 김동문
  • 승인 2017.09.1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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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 | 재편 | 비아토르 | 2017
이진오 | 재편 | 비아토르 | 2017년

이 책 제목 <재편> 이라는 단어를 접하고는, 저자 이진오 목사가 그동안 많이 애써온, 나름 치열하게 살아온, 교회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한국교회의 내부 고발을 담은 책인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일방적인 착각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반성했다. 책에는 그런 것을 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강한작은교회’를 향한 몸부림을 담고 있었다. 건강한, 작은, 교회는 무엇일까?

이 글을 쓰면서 이 책 <재편>의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몇 몇 내용에 대해 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고 싶다. 글쓴이 이진오 목사가 던진 질문 또는 주장에 대한 내 나름의 독백인 것이다.

글쓴이는 작은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최소한의 자립이 가능한 50명에서 공동체 구성원들끼리도 서로 알 수 있는 규모인 200명 이내의 교회라고 언급한다. 적절한 언급이라 생각한다. 글쓴이는 그런데 왜 최대 숫자는 청장년 200명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추론할 근거들을 제시한다. “목사만 모든 신자를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교회가 공동체이자 가족이라면 신자들끼리도 충분히 소통하고 교제할 수 있어야 한다“(59쪽)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50명의 성인교인이 모이지 못하는 더 작은 교회들은 어떻게 건강성을 형성할 수 있을까?

내가 만났던 건강한 작은 교회를 지향한다는 이들 가운데, 저런 사람들 때문에 건강한 작은 교회 운동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의심을 오래전에도 제기해본 적이 있다. 교회를 성장시킬 수도 성숙하게 만들 수도 없는 이가, 스스로 ‘(건강한)작은교회’라는 간판 뒤에 숨어서 스스로를 변명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의심하던 경험도 내게 적지 않았다.

 

"끊임없이 큰 교회를 지향하고, 큰 교회의 가치와 방향을 쫓고, 큰 교회가 되기 위해 행정과 프로그램을 운영하다 보면, 교회는 그냥 ‘작은 교회’가 아니라 ‘크지 못한 교회’가 되고 만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만의 가치와 방향으로 목회하고 운영할 때 열등감과 비교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작은 교회의 가치를 ‘건강한작은교회’라 부른다. 작은 교회라고 모두 다 건강하지는 않다. 크지 못한 교회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의도적으로 작은 교회, ‘작음’을 지향하는 교회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 <재편> 21-22쪽

책을 읽으면서 저자 이 목사의 표정과 감정이 다가왔다. 글쓴이의 말투와 표정과 속내를 느낄 수 있었다. 많은 면에서 공감했다. 글쓴이가 언급한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할 때, 내 눈 앞에도 어떤 사람들, 어떤 교회들, 어떤 사건들이 재현되고 있었다. 이것은 이 목사의 교회 현실에 대한 직면은 그 만이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그리고 또 다른 독자들에게도 일상이 된 안타까운 현실일 수 있다.

건강한 작은 교회를 향한 그 바람을 보여주는, '건강한작은교회의 열두 가지 가치와 방향'(39-41쪽)에서는 그 꿈을 만져본다.

‘건강한작은교회’도 ‘나들가게’ 전략을 채택하면 어떨까. 물리적 방법으로 대형 교회를 해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또한 대형 교회가 변화하는 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따라서 ‘건강한작은교회’들이 나들가게처럼 일종의 공동 브랜드를 만들어 공동의 가치와 방향을 확산해나가면,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고 대형 교회의 변화도 유도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44쪽

“지역 교회는 큰일 하는 교회가 아니라 지역의 작은 일을 크게 감당하는 교회이다” - 100쪽

이 말은 위로가 되는 말이다. 그러나 작은 큰 교회, 작은 클 교회들은 지역의 작은 일도 감당하지 않는 현실은 서글프기만 하다. 교회를 키우고자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도 크지 못해서 작은 교회들이 큰 교회 비판에 목청을 돋우는 모습들도 떠오른다. 일종의 피해의식에 젖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속내를,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는 미사여구로 뒤덮는 이들도 주변에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 글쓴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작은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크지 못해서 작은 교회가 아니라 ‘건강한작은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른 정신과 가치를 따라, 작아서 그 자체로 행복하고 감사한 그런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게으르거나 지지리 궁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작은 교회는, 한 교회를 “더 크게”, “더 호화롭게”, “더 영향력 있게” 만들기 위해 성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여러 교회로 “더 넓게” 성장하는 교회이다. - 127-128쪽

필자의 주변에는 나름 대형교회에서 목회하는 지인들도 있고, 그런 곳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건강한교회’가 브랜드화되고, 그것을 사고파는 교회 현실이 눈앞에 가득 차올랐다. 건강한 교회는 교인 수나 교회의 규모와는 독립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예를 제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치명적 약점이기는 하다. 건강한 담임 목회자라고 하여, 그가 섬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아픔이다.

 

교회는 하나님께 선택받고, 하나님에게서 권세를 부여 받은 모든 신자의 수평 네트워크를 지향한다. 그중에는 직분자도 있고 맡은 사역과 역할에 따른 직임도 있지만 모든 신자는 동일한 신자이다. 목사, 장로, 집사를 비롯한 그 누구도 계급적 우위에 있지 않다. ... 그러나 수평 네트워크라고 하여 권위나 은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사역이 있고 역할이 있으며 그에 따른 직분이 있다. 직분에 따른 권한과 책임도 있다. 이것은 수직적 강요가 아니다. 하지만 수평 네트워크에 질서도 권위도 없는 것은 아니다. - 147, 148쪽

요즘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주장들이 있다. 목레기(쓰레기 같은 목사) 운운하며, 마치 한국 교회의 적폐의 주범이 목사인 것처럼, 목사 비판에 열중하고, 자비량 목사만이 대안인 것처럼 주장하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권위주의를 반대한다고 하면서 권위의 해체를 주장하는 듯, 자신들의 목소리가 교회 개혁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것 인양 권위를 내세우는 것만 같다. 서로의 같음과 다름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만이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바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런 교회를 꿈꾼다. 도란도란 이야기 꽃 피우던 우리네 마을 공동체처럼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함께하는 그런 교회를 이루고 싶다. 차비가 없어 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 신자에게 기도 한마디 해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머니를 열어 차비를 내어주는 교회, 밥이 없어 배 골아야 하는 신자에게 내 밥 한 그릇 나누어주는 교회, 그런 교회, 그런 신자면 좋겠다. - 256쪽

문득 ‘지란지교를 꿈꾸며’ 라는 유안진 시인의 글이 다가왔다. 이 소박한 꿈이 일상이 되고 현실이 되는 그런 교회이면 좋겠다. 그러려면 교회는 지역교회여야 할 것 같다. 이런 삶은 권위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 목회자여야만 가능하고, 섬기는 권위를 무시하지 않는 교인들이어야만 가능한 현실일 것 같다,

 

아쉬움

이 책을 덮으면서 드는 아쉬운 것이 있다. 사소한 개인의 의견이지만. 1부 생태계가 맨 뒷부분에 배치되었으면 어떠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교회의 핵심, 가치, 한 방향을 다루고, 그 한 방향을 가는 교회들이 이뤄나가는 교회 생태계를 언급하는 것도 좋았을 것 같다. 각 부의 말미나 다른 위치에, 같이 생각하거나 개인적으로 돌아보면 좋을 고민과 토론 제목들을 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진오 목사는, 또다른 공동체 새나무교회를 시작했다.

많이 아쉬운 것이 있다. 재편하여야 하는 한국 교회의 적폐 가운데는 교회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다양한 차원의 여성 차별과 여성 혐오이다. 이것은 여성안수가 시행되는 교단과 교회라고 하여도 그것을 비성경적이라고 격하게 반대하는 교단, 교회들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교회 재편에 있어서 여성들의 자리는 무엇일가를 고민한다.

자기결정권이 없는 감정노동자 신세 같은 적지 않은 부목사들과 전도사 등 부교역자들의 존재가 떠오른다. 주변 지인들의 얼굴과 그 삶이 떠오르며 가슴이 아팠다. 이들은 한국교회 재편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들인가 누구인가? 담임목사라는 명목은 갖고 있되, 혹독한 시집살이하는 이들도 떠오른다. 교회를 개척하여 50명에서 200명되는 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들에 비하여 이들 목회자들이 갖는 권위나 결정권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닫는 글

한국교회의 교단이라는 생태계 속에서 부목사들, 부교역자들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담임목사에게 찍히면 다른 교회로 사역지(일터)를 옮기는 것도 막히는 것이 슬픈 현실이 아닌가? 책을 읽을 때보다, 책을 덮고 나서 더 가슴이 아려온다.

말 많은 대형교회 안에서도 소신을 잃지 않고 사역자의 길을 가고 있는 목사들, 브랜드교회의 담당목사로 교인을 사람으로 존중하며 섬기는 지인들, 자신이 개척한 교회임에도 스스로 권위주의를 버리자 존중되어야 할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가볍게 취급하는 교인들로 아파하는 친구들, 교회에 있으나 마음이 떠난 이웃들, 조직교회를 떠나 영적 순례 중인 이들, 건강한 교회를 고민하며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응원한다. 건강한 목회자, 건강한 교회로 알려진 교회에서 조차 교역자와 직원들 및 그 가족의 삶과 인격이 철저히 짓밟는 현실로 아파하는 이들과 공감한다. 

‘큰 교회를 위한, 큰 교회를 향한, 큰 교회에 의한 큰 교회를 중심으로’(42쪽) 이미 자리 잡은 거대한 생태계에 희생당하거나 맞서는 이들 모두를 기억한다.

이 책, 이런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건강한교회를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건강한 큰교회는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스스로 건강한 큰 교회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권한다.

스스로 살아온 것 만큼, 고민한 분량 안에서 이렇게 한국교회를 향한 고민을 적용 가능한 제안을 담아서 제시해준 글쓴이 이진오 목사, 그리고 책을 펴낸 비아토르의 김도완 대표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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