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프레지던트]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미스 프레지던트]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 최은
  • 승인 2017.09.22 0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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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감독의 [미스 프레지던트](2017)
김재환 감독의 <미스 프레지던트>(2017), 10월 26일 일반 공개된다.

“그분들은 풍자의 대상이 아닙니다.”

<미스 프레지던트>(2017)를 제작한 김재환 감독의 말이다. 그분들이 권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가 지금껏 날카롭게 비웃고 비난해왔던 MB나(<MB의 추억>, 2012) 대형교회(<쿼바디스> 2014), 거대 방송사들(<트루맛쇼>, 2011)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그분들을 불쌍하게 내려다보는 것도 답은 아닌 것 같다. 조롱의 대상이 아니고, 어리석거나 무지해서 오히려 연민을 일으키는 상대도 아니라면, 내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은 그분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신앙(종교심)’과 ‘은혜(고마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를 설명할 길이 없다. ‘’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박사모) 어르신들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미스 프레지던트>는 이 두 가지를 핵심으로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들은 박정희 육영수가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 수 없었다고 단언하며 눈물을 흘린다. 정화수(井華水) 떠놓고 치성을 드리듯 매일 아침 국민교육헌장을 낭송하며 박정희 사진 앞에 4배를 올리고, 육영수 생가를 성지로 여기며 매년 박정희 탄신일을 기린다.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종북 좌파’들을 보고 있자면 분해서 울컥울컥하는 그 어르신들에게, 박정희는 ‘우리를 굶주림으로부터 구해’주시고 ‘잘 살게 해 주신 분’이다. 그가 신이든 인간이든, 반신반인이든, 그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분의 딸에게 우리가(너희가) 그렇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는 거다. 게다가 ‘우리 박근혜’는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 리가 없다...

[박사모를 이렇게 이해하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삼대 세습이 가능한 북한 사회(그분들이 그렇게도 치를 떨게 혐오하는 상대!)는 물론이고 한국교회가 돌아가는 참으로 못된 방식까지도 ‘그럴 수 있었겠다’ 싶어진다. 간단하다. 박정희 일가의 자리에 김일성 일가와 목사들을 대입해 보면 된다. 대형교회와 세습 목사들의 경우는 더 쉽다. 그러게 말이다. 이건 뭐 방정식도 함수도 아니고...]

박근혜가 진짜 ‘배신’한 것은 누구인가?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것은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와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미스 프레지던트>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분들이 옳았다는 깨달음이었다. 박정희가 ‘이만큼’ 우리를 ‘잘’ 살게 한 것이 맞다, 그러니까 딱 이만큼. 이렇게 진심이 넘치고 은혜를 알며, 오래도록 감사할 줄 아는 민족이라니... 박정희와 박근혜가 아니었으면, 하여 제대로 된 지도자를 만났더라면, 그분들이(우리가) 얼마나 더 행복하게 진짜로 잘 살 수 있었겠는가.

영화의 관점에 대한 논란과 비판이 많지만, 나는 적어도 <미스 프레지던트>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 영화라고 믿는다. 일단 이 영화는 박사모의 일방적인 주장을 옹호하고, 박정희 박근혜를 미화하지 않는다. 헌재에서 이정미 재판관이 박근혜 탄핵 판결문을 읽는 중에 삽입된 얼굴들이 영화의 속내를 잘 드러내보여 주었다.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라고, 이정미 재판관이 말하는 지점에서 화면은 울산의 박사모 부부의 얼굴로 전환된다. 누구보다 열심히 ‘박사모 가족’으로 활동한 분들로, 이들은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가) 좀 잘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말하며 침울해했다. 망건 쓰고 도포 입고 올라온 청주 어르신이 서울역 광장에서 박사모의 열광적인 집회 분위기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시선을 보이던 모습도 오래도록 남는다.

전통 한복을 입은 사람이 박정희 동상에 절을 하고 있다.ⓒ다음

‘배신’이 ‘신뢰를 배반한다’는 뜻이라면, 결국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박근혜가 배신한 것은 그를 마지막까지 무한정 신뢰하고 신앙했던 바로 그분들 아니겠는가, 영화는 말한다. 따라서 그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입은 이들도 바로 그들이다. 박정희와 박근혜, 그들은 정말 나빴다. 그 점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느 쪽에서도 지지받지 못할 것이다.

시사회에서의 즉각적인 반응도 그랬다. 누군가 분노를 내뱉었다. 어떻게 그들이 주장하는 그대로 박정희를 이처럼 미화할 수 있냐는 반발이었다. 반면, 박사모 쪽에서 보아도 영화는 성에 안찰 수 있다. 막상 보고 나면 박정희의 새마을 시대 향수에 젖어 감독에게 고마워할지 모르겠으나(시사회에서 그런 분들이 적지 않았다), 더러 자신들이 난폭하게 담긴 장면이 못마땅하거나 그들의 패배를 다룬 것 같아 기분 나쁠 수도 있다. 게다가 영화를 보지도 않고 좌파 감독이 또 이상한 영화를 만들어서 자신들을 우습게 만들었다고 무턱대고 화를 낼 가능성도 크다. 어느 쪽도 냉철하고도 열린 마음으로 영화의 의미를 곱씹어볼 것 같은 태도는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이 영화가 박정희에 대한 역사의 평가와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동의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넘어갔다는 데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어르신들을 자극할까봐 언급을 회피했거나. 조국 근대화에 기여했을지 모르나, 사실상 그가 저지른 숱한 물리적 폭력과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분단의 비극을 악용한 폭정과 언론과 방송의 왜곡 등이 이 나라에 미친 해악이 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에 동의하는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이 이 영화에 접근하는 출발점이 같을 수 있을까. 그들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기나 할 수 있을까. 영화가 박정희를 미화했다는 오해는, 바로 그 출발지점에서 발생한 균열일 것이다. 섣불리 ‘가르치지 않으려는’ 점잖고 예의바른 다큐멘터리의 딜레마이자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미스 프레지던트>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동시대인’이 될 수 있을까?

같은 시간대에 생존해 있다고 해서 모두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강준만 선생은 “대한민국은 근대와 전근대와 현대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사회”라고 썼고, 조르주 아감벤은 “동시대성이란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라고 말했다. 아감벤에게 동시대인이란, 시대의 어두움에 주목하는 자이다.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하되, 빛이 아니라 어둠을 자각하는 것. 따라서 모든 시대는 그 동시대성을 체험하는 자들에게는 어둡다. 현재의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려 애쓰지만 그럴 수 없는 이 빛을 자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용기의 문제다. 지금까지는, 태극기 집회의 시민들과 촛불집회의 시민들이 바라보는 ‘시대의 어둠’은 확연히 달랐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두 집단은 동시대인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

이제는 좀 달라질 수 있을까. 어쩌면 여기저기서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아감벤식으로 말하자면, 동시대인을 자처하여 용기 있게 이야기를 꺼내놓은 <미스 프레지던트>의 도움이라도 받는다면 말이다. 터놓고 말해, 그분들이 이 시대의 ‘어두운 면’이라고 인정되면 될수록, 더욱 그분들에게 주목하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다 보면 아직 도달하지 않은 희미한 그 ‘빛’을 우리도 감지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미스 프레지던트>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글쓴이 최은은, 영화평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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